‘우리가 여진과 직접 싸울 필요는 없다.’
이행리는 여진의 공격을 무산시키기 위해 원나라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이용했다. 쌍성총관부는 고려 후기 몽고가 고려의 화주(和州:지금의 함경남도 영흥) 이북을 직접 통치하기 위해 설치했던 관부였다. 화주에 총관부가 있고 함경도를 총괄하여 다스리고 있었다. 함경도 일대는 발해 멸망 이후 고려의 통치력이 제대로 미치지 못해 고려의 유민과 이민(移民)들이 여진족들과 섞여 살고 있었다. 고려가 몽고와 치열한 전쟁을 벌이던 1258년(고종 45)에 용진현(龍津縣) 출신의 조휘(趙暉)와 정주 출신의 탁청(卓靑)이 고려의 관리를 죽이고 몽고에 투항한 지역이었다.
이행리는 쌍성총관부에 구원을 요청해 총관부가 여진을 제압하게 했다. 이행리는 그들의 선조가 원나라에 귀화했기 때문에 몽고인 행세를 했다. 쌍성총관은 이행리의 구원요청을 받아들여 여진족을 공격했다. 여진족은 막강한 원나라의 군대에 굴복하여 물러날 수밖에 없었고 이행리의 무리는 동북면 일대에서 대대로 살 수 있게 되었다. 여진족의 적은 이제 원나라가 되었고 이행리의 집단과 여진족은 평화롭게 살 수 있었다. 이행리는 비록 선조들이 원나라에 귀화했으나 고려인이라는 정체성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여진족과 싸우지 않게 되자 함경도 일대에 자신의 제국을 건설했다. 그는 함경도의 미개척 지역까지 주민들이 들어가 살게 하여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이행리의 아들 이선래(李善來)는 함흥을 대읍으로 만들었다. 그는 쌍성총관 조휘의 딸과 혼인해 동북면의 최고 실세가 되었다. 이선래의 둘째 아들 이자춘(李子春)은 형이 죽는 바람에 부친의 모든 기반을 세습했다. 이 무렵 원나라의 쌍성총관이 죽자 동북면에서 권력 쟁탈전이 벌어졌다. 쌍성총관 탑사불화(塔思不花)는 두 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둘째 부인 조씨가 자신의 아들 나해(那海)를 후계자로 내세웠다. 조씨와 그 아들은 그 지역의 세력가였다. 그러자 첫번째 부인 박씨 일족과 탁씨 일족이 반발했다. 두 세력이 총관부의 주인이 되기 위해 다투자 이자춘은 비상한 관심을 기울였다.
‘이 기회를 잘 이용하면 동북면을 내 수중에 넣을 수 있다.’
이자춘은 동북면의 정세를 살피고 결단을 내렸다. 박씨는 쌍성에서 가장 미인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외모가 빼어났다.
“형수님, 조씨는 두 번째 부인이고 형수님은 첫 번째 부인입니다. 그러므로 후계자는 형수님의 아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자춘은 쌍성총관의 첫 번째 부인 박씨를 충동질했다.
“그렇기는 하지만 내 아들은 어려요. 나도 누구에게 의지해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박씨 부인이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이자춘은 박씨 부인의 한숨에 가슴이 저렸다. 그는 박씨 부인과 쌍성총관부를 손에 넣기 위해 박씨 부인을 은밀하게 찾아갔다.
“형님이 돌아가시면 아우가 그 식솔들을 돌보는 것은 우리의 오랜 전통입니다.”
이자춘이 박씨 부인에게 말했다. 이자춘의 말은 취수제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자춘은 박씨 부인에게 형수님이라고 부르면서 접근했다.
취수제도는 고구려의 산상왕에 그 예가 있다. 고구려 제9대 왕인 고국천왕은 제나부의 족장 우소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우씨는 고국천왕이 운명하자 이를 내외에 알리지 않고 밤중에 몰래 궁을 나와 고국천왕의 첫째 동생 발기(發岐)를 찾아갔다.
“대왕이 후사가 없으니 그대가 뒤를 잇는 것이 마땅하오.”
우씨는 발기를 왕위에 추대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노골적으로 발기에게 추파를 던진 것이다.
“하늘의 역수(易數)는 돌아가는 때가 있는데 어찌 이를 가볍게 의논하리오? 부인이 야행을 하는 것은 더욱이 예가 아니오.”
발기는 눈을 부릅뜨고 우씨를 추궁했다. 우씨는 왕제 발기가 자신을 추궁하자 부끄러워하면서 고국천왕의 둘째 동생 연우(延優)를 찾아갔다. 연우는 우씨가 찾아오자 발기와 달리 정중하게 맞이하고 음식을 대접했다.
“대왕께서 돌아가셨으므로 발기가 어른이 되어 왕위를 잇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는 나에게 이심(異心)이 있는 것처럼 말하니 무례합니다.”
“밤이 깊었으므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니 그대는 나를 궁까지 호위해 주오.”
우씨가 연우에게 눈웃음을 치면서 유혹을 했다.
“왕비마마의 영을 따르겠습니다.”
연우가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우씨는 연우의 손을 잡고 수레를 타고 무사히 궁으로 돌아와 고국천왕이 죽었다는 사실을 내외에 선포하고 군신들에게 고국천왕의 유언이라고 하면서 연우를 즉위시켜 왕으로 삼았다. 우씨는 취수(取嫂)를 허락하고 있는 고구려의 풍습에 의해 연우의 왕비가 되었고 연우는 고구려의 제10대 산상왕이 되었다.
우씨는 산상왕의 사이에서도 아이를 낳지 못했다.
“행실이 나쁜 내가 죽으면 무슨 낯으로 고국천왕의 옆에 묻히겠는가? 나를 산상왕릉 곁에 묻어 달라.”
우씨는 죽을 때 그와 같은 유언을 남겼다. 자신의 생각에도 형제를 남편으로 모셨던 일이 회한으로 남은 모양이다. 고구려 사람들이 그녀의 유언대로 산상왕릉 곁에 우씨를 묻었다.
“어제 왕비 우씨가 산상왕의 곁에 묻힌 것을 보고 분함을 이기지 못해 그와 싸웠다. 물러나 가만히 생각하니 낯이 뜨거워 백성들을 대할 수가 없다. 너는 조정에 알려서 내 무덤을 울타리로 막아 달라.”
죽은 고국천왕의 영혼이 한 무당의 꿈에 나타나 말했다. 이에 고구려 사람들이 소나무를 고국천왕 왕릉 앞에 일곱 겹으로 심어 울타리를 만들었다.
취수에 얽힌 이야기다. 이자춘은 취수제도를 내세워 박씨를 유혹한 것이다.
“저를 받아주신다면 무엇이 두렵겠어요?”
박씨는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이자춘을 응시했다.
“제가 도울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자춘은 박씨 부인과 손을 잡고 원나라 조정에 후계자를 바꾸어 줄 것을 요청했다. 원나라 조정에서 박씨 부인의 어린아들을 후계자로 인정하자 조씨 부인 일가가 일제히 반발했다. 이자춘은 쌍성총관의 아들인 탁씨가와 손을 잡고 조씨가를 공격해 나해를 죽이고 그들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 박씨 부인은 아들이 성장할 때까지 이자춘에게 쌍성총관부를 위탁했다. 야심이 많은 이자춘은 박씨 부인의 어린아들이 성장한 뒤에도 총관부를 돌려주지 않고 자신이 다스렸다.
이때 중국에서는 원나라가 쇠퇴하기 시작해 명(明)나라가 일어나고 고려의 공민왕은 원나라에서 이탈해 명나라와 손을 잡았다. 고려는 1356년(공민왕 5)에 대대적인 반원운동(反元運動)을 전개하면서 밀직부사 유인우(柳仁雨)를 동북면병마사로, 전대호군(前大護軍) 공천보(貢天甫), 전종부령(前宗簿令) 김원봉(金元鳳)을 부사로 삼아 동북면을 공격하게 했다.
이자춘은 동북면의 정세를 살피다가 과감하게 원나라와 손을 끊고 고려와 손을 잡았다.
쌍성총관부 총관 조소생과 천호 탁도경이 고려의 대군에 저항했으나 이자춘이 고려군에 내응함으로써 조소생은 이판령(伊板嶺)을 넘어 원나라로 달아나고 쌍성총관부는 폐지되었다. 원나라와 손을 끊고 고려에 내응한 이자춘은 공민왕으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이자춘의 내응으로 쌍성총관부가 고려의 영토로 편입된 것이다. 공민왕은 고려의 부패한 귀족들을 개혁하고 원나라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자춘과 같이 배경이 없는 무장과 군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네 할아버지와 네 아버지는 몸은 비록 원나라에 귀화하였으나 그들의 마음이 우리 왕실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 고조(考祖)께서도 총애하고 가상하게 여겼다. 이제 너는 할아버지, 아버지를 욕되게 함이 없을지어다. 그러면 내가 장차 그대를 잘 성취시켜 주리라.”
공민왕이 이자춘을 우다치(亐多赤:왕의 시위대)에 임명하고 말했다. 동북면에서 활약을 하던 이자춘은 22세인 그의 아들 이성계와 함께 고려의 도읍 개경에 머물렀다. 이자춘과 이성계는 개경에서 발전된 문물을 처음으로 접했다.
이자춘이 고려의 도읍 개경에 있는 동안 동북면의 정세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원나라가 쇠퇴할 기미가 보이자 여진족이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홍건적이 남하할 움직임을 보였다.
원나라에서 정변이 일어나 심양으로 피한 기황후와 그의 일파가 고려를 공격하려고 했다. 신흥제국 명나라와 원나라의 전쟁도 치열했다. 공민왕은 이자춘을 동북면 병마사에 임명해 쌍성총관부를 지키게 했다.
“이자춘은 사병을 거느리고 있으니 해체해야 합니다.”
고려의 대신들이 공민왕에게 아뢰었다.
“동북면은 그가 아니면 다스릴 수 없다.”
공민왕은 대신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자춘은 원나라 천호장의 신분에서 고려 병마사로 신분이 바뀌어 함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죽고 27세의 아들 이성계가 동북면을 세습해 다스리게 되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