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나를 제거하려는 음모가 아닌가?’
이성계는 최영이 자신을 제거하기 위해 계책을 도모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홍건적과 왜구를 잇달아 격파해 조야의 신망을 얻은 최영은 딸을 우왕에게 시집보내 국구가 되었다. 또한 그는 고려 조정에서 가장 높은 벼슬인 문하시중이 되어 있었다. 이성계는 문하수시중으로 다음 벼슬이었다.
이성계도 고려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웠다. 이성계는 기울어가는 고려 조정에서 누구보다도 출중했고 강직했다. 위화도 회군으로 우왕과 최영을 죽이고 조선을 개국했다고 하여 정권찬탈자로만 보는 시각도 있는데 이도 잘못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고려는 공민왕 때부터 극도로 부패해 있었다. 원나라에 충성하기 위해 충자로 들어가는 시호가 붙었던 임금들은 황음무도했다. 왕들은 아버지의 후궁까지 겁탈했다.
고려 충숙왕 때에 개성에 한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좌상시 벼슬을 지낸 권형의 딸로 그녀의 남편은 고려의 말단 관리였다. 그는 아름다운 아내를 늘 곁에 두고 사랑하면서 지냈다. 그러나 아름다운 장미에는 가시가 있다는 말처럼 권 씨는 남편의 벼슬이 보잘것없고 집안도 가난하자 정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루는 충숙왕이 사냥을 가다가 집 앞에 있는 권 씨를 보았다. 권 씨는 눈부신 미모를 갖고 있었고 눈에는 색기가 철철 넘쳐흘렀다. 충숙왕 같은 호색가가 권 씨를 그냥 둘리 없었다.
“너는 누구이며 지아비는 있느냐?”
충숙왕이 그녀를 불러다가 물었다.
“저는 권형의 딸로 전 씨 집안의 며느리입니다.”
권 씨가 교태가 흐르는 요염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색이 아깝도다. 어찌 미인이 그와 같이 보잘것없는 사내와 살고 있는가?”
“시집을 갔으나 정이 없으니 이혼을 할 수 있습니다.”
권 씨는 충숙왕이 자신을 좋아하는 눈치를 보이자 당돌하게 말했다. 왕이 원하면 이혼이라도 하겠다는 말이었다. 왕은 이혼을 하고 오라고 한 뒤에 사냥을 나가서는 그녀에 대해서 잊었다. 권 씨는 집으로 돌아오자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나와 이혼을 하려는 이유가 무엇이오?”
남편은 그녀의 이혼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내가 당신이 싫어졌으니 이혼을 하려는 것입니다. 무슨 이유가 있겠습니까?”
“이혼은 절대로 할 수 없소.”
남편이 이혼을 해주지 않자 권 씨는 아버지 권형을 움직여 이혼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나서도 그녀의 남편은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네가 이혼을 하지 않으면 왕이 너를 죽일 것이다.”
권형은 충숙왕의 어명이라면서 강제로 이혼을 하게 했다. 권 씨는 이혼을 하자 즉시 충숙왕에게 구애하여 궁중으로 들어갔다. 충숙왕은 아름다운 그녀를 총애하여 수비(壽妃)에 책봉했고, 그녀는 소망했던 권력과 부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권력만 추구한 수비는 충숙왕 사후 그 아들 충혜왕에게 겁탈당하게 된다.
충숙왕과 충혜왕은 부자지간으로 왕위를 서로 다툰 인물들이다. 충혜왕은 1330년 왕위에 올랐다가 1332년에 폐위되고 1339년에 다시 복위되었다. 수비는 충혜왕이 복위되던 해에 죽는데 그 죽은 이유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충혜왕은 수비를 겁탈한 것에 그치지 않고 또 다른 서모인 경화공주도 겁탈했다. 충숙왕은 원나라의 공주를 셋이나 왕비로 맞아들였다. 첫 번째 왕비로 맞아들인 공주가 죽자 두 번째 공주를 맞아들였고, 그녀가 죽자 다시 원나라 세 번째 공주인 경화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인 것이다. 충혜왕은 상당히 변태적인 인물로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경화공주가 잔치를 열어 초청하자 술에 취한 체하면서 경화공주의 처소에서 잠을 자다가 밤중에 몰래 그녀의 침실로 침입해 들어갔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나는 선왕의 왕비입니다.”
경화공주는 충혜왕이 달려들어 옷을 벗기자 기겁을 하여 소리를 질렀다.
“그대는 젊고 예쁘니 밤이 외롭지 않소? 내가 사랑을 해드리다.”
“물러가시오. 사람을 부르겠소.”
충혜왕은 경화공주가 펄펄 뛰자 내시를 불러 공주의 팔다리를 붙잡아 꼼짝 못하게 하고 간음했다. 이토록 음란한 충혜왕은 결국 성병인 임질에 걸렸고, 왕과 동침한 대부분의 여인들도 이 병에 걸렸다.
이성계는 공민왕이 왕위에 있을 때 고려 중앙무대로 진출했다. 1361년 이성계는 홍건적 10만 명이 고려를 침략하여 수도 개성이 함락되었을 때 수도탈환 작전에 참가해 친병(親兵) 2000명을 거느리고 가장 먼저 입성하여 명성을 떨쳤다. 1362년에는 원나라 장수 나하추(納哈出)가 수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홍원지방을 휩쓸었다. 이성계는 동북병마사가 되어 나하추와 혈전을 벌였다.
나하추는 군사 수만 명을 거느리고 조소생, 탁도경 등과 함께 홍원의 달단동에 주둔하고, 합라만호(哈剌萬戶) 나연첩목아(那延帖木兒)를 보내 여러 백안보하지휘(伯顔甫下指揮)와 함께 10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게 하여 선봉으로 삼았다. 이성계는 덕산동의 들에서 이들과 만나 싸웠다. 이성계는 고려에서 가장 무예가 뛰어난 장수였다. 그가 황룡대도를 휘두를 때마다 수십 명의 원나라 군사들이 한꺼번에 피를 뿌리고 죽었다. 원나라 군사들이 패하여 달아나자 이성계는 함관령, 차유령 두 고개를 넘으면서 추격해 원나라군을 도륙했다. 이날 이성계는 답상곡(答相谷)에 물러와서 진을 쳤다. 나하추는 대노하여 덕산동으로 군대를 옮겨서 진을 쳤다. 이성계는 밤을 이용해 또 다시 이들을 습격했다. 나하추가 혼비백산해 달단동으로 퇴각하자 이성계는 사음동(舍音洞)에 진을 쳤다. 이성계는 전쟁의 신답게 기습에 능통했다. 승세를 잡으면 벼락을 치듯이 몰아쳤다.
“병법에는 마땅히 먼저 약한 적을 공격해야 된다.”
이성계는 차유령에 있던 적을 기습하여 사로잡고 목 베어 거의 다 없애고, 스스로 날랜 기병 600명을 거느리고 뒤따라가서 차유령을 넘어 고개 아래에 이르렀다. 나하추의 대군이 그때서야 기습을 알아차리고 우왕좌왕하면서 맞아 싸우려고 했다. 나하추의 진영에도 용맹한 장수가 있어서 이성계의 군사들이 두려워하고 있었다.
“매양 싸움이 한창일 때에 적의 장수 한 사람이 철갑옷에 붉은 기를 장식하고 창을 휘두르면서 갑자기 뛰어나오니, 여러 사람이 무서워 쓰러져서 감히 당적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부하 군사들이 이성계에게 보고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그 자를 죽일 것이다.”
이성계는 말을 타고 단신으로 적진으로 달려가 철갑옷을 입은 나하추의 장수와 여러 합을 겨룬 뒤에 거짓으로 패하여 달아나기 시작했다. 예상한 대로 나하추의 장수가 앞으로 뛰어와서 창을 겨누고 마구 찔러댔다. 이성계가 몸을 뒤집어 말 옆에 달라붙자 적의 장수가 헛 찌르면서 창을 따라 거꾸러졌다. 이성계는 즉시 안장에 걸터앉아 활을 쏘아서 장수를 죽였다. 이에 적이 낭패하여 도망쳤다. 이성계가 이를 추격해 적의 진영에 이르렀으나 해가 저물어서 돌아왔다.
“공(公)이 세상에 두루 다닌 지가 오래 되었지만, 다시 이와 같은 장군이 있습디까? 마땅히 피하여 속히 돌아갑시다.”
나하추의 아내가 나하추에게 말했다. 그러나 원나라 제일의 맹장이라고 자부하는 나하추는 말을 듣지 않았다. 그 후 며칠 만에 이성계가 함관령을 넘어서 바로 달단동에 이르자 나하추도 그 앞에 진을 쳤다. 나하추가 10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진 앞에 나오자 이성계도 10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진 앞에 나가서 대치했다.
“내가 처음 올 적에는 본디 사유(沙劉), 관선생(關先生), 반성(潘誠) 등을 뒤쫓아 온 것이고, 고려의 경계를 침범하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 내가 여러 번 패전하여 군사 만여 명이 죽고 장수 또한 몇 사람이 죽었으므로, 형세가 매우 궁지에 몰렸으니 싸움을 그만두기를 원합니다. 다만 장군의 명령대로 따르겠습니다.”
나하추가 거짓으로 이성계에게 말했다.
“그대들은 속히 창을 버리고 항복하라. 항복하는 자는 목숨은 살려줄 것이다.”
이성계는 나하추와 원나라 군사들에게 호통을 쳤다. 그러나 나하추는 고려의 군사들에게 약을 올리기만 할뿐 항복하지 않았다. 이성계는 대노하여 군사들에게 강궁을 가져 오게 했다. 한 장수가 나하추의 곁에 서 있으므로 이성계가 활을 쏘자 시위소리만 듣고도 넘어졌다. 나하추의 군사들이 대경실색하고 이성계의 군사들은 창을 흔들며 환호성을 질렀다. 이성계가 또 다시 활을 쏘아 나하추의 말을 죽이자 나하추가 깜짝 놀라 말을 바꾸어 탔다. 이성계는 다시 활을 쏘아서 말을 죽였다.
“이 만호야, 내 창을 받아라.”
나하추가 창을 휘두르면서 이성계에게 달려왔다. 이성계도 말을 달려 나하추와 치열한 격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