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명의 유족이 허락해도 1명의 유족이 반대하는 영화는 제작해선 안돼”
영화 ‘암수살인’은 유족의 동의를 얻지 않은 실제 사건의 영화화로 영화 상영 금지 가처분 소송을 당했다. 사진 ‘암수살인’ 스틸컷.
지난 3일 개봉한 영화 ‘암수살인(감독 김태균, 각본 곽경택)’은 2010년 9월 세상에 알려진 ‘주점 여종업원 살인‧시신 유기 사건’의 범인 이 아무개 씨를 모티브로 삼고 있다. 이 씨는 수감된 지 2개월 만인 2010년 11월, 자신이 지목한 한 형사에게 “10건의 살인을 더 저질렀으니 나를 만나러 오라”고 밝힌 뒤 형사와 살인범 간의 ‘술래잡기’를 펼쳤다. 지난 2012년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도 다룬 사건이기도 하다.
그런데 영화 ‘암수살인’에서는 이 씨가 실제 저지르지 않은 사건을 포함시켰다. 지난 2007년 11월 부산에서 발생한 ‘고시생 살인사건’이다. 당시 현장에서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족적과 흉기가 발견됐지만 그 외 별다른 단서가 없어 미제사건으로 남았던 것이다. 영화는 이 사건을 극중 살인범 강태오(주지훈 분)가 검거된 뒤 밝힌 추가 범죄 가운데 하나로 각색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유족의 동의를 얻지 않고 영화화됐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유족 측은 “사건의 영화화를 알게 된 것도 지난 8월 영화 홍보 영상을 보고 나서였다”고 말했다. 그 직후 배급사인 쇼박스 측에 항의 내용증명을 보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영화 상영 전 ‘실화를 바탕으로 한 허구의 영화’라는 문구를 넣겠다”라는 말뿐이었다. 결국 지난 9월 20일, 영화상영금지 가처분 소송이 진행됐다.
피해자와 유족의 인격권과 ‘잊힐 권리’, 영화 제작사와 배급사의 ‘일상적인 소재 차용’, 유족의 ‘진정성 의심’ 등 주장이 팽팽하게 맞선 가운데 열흘 만인 9월 30일 극적 합의가 이뤄졌다. 유족은 “제작사로부터 진심어린 사과를 받고 가처분 소송을 취하했다”라며 “다른 유가족들이 영화 ‘암수살인’의 상영을 원하고 있고, 본 영화가 암수살인 범죄의 경각심을 제고한다는 영화 제작 취지에 공감한다”며 합의 이유를 밝혔다.
유족과의 합의로 예정대로 개봉이 이뤄졌지만 대중들 사이에선 여전히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암수살인’의 각본을 담당한 곽경택 감독이 3년 전에도 같은 사건으로 구설수에 올랐기 때문. 2015년 그가 감독을 맡았던 영화 ‘극비수사’ 역시 피해자 가족의 동의를 얻지 않은 영화화로 논란을 일으켰던 바 있다.
영화 ‘암수살인’ 포스터.
실화를 모티브로 했던 범죄 영화 가운데 개봉 전 상영금지 가처분 소송과 맞닥뜨린 영화는 적지 않다. 1991년 발생한 ‘이형호 군 유괴 살인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 ‘그놈 목소리(2007년 개봉)’는 이 군을 양육했던 새어머니가 제작사를 상대로 상영금지 가처분 소송을 제기했다.
자신의 목소리를 그대로 영화에 사용하면서 동의를 받지 않아 인격권이 침해됐다는 주장이었다. 제작사 측은 이 군의 친부모로부터 동의를 받았으므로 문제가 없다고 맞섰다. 결국 가처분 신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004년 개봉한 영화 ‘실미도’ 역시 희생자 유가족들의 영화 상영 금지 가처분 신청에 부딪쳤다. 실미도 사건으로 희생된 민간인들을 사형수, 무기수, 범죄자로 묘사해 고인과 유족들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당시 항고심에서 민간인 훈련병들이 모두 사형수, 무기수인 것처럼 표현한 홍보 부분을 삭제하라는 판결이 내려져 논란은 일단락 됐다.
앞서 영화 상영 금지 가처분 소송에 휘말렸던 실화 기반 범죄 영화들은 대부분 제작사 측이 승소했다. 우리 법에서 영화 제작의 표현의 자유를 폭넓게 인정하고 있고, 실화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하더라도 ‘영화 속 인물, 장소, 단체는 픽션이 가미돼 실재하지 않는다’는 문구를 삽입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법망을 빠져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모티브와 상관없이 픽션이라는 점을 명확히 했으므로 그 이후 관객들의 허구와 실제 혼동에 대해서는 제작사에 책임질 이유가 없다는 것.
한 영화계 관계자는 이에 대해 “앞선 사례들이 있다 보니 업계에서는 ‘돈이 되겠다’ 싶은 실화 스토리를 일단 차용하고, 나중에 가서 합의하면 된다는 시각도 팽배하다”고 짚었다. 그는 “강력 사건의 피해자나 유족들은 자신들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수익을 목적으로 한 영화 제작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유족들에게 ‘영화 제작하는 데 얼마를 받았다’라는 뒷소문이 따라다니기 때문”이라며 “이런 이유로 유족들이 재판을 청구하더라도 오래 끌기 힘들기 때문에 (제작사 측이) 그 점을 노리는 것도 있을 것”고 설명했다.
이어 “실화 기반으로 영화를 제작하려다 한 유족의 허락을 얻지 못해 10년째 제작이 중단된 영화가 있다. 99명의 유족이 허락하더라도 1명의 유족이 반대한다면 그 영화는 제작돼서는 안 되기 때문”이라며 “문제가 있을 것을 알면서도 제작을 강행하고, 언론까지 보도되고 난 뒤에야 사후 합의로 종결되는 사례들이 계속해서 늘어나는 게 씁쓸하다”고 덧붙였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