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의 전설에 불가사리 이야기가 있다.
송악산 밑에 한 과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 여름날 과부는 끈적거리는 욕망을 인내하면서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여인의 욕망은 갑자기 일어나 온 몸으로 퍼져나갔다. 여인은 불덩어리처럼 달아오른 몸을 어찌할 수가 없어서 스스로 저고리 옷고름을 풀고 풍만한 가슴을 애무했다. 그때 여인의 몸에서 작은 벌레 한 마리가 스멀거리고 기어 나왔다. 여인이 의아하여 벌레를 살피자 벌레는 옷감으로 기어 올라가 바늘을 씹어 먹고 있었다.
‘세상에!’
여인은 깜짝 놀라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벌레는 여인이 쳐다보는데도 눈 깜짝할 사이에 바늘을 먹어치웠다. 여인이 신기하게 생각하여 바늘쌈지에서 다른 바늘을 꺼내주자 벌레가 또 다시 냉큼 먹었다. 여인은 소스라쳐 놀랐다. 벌레는 순식간에 여인의 바늘 쌈지를 먹어치우고 문고리까지 씹어 먹었다. 여인은 기겁을 하고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방안의 쇠붙이를 모두 먹어 치운 벌레는 점점 몸집이 커져서 부엌에 있는 무쇠 솥이며 부엌칼을 먹어 치우고 헛간의 농기구까지 모조리 먹어치웠다. 여인의 집에서 쇠붙이를 모두 먹어치운 벌레는 쇠붙이를 찾아 마을로 기어갔다.
“괴물이 나타났다!”
거대한 몸집으로 변한 벌레를 보고 마을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벌레는 마을의 쇠붙이를 닥치는 대로 먹어치웠다. 마을 사람들의 신고를 받은 군사들이 달려왔다. 군사들은 집채만큼 커진 벌레를 보고 경악하여 활을 쏘고 창을 던졌으나 벌레는 쇠붙이를 먹으면서 더욱 커졌다. 벌레는 마침내 송도의 쇠붙이를 모두 먹어치운 뒤에 산처럼 커진 몸으로 바다로 기어들어갔다.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개성으로 밀어닥친 것은 벌레가 송도의 쇠붙이를 모두 먹어치우고 바다로 들어간 뒤였다. 군사들의 창이며 칼조차 모두 벌레가 먹어치우는 바람에 이성계는 손쉽게 송도를 점령했다.
이는 고려가 멸망한 뒤에 송도 일대에 나돈 괴담으로 불가사리라는 전설이 된 이야기다. 쇠붙이를 먹는 벌레를 불가사리라고 부른 데서 알 수 있듯이 탐욕과 욕망의 사회를 경계하려고 만들어진 전설로 보인다.
우왕이 내시들을 거느리고 이성계를 급습하여 죽이려고 한 사건은 그의 멸망을 재촉했다. 고려 도읍 송도를 손에 넣은 이성계의 세력은 우왕을 폐위하고 이성계를 옹립하려고 했다. 그들은 왕궁밖에 진을 친 뒤에 고려 조정을 좌우했다. 이때 이성계의 세력에 가담하고 있는 인물들은 남은, 조준, 정도전, 조인옥, 조박(趙璞) 등 52인이나 되었다. 그들은 이성계를 추대하려고 했으나 이성계는 때가 이르지 않았다면서 거절했다.
고려에는 아직도 당대의 학자인 이색과 정몽주 등이 있었다.
이색은 내외에 신망이 높아서 국정의 수장인 문하시중을 맡았다. 이성계 등이 이색에게 문하시중을 맡긴 것은 온건한 인물이어서 기득권 세력의 반발을 무마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힘이 없는 이색은 소신껏 정치를 할 수 없었다.
좌장군을 지낸 조민수는 군사를 거느리고 자파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우왕의 아들 창왕이 추대되자 이성계는 민심을 얻기 위해 부패한 고려 조정을 개혁하기 시작했다. 이성계의 일파인 대사헌 조준이 전제(田制)의 개혁을 주장하고, 간관 이행(李行), 판도판서 황순상(黃順常), 전법판서 조인옥(趙仁沃) 등도 사전(私田)의 폐단을 논하고 그 개혁을 실시했다. 그러나 전제개혁은 귀족들의 부를 축소하는 것이어서 극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조민수 역시 전제 개혁을 반대했다.
이성계가 고려를 장악하고 있었으나 멸망으로 치달리고 있는 고려를 구하려는 인물도 있었다. 최영의 조카인 전 대호군 김저(金佇)는 몰래 황려부(黃驪府: 여주)에 찾아가서 우왕을 알현했다.
“내가 평소부터 곽충보(郭忠輔)와 사이가 좋으니, 그대가 곽충보와 계획을 세워 이성계를 제거하라.”
우왕이 울면서 김저에게 부탁했다. 김저는 이에 곽충보를 찾아가 이성계를 제거하자고 제안했다. 곽충보는 거짓으로 승낙하고 이 사실을 이성계에게 알렸다. 김저는 정득후(鄭得厚)와 함께 이성계를 암살하기 위해 한밤중에 장사들을 거느리고 그의 집을 습격했으나 이미 군사들이 매복하고 있었다. 김저는 이성계의 군사들에게 체포될 위기에 놓이자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
우왕파의 암살시도에 이성계 일파는 분노했다.
“우왕이 이런 계책을 세웠으니 마땅히 죽여야 합니다.”
“우왕을 죽이면 창왕은 어찌할 것인가?”
“우왕과 창왕 모두 신돈의 자식이라고 몰아 세워 쫓아내면 될 것입니다.”
“우(禑)와 창(昌)은 본디 왕씨(王氏)가 아니므로 왕이 될 수가 없다. 마땅히 거짓 임금을 폐하고 참 임금을 새로 세워야 될 것이다. 정창군 요(瑤)는 신왕(神王)의 7대 손자로서 족속이 가장 가까우니 마땅히 왕으로 세워야 될 것이다.”
이성계는 심덕부와 함께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恭讓王)을 즉위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즉시 공민왕의 부인인 정비(定妃)에게 통고하고 우왕은 강릉으로 유배지를 옮기고, 창왕은 강화도로 유배를 보냈다.
공양왕의 이름은 왕요(王瑤)이고 신종(神宗)의 7대손이었다. 창왕의 폐위는 그를 추대한 사람들에게도 책임이 돌아간다.
창왕을 폐위시키면서 이성계 일파는 이색과 조민수의 제거에 나섰다.
“조민수는 적신 이인임에게 편당하여 멋대로 탐욕하고 포악함을 부려 풍속을 크게 문란하게 하였으며, 또 주장(主將)으로서 왕씨(王氏)를 세우려는 의논을 가로막고, 창을 세워 종묘로 하여금 영원히 제사를 받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낭사 윤소종이 조민수를 탄핵했다. 사헌부에서도 소를 올려 이색과 조민수를 탄핵했다. 그들의 죄는 신돈의 아들 창왕을 고려의 왕으로 추대했다는 것이었다. 창왕은 우왕의 아들이기도 했으나 이림(李琳)의 딸 근비(謹妃)의 소생이었다. 이림은 조민수와 인척 관계였다. 2월에도 간관들이 또 소를 올려 이색과 조민수 등을 극형에 처하기를 청했다.
결국 조민수와 이색은 탄핵을 받고 귀양을 가게 되었다.
1389년 12월이 되자 사재 부령 윤회종(尹會宗)이 소(疏)를 올려 우왕과 창왕을 목을 베라고 주장했다. 공양왕이 여러 재상들에게 물었으나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 일은 쉽사리 처리할 수 없습니다. 이미 강릉에 안치한 일로써 중국에 아뢰었으니 중간에 변경할 수는 없습니다. 또 신 등이 있는데 우가 비록 난을 일으키고자 하나 무엇이 걱정되겠습니까?”
실록은 이성계가 우왕을 죽이는 것을 반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성계가 반대한 것은 형식적인 일에 지나지 않는다. 이성계의 부하들이 공양왕을 압박했다.
“우가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였으니 제 자신에 죽음이 미친 것이 마땅하다.”
공양왕은 우왕을 죽이라는 영을 내렸다. 우왕은 유배지 강릉에서 살해되고 창왕은 강화도에서 살해되었다. 창왕은 불과 10세였으나 신돈의 후손이라는 이유만으로 살해되었다.
고려는 500년의 사직을 면면하게 이어온 국가였다. 500년의 역사를 바꾸기 위해서는 새로운 이념과 비전이 필요하다. 이성계가 등장할 무렵부터 호국불교의 국가인 고려는 신진사대부들에 의해 배불숭유론이 일어났다.
1391년 정몽주를 격살한 뒤, 조준, 정도전 등은 고려의 행정체제를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 등의 6조로 개편했다. 배불숭유론에 의해 주자가례를 시행하고, 절의 재산을 몰수하여 각 관사에 분속시켰다. 신흥세력의 경제 기반을 다지기 위해 과전법을 실시했다. 신진사대부들의 거센 개혁 주장과 함께 이성계의 전횡에 대한 비난도 일어났다. 이성계는 벼슬을 버리고 동북면으로 돌아가는 시늉을 했다.
“공의 한 몸은 종사와 백성이 매여 있으니, 어찌 그 거취를 경솔히 할 수가 있겠습니까? 왕실에 남아 도와서 현인을 등용시키고, 불초한 사람을 물리쳐서 기강을 잡으십시오.”
정도전이 만류했다. 이성계는 못 이기는 체하고 송도에 남아 권력을 휘둘렀다.
“내가 장차 이성계와 더불어 동맹을 맺으려고 하니, 경 등이 내 뜻을 살펴 이성계에게 전하고, 맹서(盟書)를 초하여 오라.”
공양왕이 조용에게 말했다.
“맹세는 성인이 싫어하는 바입니다. 열국의 동맹 같은 것은 옛날에 있었으나 임금이 신하와 더불어 동맹을 맺는 것은 고사에 근거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조용이 깜짝 놀라 반대했다. 그러나 이성계 세력에 눌린 공양왕은 조용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성계와 동맹을 맺었다.
“경이 있지 않았으면 내가 어찌 이에 이르겠는가? 경의 공과 덕을 내가 감히 잊겠는가. 대대로 자손들은 서로 해치지 말 것이다. 내가 경에게 믿음이 있는 것은 이 같은 맹약이 있기 때문이다.”
문맥을 보면 공양왕이 이성계에게 목숨을 구걸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양왕은 맹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성계가 즉위한 뒤에 살해된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