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그게 누구였지?”그녀가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바(bar) 안에는 느린 재즈의 선율이 나지막하게 흐르고 있었다. 보컬 없는 연주곡에 섞인 그녀의 음성은 마치 리듬을 타고 있는 것 같았다.나는 새로 얼음을 넣은 잔을 한 모금 들이켰다. 차가웠다.“K였어요.”“K?”표정이 없던 그녀도 퍽 놀라는 듯한 눈초리였다. 내 입술은 씁쓸하게 꼬리를 말아 올렸다.“잠깐만. K라면…. 당신에게 그 아가씨를 소개시켜 줬다는 후배잖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호기심이 생겼는지 그녀는 슬그머니 팔꿈치를 괴었다. 어두운 조명의 테이블 위에는 갸름하게 생긴 브랜디 병이 놓여 있었다. VSOP급 꼬냑(cognac). 비싼 술은 아니었지만 특별한 날에 마시기 위해 키핑시켜 놓은 것이라고 했다. “뜻밖인걸. 그 사람이 어째서 거기에 있었지?”“저도 모르겠어요. 그러고 나서 곧장 돌아왔으니까.”술잔을 내려놓았다. 똑같이 얼음이 담긴 또 하나의 잔은 가장자리에 진홍빛 립스틱이 얇게 묻어 있었다. 나는 그 입술 자국이 안에 담긴 브랜디 색깔과 어울린다고 느꼈다. 이렇게 온더락(on the rock)으로 꼬냑을 마시는 법 역시 그녀가 가르쳐준 것이었다.
“대체 두 사람이 어떤 관계였던 거야?”궁금함을 참지 못한 질문이 들려 왔다. 내가 되물었다.“궁금하세요?”“궁금해.”나는 물끄러미 탁자 아래로 눈길을 던졌다. 짙은 회색 스커트 속에서 옅은 커피색 스타킹을 신은 종아리가 뻗어나와 있었다. “K가…, 알고 보니 그 여자애를 좋아하고 있었던 거예요.”“그 후배가? 그럴 바엔 왜 당신한테 소개시켜 줬어? 자기가 그냥 사귀었으면 됐을 거 아냐?”“글쎄요. 저 이전에 얘기가 끝났었겠죠.”“얘기가 끝나다니?”
그녀의 꼬아 올린 다리에는 까만 하이힐이 신겨져 있었다. 뒷굽이 반쯤 벗겨진 채 위태롭게 건들거리는 발 끝이 내 시선을 자꾸 붙잡았다.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그 여자애, 현주에게 사귀자고 말은 했었던 모양이에요. 하지만 거절당했죠. 자기 타입이 아니라고 했나 봐요.”“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아?”“나중에 다른 후배들을 통해서 들었어요. 사실 저만 몰랐던 거죠. 제가 졸업한 후에, 알 만한 사람들은 그 친구가 현주를 오랫동안 쫓아다녔다는 걸 알고 있었대요.”“그게 가능해? 한 번 차인 사이라면 다시 얼굴 보기 힘들어졌을 텐데?”“보통은 그렇죠. K는 그러고 싶지 않았고요.“그래서 그 아가씨하고 당신을 소개팅시켜 줬군? 어떻게든 그 현주라는 아가씨 곁에 있고 싶어서.”“네.”
흐음, 콧소리를 끈 그녀가 꼬냑을 홀짝였다. 또 다른 립스틱 자국이 술잔에 남겨졌다.“양다리를 걸쳤던 건가?”“그렇지는 않았어요. 제 쪽은 사귀는 게 맞았어도, K 쪽은 그냥 친한 선배이자 오빠동생 사이인 셈이었죠. 종종 친구로서 위험한 짓을 하기는 했지만.”“그 팔목에 난 상처?”“아마 그럴 거예요. 그 친구로서는 견디기 힘들었겠죠. 집 앞까지 찾아와 싸운 것도 그래서일 테고.”
“그럼 당신과 그 아가씨가 어떤 사이인지도 알았을까? 이미 같이 잔 사이라는 걸?”나는 그러리라는 의미로 어깨를 으쓱였다.“말도 안돼.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가 뻔히 아는 선배와 숱하게 섹스까지 했는데도 계속 좋아했다는 얘기야? 하여간 요즘 친구들은 묘해. 나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그녀는 처음으로 자기 생각을 밝히고 있었다. 두 무릎이 순서를 바꾸어 포개어졌다. 그녀의 뽀얀 허벅지가 조금 더 길게 드러났다.
“그 아가씨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야. 결국 겉만 얌전했지 아무하고나 잠자리를 하는 성격이잖아.”흡사 자신만큼은 조신하다는 투였다. 그러나 말과 달리 그녀가 앉은 자세는 별로 얌전하지 않았다.“아니에요. 그건.”“왜?”“현주는, 단지 자기가 결혼할 남자에게 모든 걸 다 주려고 했을 뿐이었어요.”“결혼? 당신하고?”“네. 헤어질 때 그렇게 말하더군요.”“바보. 설사 결혼할 사이라고 해도 그건 바보 같은 짓이야.”
결혼-그 단어가 나오자 그녀는 심하게 눈썹을 찌푸려댔다. 그녀로서는 그렇게 말하는 게 당연했다. 잠시 침묵이 지나갔다. “그날이 아니면 정확히 언제 헤어졌어?”“두 달 전이에요. 나이트클럽에 갔던 그날이었어요.”나는 묵묵히 술병을 들어 잔을 채웠다. 적갈색 알코올이 얼음을 따라 흘러내리며 아지랑이처럼 퍼져 갔다.
<두 달 전>
양주를 마시는 여자에게 얘기한 대로 나는 현주와 금세 이별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어리석게도 내 말, 사랑한다는 거짓말을 믿고 있었다. 아니 믿고 싶어했다. 화장실의 그 수치스럽던 정사 이후에도 현주는 먼저 헤어지자는 말을 하지 못했다. 오히려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듯 나에게 점점 더 매달렸다. 애교를 부리고 애써 이벤트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 즈음부터 우리의 데이트에는 우연을 가장한 채 K가 끼어들기 시작했다. 나는 녀석에 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차라리 나 대신 K와 그녀가 잘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날도 그랬다. 우리는 자정이 넘어서야 나이트클럽을 나왔다. 현주는 헤어질 무렵이 되자 언제 그랬냐는 양 다시 나에게 바짝 몸을 밀착시켜 왔다.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성싶었다. 그때까지도 그녀의 엉덩이 근처 스커트 자락은 축축하게 땀에 젖어 있었다.
나는 눈치채지 않게 뒤를 돌아보았다. K는 멀어져 가는 우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멍하니 자리를 떠날 줄을 모르고 있었다.택시를 잡은 우리는 내 아파트도 여관도 아닌 현주의 집으로 향했다. 그녀는 실망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렇게 그녀의 집 앞 골목에 도착했을 때 내가 말했다. “우리…, 그만 끝내자.”“네?”휘둥그래진 시선이 돌아왔다. 나는 다시 한 번 또박또박 말했다.
“헤어져, 우리. 미안해. 너도 알고 있었을 거야. 우리 사이가 오래 전에 끝났다는 거.”현주는 순간적으로 말문마저 잃은 듯했다. 그녀로서는 꽤 큰 충격임이 분명했다.“오, 오빠…?”“그동안 생각해봤어.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최대한 냉정해져야 했다.“왜요? 갑자기 왜요?”“모르겠어. 그냥 이제는 너랑 헤어지고 싶어.”
미안해, 내 입은 그 말만 되뇌였다.
“하지만…. 하지만 저를 사랑한다고 하셨잖아요?”“아니. 그건 거짓말이었어.”고개를 저었다. 현주의 눈가에 당장 굵은 눈물방울이 맺히고 있었다.“안돼요. 어떻게…. 어떻게 저한테 이러실 수….”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그녀가 우두커니 서서 눈물을 흘리도록 내버려두었다.“저 때문이에요? 그런 건가요? 제가 너무 쉽게….”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너무 쉽게 몸을 줘서 내가 싫증이 났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역설적이었다. 현주는 내가 자신을 성적으로만 대할까 봐 내내 두려워했었다. 그러면서도 나에게 모든 것을 바쳤다.
“알 것 같아요. 오빠는…. 오빠는 제가 처녀가 아니라서 싫어지신 거죠?“아니야. 절대로.”울먹이는 그녀였다. 그러나 나를 붙잡으려 하지는 않았다. 마치 내가 선언했으니 그것으로 모든 게 마지막이라는 것 같았다. “저는…, 정말로 오빠와 결혼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래서….” 전부를 드렸어요-현주의 입술이 혼잣말을 달싹였다.“나는 너와 결혼하고 싶지 않아.”나는 덤덤하게 말했다. 그리고 돌아섰다.
K의 이야기는 끝내 하지 않았다. 그날 밤 현주가 K를 다시 만나러 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만약 그랬다면-필경 다시 만났을 게 틀림없지만-그들은 같이 잤을 것이다.
<바(bar)>
“내 생각에….”그녀의 손가락이 잔에 묻은 립스틱을 문지르고 있었다. 무심결이겠지만 나는 그 동작이 꽤 야릇하다고 느꼈다.“너무 잔인해, 당신은.”“그럴 수도 있겠죠.”“그 사람들은 어떻게 됐지? 둘이 사귀고 있나?” “아직은 아닌 것 같아요.”“K라는 친구하고는 서먹해지지 않았어? 꽤 친했던 후배라면서?”
“별로 걱정하지는 않아요. 유감 따위가 있는 건 아니니까. 남자끼리 술 한 잔하면서 풀면 되겠죠.”그녀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연장자(年長者)로서 보이는 전형적인 웃음이었다.“어쨌든 재미있는 얘기군. 막걸리를 마시던 여자와 첫경험을 하고, 소주를 마시던 여자에게는 데이고, 마침내 맥주를 마시던 여자는 버려진다…. 그럼 지금 나는 뭐야? 양주를 마시는 여자인가?”
“모르겠어요.”내 대답은 솔직했다. 기실 그녀에게 과거의 여자, 그것도 성적인 경험을 낱낱이 털어놓은 것이 과연 옳았는지도 판단할 수 없었다.
“꿈 깨. 나한테도 그런 여자를 기대하면 곤란할걸.”“저도 알고 있어요.”“그럭저럭 좋은 거래라는 건 인정해. 나는 술을 사고, 당신은 이야기를 해 주고. 덕분에 요 며칠 심심하지는 않았어.”
내가 자신의 다리를 훔쳐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을까. 그녀는 묘하게도 손을 뻗어서 하이힐 뒤축을 당겨 신었다. 아슬아슬하게 내보이던 그녀의 맨발이 사라지자 벌거벗었던 나신에 옷이 입혀진 것처럼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내일도 물론 야근이겠죠?”나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회사일을 들먹였다. “십중팔구 그렇겠지? 프리젠테이션까지 이제 닷새도 안남았으니 말이야. 왜? 지겨워?”“그렇지는 않아요.”
입가에 힘을 주었다. 그녀는 내가 그녀 덕분에 지겨워하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야근을 자청한다는 것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럼 슬슬 나갈까? 역시 야근은 무리인가 봐. 이십대에는 이렇지 않았는데.”이십대라는 대목을 강조하며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나는 속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오늘도 실패였다. 그녀는 취하지 않았다. 아직 남자를-정확히 말해 나를-믿지 않는다는 증거였다.
“네, 이정화 과장님.”바를 나서며 나는 일부러 그녀의 공식 직함을 들먹였다. 이정화 과장. ‘양주를 마시는 여자’인 그녀는 내 직속 상사이기도 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