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은 잠이 오지 않았다. 아무리 눈을 감고 있어도 결코 잠을 들 수 없었다. 그는 왠지 불길함을 느끼고 있었다. 불길하다는 말의 뜻조차 제대로 모르면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바깥에서는 나지막하면서도 또렷한 소리가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그 소음은 그녀와 남자가 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전처럼 거실 쪽은 아니었다. 그날 밤 그의 방문은 꼭 닫혀 있었고 그들은 안방에 들어가 있었다.
남자는 연신 뭐라 거칠게 지껄여댔다. 어쩌면 음탕한 욕지거리였는지도 모른다. 그는 그 목소리가 지난 번과는 다른 남자라는 것을 알았다. 그들이 내는 소음조차도 많이 달랐다. 그가 듣지 못할 거라고 여겼는지 두 사람은 노골적으로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그녀는 새로운 남자가 지껄일 때마다 화답하듯 점점 높게 신음해댔다. 마치 애타는 울먹임 비슷했다. 게다가 이번에는 철썩철썩 살을 내려치는 소리마저 울리고 있었다. 그는 차츰 공포에 사로잡혀 갔다. 늘 그렇듯 아파하는 그녀였지만 매까지 맞는 것은 처음이었다.
철썩, 으흐흑. 철썩, 으흐흑-그러나 이윽고 그는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이상했다. 희미한 애원이 함께 섞이고 있었다. 그녀였다. 그녀는 무슨 영문에서인지 자꾸 ‘좋아, 좋아, 더, 더’라고 외치고 있었다. 과연 어느 쪽이 진심인지 그로서는 분간하기 힘들었다. 그저 두려움에 몸을 떨어야만 했다.
모든 것이 한꺼번에 뒤바뀌고 만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쾅, 현관문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누군가가 집 안으로 뛰어드는 소리가 들려 왔다. 급한 걸음으로 보아 침입자는 미처 신발도 벗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너무 아파서 문을 잠그는 것조차 잊어 버린 게 틀림없었다. 안방 문이 벌컥 열리더니 여자-그녀가 아닌 다른 여자-가 버럭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야, 이 개 같은 년아!”
그 다음부터는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안방에 있던 남자가 달아나는 듯했고 와장창 물건들이 깨어졌다. 겁에 질린 그는 화들짝 이불 속으로 목을 움츠렸다.
“죽으려고 환장했구나, 더러운 계집! 혼자 사는 과부 주제에 감히 남의 남편을 꼬셔?”
그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두 번째 여자가 써대는 악다구니뿐이었다. 다시금 철썩거리는 소리가 뒤따랐다. 그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아까와는 전혀 다른 살 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잇달아 계속 물건들이 부서지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확실히 울고 있었다.
상대방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점점 더 두려워졌다. 그냥 아픈 정도가 아니라 그녀가 정말로 죽는 거라고 생각했다. 오직 자신만이 그녀를 구할 수 있다고 믿은 그는 마지막 용기를 다해 이불을 걷어찼다. 그가 바깥으로 뛰쳐나왔을 때 그곳에는 평생 잊지 못하게 될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녀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뚱이로 거실 한복판에 주저앉아 있었다. 커다란 몸집의 상대방 여자는 그녀 앞에 버티고 서서 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채를 그악스럽게 거머쥔 채 다른 손을 어깨 위로 잔뜩 치켜들고 있었다. 그의 판단은 옳았다. 그녀는 정말로 매를 맞는 중이었다.
그 손이 움직이기 전에 그는 그녀에게 달려가 안겼다. 목구멍에서는 아무 소리도 새어나오지 못했다. 그저 꺽꺽거리는 비명만이 반복되고 있었다. 어디선가 거품을 문 목소리가 말했다.
“얼씨구, 화냥년….! 도화살(桃花煞)도 유분수지 애까지 딸린 년이 이딴 짓을 해?”
얼마나, 어떻게 시간이 흐르는지 알 수 없었다. 마침내 울음에 지친 그는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맙소사! “헉!” 버둥거리던 김형진은 화들짝 침대 위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제기랄, 젠장, 빌어먹을. 떠오르는 온갖 저주가 자신에게 퍼부어졌다.
온몸에 식은 땀이 홍건했다. 마지막 찰라 그가 목격한 얼굴은 그녀가 아니었다. 그 얼굴은 또다시 아내인 미영의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형진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거세게 흔들었다. 왜 자꾸 악몽 속에서 그녀 대신 아내가 나타나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아니 어째서 요즘 들어 부쩍 악몽이 잦아졌는지조차 모를 노릇이었다. 아내에게 문제가 있는 걸까? 설마?
필경 궁도(宮島)에서 본 시체 탓이리라, 그는 그제야 침대 옆이 싸늘하게 비어 있음을 알아차렸다. 베개맡의 메모지 한 장이 눈에 띄었다. ‘나 오늘 좀 늦어요. 퇴근하고 나서 친구들 만나기로 했어요.’또박또박한 아내의 글씨였다.
▲ 그림 최경태 | ||
낄낄낄, 그는 속으로 만족에 찬 웃음소리를 삭였다. 탐욕으로 가득찬 벌레들은 어디에든 널려 있었다.
그물스타킹을 신은 아가씨 하나가 두어 자리 건너에서 벌써 반 시간째 그를 흘끔거리고 있었다. 그 여자뿐만이 아니었다. 반대쪽 테이블에 앉은 정장 차림의 아가씨는 애인인 듯한 맞은편 사내의 눈길이 한가해질 때마다 아예 노골적으로 그의 사타구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여자들을 유혹하는 데에는 오 분도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 다가가 말 한마디만 걸어도 그녀들은 감지덕지 그를 따라나설 터였다. 그리고-아마 당장 침대 위에 기어오르기조차 마다하지 않을 게 뻔했다.
그는 그것이 자신에게 새롭게 생겨난 힘 덕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하찮은 벌레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그가 기다리고 있는 벌레가 한층 더 유용한 먹잇감이기 때문이었다.
강남의 한 바(bar) 안에 그는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 놓인 쿠바산 시가(cigar)가 회색 연기를 피어올리고 있었다. 그제야 그녀가 나타났다. 일부러 뽐내는 양 어깨에 바이올린 케이스를 메고, 아주 짧은-얼마나 짧은지 의자에 걸터앉는 순간 팬티스타킹의 짙은 색 부분까지 언뜻 들여다보였다-가죽 스커트를 걸친 그녀는 그를 보자마자 대번 반가운 척을 하고 있었다.
“광태 오빠!”
여자는 늦어서 미안하다는 사과도 없이 호들갑스레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 오광태는 여전히 씩 웃어 보이기만 했다. 그물 스타킹의 아가씨가 아쉬운 표정으로 일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와…, 이게 얼마 만이야? 우리 얼굴 못본 지 대여섯 달은 됐지? 그치?”
“그래. 함연주. 그쯤 됐을 거야.”
연주. 그녀의 이름이었다. 함연주는 나란히 엉덩이를 붙이며 자신의 아슬아슬한 미니스커트에 아랑곳없이 높다랗게 다리를 꼬아댔다. 이번에는 훨씬 더 깊숙한 치마 속까지 드러났다. 속옷이 있어야 할 그곳에는 스타킹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가 속칭 끈팬티를 즐겨 입는다는 것쯤은 이미 오광태에겐 익숙한 사실이었다.
“근데 오빠, 조금 변했네?” 그는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그녀도 벌레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 보여?”
“모르겠어. 살찐 건가? 아니면 살이 빠진 건가? 하여간 오빠 몸이….”
불과 몇 초도 지나지 않았는데 함연주의 눈동자가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시선이 은근히 자신의 바지춤을 향하는 것을 알면서도 오광태는 모르는 척 말꼬리를 돌렸다.
“부모님은? 요즘 원장님은 어떠셔?”
원장님이란 윤정의 아버지를 가리켰다. 정확히 부른다면 아저씨 뻘이 되겠지만 그는 그렇게 불렀다. 의사인 그녀의 아버지는 오광태의 외가 쪽으로 친척뻘이었고, 대형 종합병원의 원장이었다.
“우리 아빠? 나도 몰라. 언제 나한테 신경이나 썼나? 쳇, 요즘 짜증나 죽겠어. 미국에 있을 때가 훨씬 좋았는데.”
함연주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렇다면 꽤나 엉덩이가 들썩이고 있겠군, 오광태는 그녀의 속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원래 헤프기도 했지만 그녀는 스트레스를 핑계로 남자를 밝히는 버릇이 있었다.
그와 함연주가 간간이 섹스를 즐기는 사이가 된 지는 이미 오래였다. 발단은 그들이 거의 다 자랐을 무렵 어느 가족 모임에서였다. 아마 오광태가 스무 살이었고 그녀가 갓 열아홉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동해안의 어느 별장에서 부모가 뻔히 옆방에 있는 가운데 몰래 섹스를 즐겼다. 물론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친척이라는 허울 탓에 그들은 아무런 의심을 받지 않았다.
당시 두 사람 모두 첫경험은 아니었다. 근친상간에 가까운 관계임에도 죄의식 따위는 없었다. 잘못이 있다면 그들이 어른 노릇을 할 수 있을 만큼 호기심이 왕성해지도록 내버려 둔 그들의 부모가 잘못이었다.
그 대목에서 그는 태연스럽게 한쪽 손을 함연주의 무릎 위에 얹었다. 매끄러운 스타킹 속에서 살결들이 파르르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전혀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접촉에 은근히 마른 침을 삼키고 있었다.
“나 다시 유학 간다고 할까? 편하게 혼자 있으면서….”
투덜거리는 함연주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오광태가 키들거렸다. 혼자 편하게 있고 싶다는 그 말은 차라리 남자와 마음대로 침대 속에서 실컷 뒹굴고 싶다는 의미에 가까웠다. 그는 천천히 손길을 전진시키며 등 뒤를 돌아보았다. 구석 자리의 여자가 그들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는 오광태의 손이 위치한 장소를 알아차리자 슬그머니 얼굴을 상기시키면서도 눈길을 돌리지 못하고 있었다.
“실은 연주 너한테 부탁이 있어.” 그는 본론을 꺼냈다.
“뭔데, 오빠?”
급기야 함연주는 못이기겠다는 양 긴 한숨소리를 흘렸다. 보나마나 저 안쪽이 젖어들고 있는 게 분명했다.
“니 오피스텔 말이야. 요새 거기 비었지?” 귓불이 붉어진 그녀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빠가 자꾸 집에 안들어온다고 해서 안가본 지 몇 달 됐어.”
오피스텔이란 함연주의 연습실을 말했다. 과리넬리던가 스트라디바리던가, 그녀 곁에 있는 바이올린만하더라도 변두리 아파트 한 채의 전세값과 맞먹었다. 오광태는 그녀의 허벅지 사이 한복판에서 불과 사오 센티도 떨어지지 않은 근처까지 깊숙이 손가락을 들이밀었다. 함연주는 애써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그래서…, 그래서 아무도 없을 거야.”
그녀는 아무도 없다는 표현을 유독 강조했다. 지금에라도 그와 함께 가겠다는 욕구가 진하게 묻어났다.
“그럼 당분간 내가 거기서 지내도 될까?”
“알았어. 나는 좋아.”
순순히 또 하나의 열쇠가 넘겨졌다. 오광태는 전에도 이런 목적으로 그곳을 자주 빌렸었다. 바로 그 오피스텔에서도 함연주와 여러 번 정사를 나눈 적이 있었고, 어떤 때는 다른 여자를 끌어들이기도 했었다. 물론 그녀도 다른 남자와 똑같이 그랬으리란 것도 알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욕실의 어느 서랍에 그녀의 피임약이 들어 있는지조차 훤히 알고 있었다.
“오늘 거기에 갈 거야, 오빠?”
함연주는 드러내놓고 그를 유혹했다. 스타킹 속에서 후끈한 땀이 배어나고 있었다. 오광태는 잠자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직 필요한 게 더 있어.”
“뭐야? 말만 해. 뭐든지.”
실제로 그녀는 무엇이든 할 만큼 흥분한 상태였다. 그녀의 꼬아졌던 다리가 어느새 슬그머니 풀어졌다. 다른 사람만 없다면 언제든 활짝 벌어질 듯했다. 그러나 그는 조용히 함연주의 치마 속에서 손을 빼냈다. 그녀의 눈빛이 실망으로 흔들렸다.
“여자가 필요해.”
“여자애? 어떤 애로 소개시켜 주면 돼?” 욕망으로 머릿속이 흐려진 함연주는 그마저도 재빨리 동의했다. 오광태의 대답은 간단했다.
“많이. 될 수 있는 한 많이.”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