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기자. 하루쯤 더 쉬지 그새 출근했어?”
갓 인쇄된 잡지를 책상 위에 던지며 부장이 말했다. 김형진은 그 쓸모없는 공치사에 맥빠진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만약 정말로 회사를 쉬었다면 부장은 오늘 종일 그의 험담을 하느라 바빴을 터였다.
“하여간 수고했네. 이성귀 그 작자 얘기 아주 재미있더구만.”
지금쯤이면 가판대와 서점에 새 <주간채널>이 깔려 있을 시간이었다. 형진은 웬일로 부장이 친한 척을 하는지 1면 표지를 보고서야 알아차렸다. 그곳에는 그가 쓴 기사가 ‘현장취재-색마의 최후’라는 제목으로 큼지막하게 뽑혀 있었다.
“근데 그 인간 거시기가 그렇게 대단했다는 게 사실이던가, 김 기자?”
호기심이 생긴 듯 부장은 그의 책상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는 뻔하지 않느냐는 투로 애써 어깨를 으쓱거렸다.
“킥킥…. 이건 내 생각인데 말이야. 그 정도 물건이라면 혹시 누군가가 훔쳐 간 게 아닐까? 안그래? 생전에 그렇게 여자들이 죽고 못살았다는데 기념으로 간직하고 싶었을지도 모르잖아?”
역겨운 이야기였다. 건너편에 앉은 다른 기자가 마주 농을 쳐댔다.
“왜요, 부장님? 부러우십니까?”
“암. 부럽지, 부럽고 말고. 솔직히 나도 확장수술이나 받아 볼까 고려 중이거든. 요새 우리 마누라도 헐거워져서 영 낙이 없어.”
마누라가 아니라 미스 김 때문이겠지, 형진은 속으로 빈정거렸다. 미스 김이라는 경리과 여직원과 부장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것은 이미 잡지사 안에서도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소문이었다.
“자자, 그건 그렇고 일어서지?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구.” 부장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동료들이 이른 점심을 위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35>
남자는 눈에 잘 띄지 않는 평범한 회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 보통 체구에 안경을 낀 그 남자는 벌써 한 시간째 잡지사 건물의 로비에 앉아 있었다. 그의 손에는 조간신문이 들려 있었지만 별로 눈길은 주지 않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다가오는 중이었다. 손목시계를 쳐다본 그는 눈치채기 힘든 동작으로 양복 주머니 안의 사진을 흘끔거렸다.
▲ 그림 최경태 | ||
나이 35세, 직업은 <주간채널> 문화부 기자, 아내와 강북 전셋집에서 생활중, 아내는 27세의 중학교 영어교사, 자녀 없음, 홀어머니가 있었으나 3년 전 사망, 외가 쪽 친지들과는 수십 년 동안 절연 상태…. 그는 거의 모든 것을 외우고 있었다. 목표물이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대여섯 명의 양복쟁이들이 몰려 나왔다.
남자가 찾는 목표물은 그 가운데에 섞여 있었다. 목표물을 쫓아 그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슨 특별한 접촉이 필요해서는 아니었다. 그는 그저 목표물의 주위에 머물러 있기만 하면 되었다. 상대방에게 접근하는 것은 그의 상사가 추후에 결정할 예정이었다.
<#36>
쿵쾅쿵쾅-둔중한 음악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며 공간을 진동시키고 있었다. 화려한 인공조명이 가득찬 그곳에서는 낮과 밤을 분간할 수 없었다. 그저 한쪽 벽을 메운 초대형 TV와, 늘씬한 미니스커트의 웨이트리스들이 들락일 때마다 룸 안으로 밀려들어오는 후끈한 열기만이 어렴풋 시간을 짐작케 만들고 있었다. 또다른 환락의 밤이 시작되었다. 잦아드는 어둠은 벌레들의 세상에 돌아온 이후로 그의 일부분이 되어 움직이고 있었다. 아니 그가 어둠 자체였고 어둠이 곧 그였다.
그는 옛 친구들과 함께 있었다. 남자인 그들 사이에는 진한 화장기의 여자들이 같은 수로 섞여 있었다. 그 여자들의 옷차림은 하나같이 가려진 것보다 노출된 부분이 훨씬 더 많았다. 그들이 앉아 있는 곳은 특급호텔의 나이트클럽, 그중에서도 회원제로 운영되는 특실 안이었다.
친구들의 신분은 그런 자리에 어울렸다. 한 명은 잘나가는 변호사의 아들이었고 또 한 명은 쓰리 스타 장군의 아들이었다. 술잔들이 요란스럽게 부딪쳤다.
“자, 마시자!”
“그래, 마시자. 오광태의 탈출 기념이다…!” 30년산 최고급 위스키로 만든 폭탄주가 맹물처럼 부어졌다. 주인공인 오광태는 흡족하게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아직 함연주는 건드리지 않았다. 성대한 만찬이 펼쳐져 있는 마당에 숱하게 맛보았던 몸뚱아리는 후식 따위로나 남겨 둘 생각이었다. 먹잇감이 굴러들어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어차피 그의 성미가 아니었다. 그는 지금의 이런 분위기가 자신에게 걸맞다고 느꼈다. 학창시절부터 소위 ‘귀공자’들로 불렸던 그와 친구들에게는 항상 술과 여자가 넘쳐났다. 룸 안의 여자들이 연신 천박한 웃음소리를 깔깔대고 있었다.
한 여자가 그의 곁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여자를 가리키며 오광태에게 말했다.
“그거 알아, 오빠? 그 계집애 탤런트야. 드라마에도 몇 번 나온 적 있어.”
“어머…. 얘, 그런 얘기는 뭐하러 하니?”
옆자리의 여자가 눈을 흘겼다. 물론 얼굴은 그런 얘기를 기다렸다는 양 도도한 표정이었다. 오광태는 희번득이는 눈길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착 달라붙은 니트 안에서 노브래지어가 분명한 젖가슴이 터질 듯한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거의 엉덩이가 들여다보일 만큼 짧은 치마 속에서는 긴 다리가 뻗어 있었다.
쌍꺼풀, 코, 보나마나 유방도 확대수술을 받았을 게 뻔했다. 전형적인 골 빈 벌레의 모습이었다. 한동안 술잔들이 오가자 그는 나머지 친구들을 향해 조용히 눈짓을 보냈다. 이제 그의 능력을 발휘할 순간이었다. 그들이 여자들을 데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빠, 잘해 봐.”
마지막으로 룸을 나서던 아가씨가 남아 있는 두 사람을 돌아보며 키들거렸다. 오광태는 여자의 고개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대형 TV에 스테이지의 풍경이 비춰지고 있었다. 번쩍이는 조명 속에서 벌레들이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수백 마리의 벌레들이 자신들을 잡아먹어 달라고 연신 몸뚱아리를 꼬아대고 있었다. 여자는 화면을 바라보며 푹신한 소파 위에서 간들간들 엉덩이를 흔들어댔다. 그는 천천히 바지 지퍼에 손을 가져갔다.
<#37>
“말도 마. 내가 그날 확실히 증거를 잡았다는 거 아니겠니?”
“어머머, 정말….?”
시내의 어느 호프집 안. 그곳에도 두엇의 친구들이 모여 있었다. 그 친구들은 모두 여자들이었다. 한 사람이 침을 튀기자 그녀들의 귀가 단박에 그쪽으로 쏠렸다. 박미영은 불안한 듯 주위를 살피면서도 귓가가 쫑긋해지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생맥주 한 잔에 안주 접시만 서너 차례 갈아치운 그녀의 친구들은 다른 사람들, 특히 남자들의 시선은 아랑곳 않은 채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어쩐지 그날 밤 눈치가 수상하길래 모르는 척 남편을 꼬드겼거든. 아예 샤워할 틈도 안주고 말이야. 그런데 세상에…. 팬티를 벗겼더니 그 속에 뭐가 묻어 있었는 줄 알아?”
“뭐? 뭐가 묻어 있었는데?” 이구동성으로 반문이 돌아왔다.
친구들은 동시에 어떤 민망한 장면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남아 있던 흔적은 무엇이었을까. 망측한 상상에 미영은 자신도 모르게 허벅지를 움찔거렸다.
“나 참, 기가 막혀서…. 화장지였어. 화장지. 말라붙은 휴지가 떡하니 남편 거시기에 묻어 있더라니까!” 어머나, 어머머. 여자들의 탄성이 터져나왔다. 얘기를 꺼낸 친구는 신이 난 듯 지껄였다.
“생각해 봐. 그게 왜 거기 붙어 있겠어? 뻔하지, 어디서 잔뜩 흘리고 나서 뒤처리하고 왔다는 거잖아? 남자들이 우리들처럼 소변 보고 휴지로 닦는 것도 아닐 텐데?”
미영의 귀밑이 슬그머니 달아올랐다. 그러나 나머지 친구들은 뭐가 그리 우스운지 와르르 박장대소를 해댔다.
누군가는 어처구니없는 한 마디마저 덧붙이고 있었다.
“호호호, 그래도 남편이 썼는지 누가 아니? 남자도 그럴 수 있는 거 아냐?”
“웃기지마. 그게 말이 돼? 여자인 나도 귀찮아서 화장실에서 휴지를 안쓰는걸.” 한층 더 왁자한 웃음이 이어졌다.
여자들은 서로가 서로의 어깨를 두들겼다.
“글쎄 그래 놓고도 우리 남편은 끝까지 변명을 하더라구. 뭐라더라, 사우나 갔다가 수건이 없어서 휴지로 닦았다나?”
“그래서 어떻게 됐어? 그냥 넘어간 거야?”
“미쳤니, 내가 그냥 넘어가게? 나도 작정을 하고 우리 애인을 불러냈지. 그리고 다음날 당장 호텔에 가서….”
호텔. 유부녀인 친구의 애인과 호텔. 그 다음의 수다가 계속되었지만 미영은 애써 듣지 않는 척했다. 그녀의 얼굴이 조금씩 우울한 빛을 띠어 갔다. 술집 안 남자들의 눈길이 몽땅 자신에게 모아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때 친구들 중 하나가 그녀에게 넌지시 물었다.
“미영이 너는 어때?”
김형진의 아내 박미영은 뭔가를 들킨 것처럼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 무얼 말이야?”
“아유, 니 남편은 어떻냐구. 너희 남편은 바람 안피워?”
“나도…. 나도 모르겠어.”
“얘 좀 봐. 너 그러다 뒤통수 맞아. 솔직히 우리 나이면 슬슬 밝힐 때 아니니? 혹시 니네 남편 다른 데 정력 쏟는 거 아니야?” 맞아, 얘. 그럴지도 몰라-노골적으로 맞장구치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녀는 떨떠름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닐 거야. 그건.”
“확실해? 너무 순진하게 생각하지마.”
“하지만 그런 증거도 없는걸….”
미영의 목소리가 차츰 힘을 잃어 갔다. 그러자 문득 옆자리의 친구가 은근히 허리를 굽혀 왔다.
“증거? 그것도 다 아는 방법이 있어. 내가 가르쳐 줄까?”
그녀의 눈동자가 동그레졌다. 친구는 야릇하게 눈을 찡긋거렸다.
“정 불안하면, 우선 점이라도 봐. 못믿겠지만 가서 보면 다 나와. 내가 잘 아는 데 있으니까 언제 같이 갈래?”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