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오고, 날이 밝고, 그리고 어둠이 다시 빛을 내몰았다. 벌레들의 날짜로 토요일 저녁이었다.
강남의 번화가는 주말이라고 해서 별반 달라진 것은 없었다. 평일에도 인파로 가득찼던 거리들은 그저 조금 더 요란하게 치장한 남녀들로 색깔만을 바꾸고 있었다.
육감적인 라틴 음악이 흐르고 있는 카페 안의 세 사람도 그 시각쯤이면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여자 둘과 남자 하나, 다만 여자들은 하나같이 눈에 띄는 외모였다. 늘씬한 그녀들의 몸매는 각각 고급스런 바지 정장과 치마폭으로 화려하게 감싸여 있었다.
함연주는 주선자 격인 양 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남자에게 연신 아첨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광태 오빠, 소개할게. 내 친구 경미야. 양경미.”
남자는 오광태였다. 그는 대답 대신 거만하게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미니스커트를 입은 아가씨가 고개를 까닥였다. 양경미라는 이름의 그녀는 전신에 소위 명품을 두르고 있었다. 손목에 찬 가느다란 시계는 거의 칠팔백짜리였고, 뒤꿈치없이 발 끝에 달랑이는 샌들은 한 켤레에 백만원이 넘는다는 상표였다. 심지어 그 위에 신겨진 야릇한 무늬의 스타킹조차도 수표 한 장 가격의 프랑스제였다.
함연주가 오광태에게 의미있는 눈초리를 보냈다.
“오늘 밤 경미한테 잘해줘야 해. 오빠. 실은 경미 얘, 다음주에 결혼하거든. 하지만 시집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실컷 놀아 보고 싶대.”
불과 며칠 뒤에 결혼할 여자-그런 이야기가 나왔어도 당사자는 전혀 거리낌이 없는 표정이었다. 오광태는 이미 그녀가 어떤 종류의 벌레인지 짐작하고 있었다. 찌를 듯 덧칠한 속눈썹 위로 도드라진 쌍꺼풀 자국과, 틀에 넣고 찍어낸 것처럼 뾰족한 콧날은 그녀가 단지 액세서리에만 돈을 처바른 게 아님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 그림 최경태 | ||
게다가 무엇보다도 이 아가씨는 곧 남의 아내가 될 신분이었다. 함연주는 그가 무엇을 원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아주 충실한 상대를 골라 온 셈이었다.
“그리고 오빠. 경미네 아빠는 S대 교수님이셔. 얘는 미대에 다녔구. 원래 아직은 결혼할 생각이 없는데, 신랑 쪽 부모님이 연세가 많으셔서 서두르는 거래. 빨리 손주 보라고 하셔서 말이야.”
오광태는 흡족한 눈빛으로 먹이감을 쳐다보았다. 뻔한 뜻이었다. 당장 아이를 가져야 할 새신부가 피임 따위를 하고 있을 리 만무였다.
“좋아.”
그가 입을 열었다. 그것이 자신에 대한 칭찬이라고 착각한 양경미가 샐쭉한 미소를 피식거렸다.
오광태는 그녀에게 보이지 않게 탁자 밑으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길이 향하는 곳을 흘끔거리던 함연주가 슬그머니 혀를 내밀어 입술을 축였다.
상처가 사라진 그 손바닥은 정확히 그의 바지춤 위에 머물고 있었다. 그랬다. 오광태의 그곳은 예전처럼, 목소리가 다시 찾아오기 이전처럼 불룩해져 있었다. 아니 이제는 훨씬 더 거대하게 솟아올라 있었다.
함연주는 눈치채이지 않도록 숨을 헐떡였다. 오광태가 다른 한 손을 뻗어 그녀의 가랑이 안쪽을 더듬고 있었다. 여전히 양경미의 시야에서는 가려져 있는 곳이었다.
함연주의 허벅지 사이가 금세 미끌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손바닥이 천천히 두 군데의 사타구니를 동시에 문지르고 있었다. 바로 옆에 친구가 앉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함연주는 그 음탕한 마수를 놓치지 않기 위해 재빨리 무릎을 오므렸다. 그녀는 그의 바지춤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아무 일도 없는 척 입으로는 계속 시시껄렁한 잡담을 지껄여야 했다.
“광태 오빠. 자, 잠깐만….”
마침내 귀밑이 붉어진 함연주가 몸을 일으켰다. 뭔가를 애타게 갈구하는 그녀의 시선이 오광태를 쳐다보았다. 바야흐로 새로운 향연이 시작되고 있었다.
<#57>
같은 시각 멀리 떨어진 강북의 어느 커피숍에도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강남에 비해 다소 촌스러운 장소였지만 똑같이 두 여자와 한 남자로 이루어진 만남이었다.
유부녀 박미영은 낯선 남자 앞에서 애써 어색한 시선을 감추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와서는 안될 곳에 왔다는 듯한 표정으로 친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친구는 모르는 척 자기 말만 지껄였다.
“미영아, 인사해. 엊그제 얘기했던 그분이야.”
그분-양복을 빼입은 그 사내는 30대 초반의 번지르르한 얼굴이었다. 그는 미영과는 반대로 이런 자리가 퍽 익숙한 양 빙글빙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우리 그이 친구야. 아직 싱글인데, 진짜 싱글은 아니고 반 년 전에 와이프랑 이혼하셨대. 지금은 헬스클럽 사장님이시구.”
글쎄다. 미영은 적잖이 민망한 기분이었다. 남편과의 잠자리가 불만족스럽다는 얘기를 들은 탓일까. 친구는 짓궂게도 가슴이 떡 벌어진 근육질의 사내를 소개시켜 주고 있었다. 물론 그이라는 표현은 친구의 남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다. 이혼 이야기 또한 서로의 신분이 그렇고 그러니 피차 뻔뻔해져도 좋다는 의미가 분명했다.
남자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하지만 미영은 행여 아는 얼굴이라도 만날까 봐 불안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럴 줄 알았다면 치마 대신 바지를 입고 올걸, 그녀는 후회했다. 맞은편 사내의 눈길이 자꾸만 탁자 아래에 드러난 자신의 무릎을 흘끔대는 것 같았다.
“호호호…. 이제 그만 나는 빠질게, 미영아. 오늘은 아무 생각하지 말고 실컷 놀아. 알았지?”
“벌써 가려구?”
친구가 몸을 일으켰다. 미영이 붙잡으려 했으나 친구는 눈짓으로 그녀를 제지했다.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이혼남이라는 사내는 기다렸다는 양 깎듯이 허리까지 굽히며 배웅하고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만이 남게 되자 미영은 차마 그의 얼굴조차 똑바로 바라보기 힘들었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미영씨?”
상대방은 친숙하다는 듯 초장부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미영의 입술이 멋쩍게 우물거렸다.
“죄, 죄송합니다. 이런 자리가 처음이라서….”
“그러세요? 저도 처음입니다. 정 그러시면 장소를 바꿀까요?”
처음이라는 그 말은 어쩐지 믿기지가 않았다. 그녀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은 채 남자가 선뜻 일어서고 있었다.
<#58>
카페 구석으로 향하는 동안 함연주는 줄곧 등 뒤를 흘끔거리고 있었다. 오광태가 태연한 표정으로 그녀를 따라오고 있었다.
양경미의 눈에는 그들 두 사람이 잠시 어딘가에서 따로 이야기를 나누려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친구의 시선을 따돌린 함연주는 서둘러 주위를 살피더니 여자 화장실도 아닌 남자 화장실 안으로 사라졌다. 그곳은 5분 전부터 아무도 들락이는 사람이 없었다. 오광태가 나타나자마자 좌변기 칸으로 뛰어들어간 그녀는 재빨리 문을 잠그고 애원해댔다.
“오, 오빠. 나 더 이상 못참겠어!”
함연주는 변기 위에 쪼그려 앉아 다급하게 그의 바지춤에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을 붙든 오광태는 냉혹한 미소를 히죽거렸다.
“후후후…. 보상을 받고 싶어?”
그녀가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였다.
“나한테 뭘 원하지? 말해 봐.”
함연주의 안타까운 얼굴이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여기, 여기를 원해!”
“어디를 원한다구?”
“제, 제발! 오빠의 이곳, 이곳 말이야!”
“좋아. 하지만 오늘은 이것뿐이야.”
그제야 오광태가 그녀의 손목을 놓아 주었다. 함연주는 바지자락이 더러워지는 것도 아랑곳없이 화장실 바닥에 철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자신의 손으로 직접 그의 바지 지퍼를 끌어내렸다.
“아아…!”
탄성으로 벌어졌던 그녀의 입술이 다음 순간 가득 메워져 갔다. 그와 함께 비좁은 공간에 가쁜 호흡이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킬킬킬, 코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내려다보며 오광태는 기괴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와 환청은 결국 또 하나의 계약에 동의한 것이었다. 귀신이 약속한 대로 그의 물건은 한층 장대하게 둔갑해 있었다.
“빨리 해.”
그가 야멸차게 재촉했다. 함연주는 그 안이 남자 화장실이라는 사실조차 잊어 버린 듯했다. 그녀의 두 손은 몇 년이나 목 말랐던 사람처럼 오광태의 둔부를 탐욕스럽게 거머쥐었다.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려 오고 있었지만 그녀는 밀착시킨 자신의 얼굴을 결코 떼어내려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돌아왔을 때 양경미는 방금 자신이 소개받은 남자와 그 남자를 소개시켜 준 친구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오광태의 두 번째 먹이감은 함연주의 립스틱이 희미하게 지워졌고, 그녀가 입은 검정 바지의 무릎께가 지저분하게 얼룩져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59>
“저예요.”
“응.”
아내 미영이 전화를 걸었을 때 김형진은 집에 돌아와 있었다. 주말임에도 꽤 늦은 퇴근길이었다. 하지만 그가 라면으로 저녁을 때울 무렵에도 아내는 여전히 귀가하지 않고 있었다.
“미안해요, 여보. 제가 깜빡했는데…. 실은 오늘 학교 선생님들하고 회식 약속이 있었어요.”
회식. 흔해빠진 핑계였다.
“그래? 그럼 늦는 거야?”
“네. 교외로 장소가 예약된 줄은 몰랐어요. 차는 안가져 왔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형진은 왠지 아내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는 실제로 미영이 침착함을 가장하느라 애쓰고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술 마시고 있어?”
“아, 아주 조금요. 정말이에요.”
묻지도 않았는데 그녀는 정말이라는 단어까지 덧붙이고 있었다. 어쨌든 남편은 의심하지 않았다.
“알았어. 너무 늦지는 마.”
“미안해요, 여보. 미안해요.”
아내는 거듭 미안하다는 말만 되뇌이고 있었다. 전화가 끊어졌다. 형진은 그제야 그녀가 자신에게 저녁을 먹었는지조차 묻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미안해요….”
박미영은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닫았다. 그녀의 말은 어느 정도까지는 사실이었다. 이혼남이 모는 자가용을 타고 도착한 그곳은 교외에 있는 횟집 안이었다.
“자, 미영씨. 이렇게 만난 것도 반가운데 한잔 하시죠.”
자리로 돌아온 미영에게 남자는 곧바로 술을 권하고 있었다. 그녀가 멋모르고 잔을 받자 그는 나란히 자신의 술잔도 채웠다.
기실 미영의 가슴은 묘한 흥분에 휩싸이고 있었다. 결혼한 이후로 남편 아닌 남자와 단 둘이 외식을 하는 것조차 거의 처음이었다. 괜찮을 거야, 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남편에 대한 미안함을 잊기 위해 미영은 술잔에 입을 가져갔다. 그래서 그녀는 차를 몰아야 할 상대방이 서슴없이 마주 술을 들이키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의식할 수 없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