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빡, 깜빡, 깜빡.
낡은 형광등처럼 시야가 느리게 밝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김형진의 아내 박미영은 한참 더 눈꺼풀을 달싹인 후에야 어렴풋 주위를 분간할 수 있었다.
여기가 어디일까, 그녀는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낯선 분위기였다. 흐릿하기는 했어도 그리 환한 장소는 아니었다.
제일 먼저 찾아온 것은 지끈거리는 두통이었다. 그제야 자신이 어딘가에 드러누워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미영은 이마를 짚으며 힘겹게 허리를 일으켰다. 그리고 직후 비명을 터뜨렸다.
“어머멋!”
그녀는 두 손으로 재빨리 앞가슴을 가렸다. 아니 하반신부터 감추느라 허둥거려야 했다. 기겁할 노릇이었다. 그녀의 몸뚱아리는 얄팍한 팬티와 브래지어만 남긴 채 완전히 벌거벗겨져 있었다. 눕혀져 있던 곳도 큼지막한 더블베드 위였다.
“아, 미영씨. 이제 깨셨군요.”
그때 방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미영은 연달아 소스라쳤다. 방금 샤워를 마친 듯 수건으로 뒤통수를 문질러대고 있는 그 사내는 바로 함께 술을 마셨던 이혼남이었다. 놀랍게도 그는 불룩한 가랑이 사이에 착 달라붙는 삼각팬티 한 장만을 걸쳤을 뿐 그녀와 마찬가지로 훤한 알몸이었다.
“놀라셨습니까? 편히 주무시라고 제가 벗겨 드렸습니다.”
남자는 천연덕스레 어깨를 으쓱이고 있었다. 미영은 낯선 사내가 자신을 발가벗겼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화들짝 민망한 시선부터 돌렸다. 울퉁불퉁한 근육질을 자랑이라도 하려는 양 상대방은 전혀 몸을 가릴 생각조차 않고 있었다.
“어, 어떻게 된 거죠? 여기는 어디예요?”
▲ 그림 최경태 | ||
“기억 못하실 줄 알았습니다. 아까 횟집 근처의 모텔입니다.”
모텔이라면 설마 러브호텔? 당연하다는 듯한 그 말투에 미영은 반사적으로 사타구니를 오므렸다. 다행히 그제껏 별일은 없었던 듯했다.
아니야, 이건 아니야-그녀는 거세게 고개를 흔들었다. 사내와 사내를 소개시켜줬던 그녀의 친구가 애초에 이 정도 선까지 상상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 아니었다. 그냥 술에 취한 상태에서 뭔가가 벌어졌다면 모르겠지만, 도리어 갑자기 깨 버린 그 술기운 탓에 제정신이 들고 있었다.
그녀는 용수철처럼 침대에서 뛰어내리며 옷가지를 찾았다. 그녀의 치마며 윗도리는 모두 방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미영씨?”
“저 나가겠어요. 가야 해요!”
“예? 왜요? 잠깐 쉬었다 가시죠. 저도 술 때문에 운전을 못합니다.”
미영의 입술이 아프게 깨물렸다. 어째서 그가 마주 술을 마셨는지 짐작되고 있었다. 그녀는 스타킹도 신지 않은 채 황급히 치맛자락에 비틀거리는 다리를 꿰어넣기 시작했다.
“어…. 미영씨, 잠깐만요.”
“저, 저 너무 늦었어요. 죄송해요. 정말 죄송합니다.”
자신이 왜 미안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미영은 거듭 고개를 꾸벅거렸다. 남자가 다가오려 하자 그녀는 자지러지는 표정을 지었다. 당황한 상대방은 체면상 덩달아 옷을 입지는 못하고 있었다.
“미영씨, 갑자기 이러시면…. 우리가 만난 것도 어차피 이런 정도는 생각하고서….”
이혼남의 아쉬운 목소리가 중얼거렸지만 미영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사내를 남겨 두고 허겁지겁 여관방을 빠져나왔다.
어디가 어디인지 도저히 분간할 수 없었다. 겁먹은 눈초리로 사방을 둘러보던 그녀는 다짜고짜 길가에 지나가던 택시를 멈춰 세웠다. 시계를 쳐다보니 이미 자정도 넘어 새벽 두 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저씨, 서울이요!”
미영은 남자가 뒤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뒤를 돌아보았다. 휘황한 모텔 간판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백미러로 그녀의 얼굴을 흘끔거린 운전기사가 묘한 웃음을 피식거리고 있었다. 마치 한밤중에 러브호텔 앞에서 홀로 택시를 기다리는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뻔히 안다는 것 같은 미소였다.
<#64>
흐흐흐…. 오광태는 푹신한 가죽소파 위에서 소리없는 웃음을 흘렸다. 광란의 하룻밤이 지나고 어느새 아침이 다가오고 있었다.
환하게 불이 밝혀진 방 안에 새파란 담배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는 만족스러운 시선으로 코 앞의 침대를 바라보았다. 그 대형 물침대 위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두 여자의 나신(裸身)이 나란히 널브러져 있었다.
풍만한 젖가슴을 내보이고 있는 것은 함연주였다. 바로 곁에서 커다란 둔부를 노출시키고 있는 쪽은 양경미였다. 백화점 쇼윈도처럼 선명한 조명 아래에 드러난 그녀들의 벌거벗은 몸뚱아리는 아직도 땀에 젖어 허옇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침대 주위에는 그녀들이 입고 있던 끈팬티며 스타킹 따위가 여기저기 지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양경미를 오피스텔에 데려왔을 때 함연주는 정욕이 가득한 표정으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리 친구 사이라지만 그녀들은 심지어 그룹섹스조차 마다하지 않았다. 오광태는 두 여자와 번갈아가며 밤새 온갖 체위의 정사를 즐겼다. 물론 수십 번 행위를 거듭했어도 그는 전혀 지친 기색이 없었다.
거실로 나온 오광태는 양주병을 집어들고 꿀꺽거렸다. 축배였다. 자신의 물건과, 그 물건이 가져다 준 엄청난 마력을 위한 축배였다.
환청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벌인 일에 대해 귀신도 충분히 흡족해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실제로 오광태는 자신이 이전보다 한층 강력해졌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아예 잠을 자지 않았다. 이제는 거의 먹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머릿속은 각성제를 맞은 것보다도 날카로웠고 온 몸에는 힘이 넘쳐났다. 타락한 여체들을 탐닉하면 탐닉할수록 그녀들에게서 빨아들인 음기가 점점 더 그를 채워 주고 있었다.
오광태는 뻥 뚫린 유리창을 통해 벌레들의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함연주와 양경미가 그렇듯 벌레들의 관심사란 오로지 추잡한 욕구를 해소하는 것뿐이었다.
남은 술을 들이킨 그는 잠든 여자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옷을 입기 시작했다. 두 여자와 함께 섹스를 치른 지 불과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았으나 오광태의 하초에는 벌써 새로운 기운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오늘도 수많은 벌레들이 그를 원하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는 그런 더러운 육체들 속에 마음껏 씨를 뿌려 주기만 하면 되었다.
오피스텔을 빠져나온 오광태는 지하주차장의 은색 스포츠카에 열쇠를 꽂았다. 등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어이, 이봐.”
그는 마치 예감하고 있었다는 양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어두운 지하주차장 구석에서 여러 명의 사내들이 나타났다.
검은 양복의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전부 험악한 인상에 그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떡 벌어진 체구를 건들거리고 있었다. 소위 어깨들인 것 같았다.
“뭡니까?”
오광태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에에…. 그건 알 필요없고, 뭐 하나만 물어 보자구. 형씨 혹시 지금 함연주라는 아가씨의 오피스텔에서 나왔나?”
양복들 사이에서 우두머리인 듯한 가죽 점퍼가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요.”
“그래? 맞는구만. 그럼 자네 어저께 밤에 거기에서 누구랑 같이 있었지?”
그 말과 동시에 사내들이 그의 주위를 에워쌌다. 오광태는 그제야 멀찌감치 떨어진 주차장 기둥 뒤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안경잡이 남자였다.
그것이 누구인지 알아차린 오광태는 히죽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대꾸했다.
“누구? 어떤 년을 말하는 거지?”
“뭐야? 어떤 년? 너 이 새끼, 다 알고 왔어! 니가 어젯밤에 건드린 여자가 누군지 알아?”
두 사내가 억센 손아귀로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가죽 점퍼가 손가락 마디를 뚜둑거리며 다가섰다. 순간 오광태의 눈동자에서 시뻘건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65>
김형진은 피곤한 몸을 식탁 의자 위에 주저앉혔다. 복잡한 머릿속만큼 뒤엉킨 담배 연기가 그의 손 끝에서 허공으로 흩어져 갔다.
맞은편 아파트에 가려진 동쪽 하늘가가 서서히 희미해지고 있었다. 아내 박미영이 집에 돌아온 것은 새벽 세 시경이었다. 그때까지 한 통의 전화도 없었고, 휴대폰도 내내 꺼져 있었다.
그는 거실 소파에서 선잠으로 버티며 그녀를 기다렸다. 하지만 제대로 걸음도 가누지 못한 채 현관을 들어서던 아내에게서는 지독한 술냄새부터 와락 풍겨 왔다. 처음이었다. 남편인 형진으로서도 지금껏 그녀가 그렇게 취한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미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너무 취한 탓에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다. 그녀는 옷도 벗지 못한 그대로 안방 침대에 쓰러져 버렸다. 그래서 형진이 대신 겉옷이나마 벗겨 주어야만 했다.
그는 자신이 그날 밤 아내를 두 번째로 벌거벗긴 남자라는 것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어쨌든 뭔가 기이한 느낌이 든 것은 그 순간이었다.
형진은 아내의 옷가지를 챙긴 뒤 팽개쳐진 그녀의 핸드백을 무심코 집어들었다. 그러자 열려져 있던 가방 안에서 두 가지 물건이 흘러나와 방바닥에 떨어졌다.
묘하게도 그것들은 모두 스타킹이었다. 하나는 방금 벗은 듯 아무렇게나 돌돌 말려진 팬티스타킹이었고, 다른 하나는 채 포장도 뜯지 않은 새것이었다.
새 스타킹 정도야 깔끔하고 차분한 아내의 성격상 그리 특이한 물건은 아니었다. 한데 오늘 하루 미영이 신고 있었던 게 분명한-잔뜩 구겨진 스타킹이 문득 그의 눈길을 끌고 있었다.
고개를 갸웃거린 형진은 다시금 침대 위의 아내를 돌아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치마를 끌어내리기 전부터 그녀의 하체에서는 스타킹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전날 함께 출근할 무렵 미영이 안방에서 곱게 스타킹을 꺼내 신던 장면을 기억하고 있었다.
올이 나간 것일까? 얼핏 훑어봤지만 투명한 그 천자락에는 아무런 찢겨진 자국이 없었다. 갈아 신었어야 할 새 팬티스타킹도 멀쩡하게 남아 있었다. 행여 그런 일이 있을까 봐 아내가 항상 여분의 스타킹을 준비해 둔다는 것쯤은 형진도 익히 알고 있었다.
더워서 벗었을까? 그 또한 이상했다. 아무리 따뜻해졌다고는 해도 그럴 만한 날씨와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게다가 남학생들 앞에 서야 하는 교사 신분인 미영이 스커트를 입고서 스타킹도 없이 돌아다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설마…. 별것 아니겠지. 형진은 자신이 지나치게 기자다운 눈썰미를 부린다고 생각했다. 꽁초까지 타 들어간 담배를 비벼 끈 그는 한 개비 더 불을 붙였다.
중요한 문제는 스타킹 따위가 아니라 아내의 예고도 없는 외박이었다. 부부싸움은 피하고 싶었다. 그래도 요즘들어 그녀가 부쩍 변한 듯한 기분만은 사실이었다. 아내가 깨어나면 자세히 물어야겠다고 다짐한 그는 어깨를 주무르며 일어섰다. 밤새 소파 신세를 지느라 잠이 부족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