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리고 있었다. 거대한 마신(魔神)의 등자락에서 흘러내린 듯한 암운(暗雲)이 도시의 회색빛 빌딩들을 시커멓게 휘덮고 있었다.
김형진은 어두침침한 커피숍 구석 자리에 앉아 조심스럽게 창 밖을 살폈다. 거세게 유리창을 두들기는 빗줄기들을 바라보며 그는 궁도(宮島)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 외딴 섬에 자신을 꽁꽁 가두어 놓았던 그때의 폭우처럼, 그의 머릿속은 무기력한 갑갑함에 빠져 있었다.
이따금씩 지나치는 종업원들이 미심쩍은 눈초리로 그를 흘끔거렸다. 형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턱에는 면도도 하지 못한 까칠한 수염이 돋아 있었다. 입고 있는 와이셔츠 또한 제대로 다림질을 못해 여기저기 구김 투성이였다.
커피숍은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N호텔 건물과 마주하고 있었다. 특히 2층 창가에서는 호텔 측면에 난 한 군데뿐인 나이트클럽의 입구가 똑똑히 바라보였다.
테이블 위에는 벌써 세 잔째의 커피가 놓여 있었다. <주간채널> 사무실에서 부장이 으르렁대고 있는 그 시각에도 형진은 사흘째 같은 장소를 지키고 있었다. 그가 그곳에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심지어 그를 미행하고 있을 형사들-그들이 정말 경찰이라면-조차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는 N호텔의 나이트클럽이 열릴 시간에 맞춰 그 커피숍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꼼짝하지 않은 채 나이트클럽의 입구를 감시했다. 커피숍 영업시간이 끝난 뒤에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인 척 호텔 앞을 서성이며 손님들의 얼굴을 일일이 훑어보았다.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여자의 제보가 맞는다면, S양과 재벌집 며느리를 농락한 게 그 작자가 맞는다면, 오광태는 반드시 그곳에 다시 출현할 것이 뻔했다.
▲ 그림 최경태 | ||
형진의 몰골은 점차 피폐해지고 있었다. 일주일 가까이 그가 잠을 잔 시간은 채 열 시간도 못되었다. 그는 분노했다. 자신이 이렇게 된 이유는 전부 오광태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 놈만 찾아내면, 그러면 모두 해결되리라고 그는 믿고 있었다.
그러나 오광태는 사흘 내내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마치 형진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꽁꽁 숨어 버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몇 시간째 그치지 않는 비 탓인지 그날 따라 나이트클럽에 들어가는 손님은 거의 없었다. 갑자기 휴대폰이 징징거렸다. 그는 액정화면을 들여다보지도 않고 아예 전화기의 전원을 꺼 버렸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전화가 걸려 왔지만 그는 한 통도 받지 않고 있었다.
형진은 지루함을 떨치기 위해 벌겋게 충혈된 눈가를 비볐다. 문득 옆자리 손님이 남기고 간 신문에 시선이 닿았다. 그는 종업원이 치우기 전에 재빨리 그 신문을 펼쳐 들었다. 군데군데 낱장들이 빠진 그날치의 석간이었다.
그는 창 밖을 살피는 간간이 종잇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그의 표정이 아연해진 것은 그때였다.
‘재계 원로 황연택 회장 위독’
사회란 한 귀퉁이에 그런 기사가 찍혀 있었다. 이윽고 누군가가 커피숍 문을 밀고 들어섰다. 회색 양복을 입은 남자 하나가 그를 향해 똑바로 다가오고 있었다. 형진은 상대방을 쳐다보자마자 벌떡 몸을 일으켰다.
<#104>
“어떻게 된 건가요? 정말로 위독하십니까?”
삼십 분 뒤, 형진은 대형 승용차 뒷좌석에서 다급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져댔다. 회색 양복의 남자가 차를 몰고 있었다. 언젠가 그를 납치해 황연택에게 데려갔던 바로 그 사내였다.
형진의 옆자리에는 장 비서가 앉아 있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고 어둡게 눈썹을 찌푸리고 있었다.
“회장님이 저를 부르신 겁니까?”
“네. 하지만 유감입니다. 김 기자님을 찾는 데에 너무 오래 걸렸습니다. 전문가들이 나서도 힘들 만큼 종적이 묘연하시더군요. 혹시라도….”
장 비서는 잠시 말을 끊었다.
“혹시라도…. 저희가 너무 늦은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너무 늦었을지도 모른다-비장하게 들려 오는 장 비서의 말투에 형진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차창에는 여전히 장대 같은 빗방울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윽고 자동차가 유명 대학병원의 정문을 통과했다. 그들은 깊숙한 곳에 위치한 건물 앞에서 차를 내린 뒤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아마도 VIP만을 위한 특별 병동인 듯했다. 두 사람이 꼭대기 층의 어느 병실에 도착하자 지키고 서 있던 검은 양복의 사내들이 문을 열어 주었다. 형진은 복도 너머에 점잖은 옷차림의 사람들이 수십 명 대기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상황은 그의 예상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병실에 들어선 그는 생소한 광경 앞에 당황해야 했다. 커다란 방 한가운데에는 하얀 침대가 놓여 있었고, 침대 주위에는 번쩍이는 기계들과 함께 의사와 간호사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그 속에 노인이 누워 있었다. 황연택 회장이었다.
황 회장의 얼굴에는 산소마스크까지 씌워져 있었다. 형진은 의사들의 얼굴에서 뭔가가 임박했다는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다. 새하얗고 어두운 그 공간 안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가득 드리워져 있었다.
<#105>
“회장님, 김형진 기자가 왔습니다.”
침대 맡에 다가선 장 비서가 나지막히 말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의사와 간호사들이 조용히 병실을 빠져나갔다. 다행히 황연택 회장은 잠들어 있지 않았다. 형진을 알아본 노인이 가까이 오라는 양 뭐라 우물거리더니 장 비서에게 힘겹게 손가락 끝을 까닥였다.
“그건 절대안 됩니다. 회장님. 지금 산소마스크를 벗으시면….”
장 비서가 정색을 해댔다. 그러나 황 회장은 보이지 않을 만큼 간신히 고개를 젓고 있었다. 마치 마지막 부탁이라는 것 같았다. 침통한 얼굴의 장 비서가 그의 산소마스크를 떼어냈다.
“어서 오시게….”
형진은 실낱 같은 노인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침대 위로 바짝 허리를 굽혀야 했다. 황연택의 잿빛 얼굴에서는 살가죽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음성만 아니라 노인은 육체마저 거의 꺼져 가는 중이었다.
“지난번은 미안했네.”
“아닙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회장님.”
할 말을 찾지 못한 형진이 무겁게 입술을 달싹였다. 황연택 회장은 전처럼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김 기자, 내가 말하려고 했던…. 두 번째 비밀을 아직 기억하는가?”
“예, 회장님.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제 자네에게 마지막 이야기를 들려 줄 때가 온 것 같아.”
황연택이 부들거리는 손길을 내밀었다. 형진은 긴장하며 노인의 앙상한 손을 붙잡았다. 주검처럼 싸늘한 느낌이었다. 안절부절 못하는 장 비서를 향해 황 회장이 눈을 껌뻑였다. 그가 품 속에서 작은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묘하게도 그는 그것을 노인이 아닌 형진에게 건네고 있었다.
형진은 의아한 시선으로 그 빛바랜 종이쪽을 들여다보았다. 아주 오래된 흑백 사진 한 장이었다.
“이, 이 사진은?”
형진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사진에는 젊고 미인인 두 여자가 나란히 찍혀 있었다. 한데 뜻밖에도 그 중 한 사람은 그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래, 맞아…. 자네 어머니라네.”
그러자 황 회장의 입에서 가느다란 숨결이 새어나왔다. 그랬다. 형진의 어머니였다. 그것도 처녀 시절이 분명한, 젊은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그 곁의 여자가 누구인지 자네는 아는가…?”
그때였다. 실로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가 형진의 귓가에 들려 왔다.
“내 딸일세. 죽은 내 딸년이지….”
자신의 딸, 황연택이 말했다. 소스라친 형진은 망연한 얼굴로 노인과 사진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노인은 믿기지 않는 이야기만 뇌까리고 있었다.
“김형진 자네는 어머니를 기억할 게야…. 나도 그녀를 똑똑히 기억한다네.”
“그,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회장님이 저희 어머니를 어떻게…?”
“말해 주지. 왜냐면…. 왜냐면 자네 어머니는 내 딸의 가장 친한 친구였으니까. 둘도 없는, 친자매 같은….”
내 어머니와 황연택 회장의 외동딸이 친구였다고? 형진은 경악해야 했다.
“김 기자 자네는 몰랐겠지만 나는 오래 전부터 자네에 대해 알고 있었네. 자네의 어린 시절도…. 자네가 외가 쪽과는 인연이 끊겼다는 것도…. 본디 나와 자네의 외할아버지는 동향지기였지. 그래서 자네 어머니와 내 딸은 어린 시절부터…. 그렇지만 그게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야. 김 기자 자네가 찾아왔던 날 나는 그 모든 비밀을 얘기해 주려고 했었어. 그런데….”
“회, 회장님!”
그 대목에서 노인의 호흡이 가빠졌다. 장 비서가 황급히 달려들었다. 하지만 황연택은 숨을 헐떡이면서도 한사코 손을 내저었다.
“김형진 군(君), 자네는 자네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가?”
넋이 나간 형진은 자신도 모르게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엄청난 놀라움 탓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부디 용서해 주게. 나는…. 나는 내 딸을 대신해 자네에게 속죄해야 한다네.”
“소, 속죄라니요?”
“속죄해야 해. 내 유일한 여식은 너무나 큰 죄를 지었어. 씻을 수 없는 죄를….”
노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이성귀는…. 이성귀는 내 딸만 건드렸던 게 아니었어. 내 딸년은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의 친구까지…. 그자에게 바쳤다네.”
순간 형진은 그곳에 서 있는 것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옥에서 울려나오는 거짓말을 듣고 있다고 생각했다. 황연택 회장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그의 가슴에 마지막 비수를 꽂고 있었다.
“그 친구가…. 바로 자네 어머니일세.”
맙소사-형진의 몸뚱아리가 천천히 병실 바닥으로 무너져내렸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