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퍼붓던 비가 그쳤다. 그러나 햇살이 비치지 않는 거리는 이틀째 낮에도 여전히 짙은 연무 속에 잠겨 있었다.
박미영은 안개처럼 흐린 빛깔의 칵테일을 홀짝거리며 천천히 주위를 흘끔거렸다. 그녀는 시내 중심가의 어느 바(bar) 안에 앉아 있었다.
아직 술을 마시기에는 이른 오후였다. 이국적으로 꾸며진 그 술집은 외국인들이나 그들의 현지처 따위들을 주로 상대하는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몇 명 되지 않는 손님들 중에는 하얗고 검은 피부의 외국 사람이 드문드문 섞여 있었다.
미영의 건너편에서는 중년의 백인 남자와 늘씬한 몸매의 한국 아가씨가 어깨를 맞붙인 채 히히덕거리는 웃음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그녀의 등 뒤에는 커다란 덩치의 흑인 사내가 혼자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비스듬히 돌아앉은 미영은 길게 이어진 의자 위에서 높다랗게 다리를 꼬아댔다. 핫팬츠보다도 더 짤막한 미니스커트 아래로 망사스타킹을 신은 허벅지가 허옇게 드러났다. 자칫 둔부마저 노출될 만큼 아슬아슬한 옷차림이었다. 그녀의 발 끝에서 뒤축 없는 샌들이 위태롭게 간들거렸다. 그녀가 입고 있는 민소매 블라우스는 갈라진 계곡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가슴께가 깊이 파여 있었다.
미영이 내려놓은 칵테일 잔의 가장자리에 새빨간 립스틱 자국이 진하게 묻어났다. 흑인 남자가 유심한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몸을 일으킨 그 사내가 슬그머니 그녀의 옆 자리에 걸터앉았다.
“Excuse me. Madam.”
그가 영어로 뭐라 장황하게 지껄였다. 능글맞은 미소를 띤 바텐더가 다가왔다.
“실례합니다, 손님. 이 분이 손님께 샴페인을 사도 되겠냐고 물으시는데요.”
남자의 이야기를 듣고 난 바텐더가 나지막히 허리를 기울이며 그녀에게 말했다. 하지만 미영도 샴페인을 사겠다는 표현이 낯선 여자에게 동침할 의사가 있는지를 묻거나, 아니면 외국에서 창녀를 살 때에 쓰는 고전적인 방식이란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대답 대신 야릇하게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마주 웃어 보인 흑인 사내가 손가락을 튕기며 술을 주문했다.
<#112>
“뭐야? 김형진 자네 미쳤어?”
김형진은 부장의 책상 앞에 서서 아프게 입술을 깨물었다.
“아주 정신이 나갔구만! 말도 없이 사흘이나 무단 휴가를 내더니, 이제는 아예 휴직계를 내겠다구?”
벌떡 일어선 부장이 악을 썼다. 잡지사 사무실 안의 모든 시선들이 그들에게 쏠려 있었다.
“죄송합니다, 부장님.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이봐, 김 기자! 도대체 이유가 뭐야? 자네 어제 새벽에 느닷없이 여기 뛰어들어와서 밤까지 새웠다며? 혹시 마누라가 바람이라도 났어? 그래서 마누라 붙잡으러 가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아닙니다. 이유는 저도 말씀드리기 곤란합니다. 다만…. 다만 몇 주, 아니 며칠이면 됩니다. 저에게는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형진은 간밤의 추레한 몰골 그대로 애원해댔다. 이유를 설명하기란 불가능했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게 뻔한 탓이었다.
그의 머릿속은 오직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다. 어떻게든 다음 희생자를 찾아내 오광태를 막는 것뿐이었다. 빙의(憑依)인지 진짜 귀신의 환생인지는 몰라도 이제 그는 이성귀가 오광태의 몸 속에 들어가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지만 그가 아닌 오광태와 정사를 벌였던, 강 마담의 시체에서 나온 정액이 증거였다. 그 유전자가 자신과 부계(父系) 쪽으로 일치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이성귀의 씨앗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N호텔에서 찍힌 사진에도 분명 오광태 대신 이성귀가 나와 있었다.
“안돼. 그럴 바엔 차라리 사표를 써! 사표를!”
부장은 막무가내로 고개를 저었다. 형진이 뭔가를 결심한 듯 대꾸하려 하자 누군가가 옆에서 황급히 끼어들었다.
“저, 부장님.”
“왜?”
“김 기자에게 전화가 왔는데요. 급한 연락이랍니다.”
보다 못한 동료 기자가 나서서 반 억지로 형진의 팔을 잡아끌고 있었다. 형진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동료가 내민 전화를 받아들었다.
“여보세요?”
“김형진 기자님이시죠…?”
나지막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제가 누구인지…. 기억하시나요?”
“네. 아, 압니다!”
순간 형진은 화들짝 긴장했다. 그녀였다. 지난번 그에게 오광태에 관해 제보했던 바로 그 정체불명의 아가씨였다.
“아직 오광태씨를 찾아내지 못하신 모양이더군요.”
“저도 찾고 있습니다! 하지만 도무지 어디에 있는지….”
“좋아요. 그렇다면 제가 한 가지 더 말씀드리죠.”
“뭐, 뭡니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여자가 조용한 숨소리를 내며 입을 열었다.
“내일 밤에 나이트클럽으로 가 보세요.”
“나이트클럽이요? N호텔 나이트클럽 말인가요?”
“그래요. 거기 가면 그 사람을 만나실 수 있을 거에요.”
수화기 너머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형진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잠깐만요, 제발 끊지 마세요! 부탁입니다!”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다그쳐 물었다.
“그, 그게 확실한가요? 아가씨가 어떻게 그걸 아십니까?”
“그 사람이 호텔에 전화를 거는 걸 들었어요. 나이트클럽 특실을 예약하는 전화였어요.”
“전화를 엿들었다면…. 그럼 대체 아가씨는 누굽니까? 무엇 때문에 저한테 이런 정보를 알려 주시는 거죠?”
형진은 초조하게 수화기를 고쳐 쥐었다. 망설이는 듯 한참 후에야 여자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건 오광태 그 남자를…. 그 남자를 제 것으로 만들고 싶어서예요.”
“아가씨 것으로요? 왜죠? 혹시 그 남자와의 섹스 때문입니까?”
결정적인 질문을 던져야 했다. 곁에 있던 동료가 떨떠름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그러자 형진이 가장 바라지 않던 이야기가 들리고 있었다.
“저는 그 사람의 물건을 원해요.”
물건? 형진의 입이 멍하니 벌어져 갔다.
“내일 그곳으로 가 보세요. 아마 새로운 여자와 함께 나타날 거예요. 여자 하나랑 남자 하나를 예약한다고 했으니까.”
그 말만을 남긴 채 전화가 끊어졌다. 오싹한 두려움에 형진은 몸을 떨었다. 그의 짐작처럼 또 다른 희생자가 생기려 하고 있었다.
▲ 그림 최경태 | ||
“아아, 아아아…!”
미영은 헐떡이며 남자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Great, so hot-남자는 영어로 된 감탄사를 남발하고 있었다. 허름한 원룸 아파트 안이었다. 흑인 사내의 거대한 덩치가 미영의 새하얀 몸뚱아리를 타누르고 있었다.
남자는 그 아파트에 꽤 많은 여자들을 끌어들인 모양이었다. 침대 맡에 놓인 콘돔 상자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어도 미영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사내의 사타구니에 찌든 노린내조차도 그녀에게는 아무렇지 않았다.
미영은 더 이상 쾌락을 갈구해 타락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스스로 타락을 즐기고 있었다. 침대 위에는 오직 뜨거운 열락과 짐승처럼 거친 한 쌍의 육체가 난무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미영은 그곳에 그들 두 사람만이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실상 그 모든 일이 치밀하게 계획되어 있었다는 것 역시 알지 못하고 있었다.
제삼의 눈동자가 베란다 커튼 뒤에 숨어 있었다. 바에서부터 미영을 뒤쫓아 왔던 그 남자는 애타게 신음하는 그녀의 나신을 바라보며 소리없이 만족에 찬 웃음을 짓고 있었다. 적(敵)의 아내가 타락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그에게 있어 커다란 기쁨이었다.
<#114>
“여보, 여보!”
김형진은 아파트에 들어서자마자 아내부터 찾았다. 하지만 어둑어둑한 집 안에 미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휴대폰조차도 하루종일 불통이었다.
형진은 아내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으리라 결심하고 있었다. 오광태의 물건-30년 전 죽은 이성귀의 시신에서 음부가 사라졌다는 소문을 상기해낸 그는 스스로를 저주해야 했다. 궁도에서 느꼈던 기시감(旣視感)과, 자신의 몸 속에 색마 이성귀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은 결국 모든 운명을 한곳으로 이어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운명은 마침내 아주 가깝게 다가와 있었다.
그는 뭔가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어렴풋 위험이 닥쳐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다행히 정체불명의 여자가 말한 내일 밤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내일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죄없는 희생자를 만들지 않는 것만이 그의 유일한 목표였다.
안방 문을 열고 두리번거리던 형진은 야릇한 디자인의 스타킹과 방금 벗어던진 듯한 속옷 따위만이 나뒹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손목시계는 저녁 6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로서는 무작정 아내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아내가 퇴근하기에는 이른 시간인지도 몰랐다.
형진은 대충 몸을 씻은 뒤 텅 빈 거실에 주저앉았다. 지난 밤도 거의 뜬 눈으로 지샌 탓에 가눌 수 없을 만큼 찌든 피곤함이 한꺼번에 몰려 왔다. 일단 조금이라도 자두어야 할 것 같았다. 잠시 기댔던 그의 등허리가 자신도 모르는 새 소파 위로 천천히 내려앉았다.
그렇게 얼마쯤이나 잠이 들었을까-쏴아아, 희미하게 들려 오는 소리에 형진은 문득 눈을 떴다. 묵직한 뒤통수를 문지른 그는 여전히 어둑어둑한 창가로 향했다.
낮 동안 그쳤던 빗줄기가 다시 거세게 쏟아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는 거실 안을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바뀐 게 없었다. 구석에 놓인 오디오에서 ‘PM 7:00’이라는 글자가 깜빡이고 있었다. 잠이 든 지 채 30분도 지나지 않은 시각이었다.
아내는 아직도 집에 돌아오지 않은 듯했다.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때였다. 왠지 문득 묘한 예감이 든 형진은 다시 한 번 오디오의 시계를 쳐다보았다.
맙소사! 찰라 그의 온 몸이 서늘하게 소스라쳤다. 시간은 틀린 게 아니었다. 달라진 것은 시간 앞에 달린 날짜였다. 당혹스럽게도 30분이 아니라 하루가 바뀌어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