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업작가-결국 나는 그럭저럭 돌아가는 머리통 하나만을 믿고 생판 무지한 세계에 뛰어들었다. 내가 남들처럼 평범한 길을 가기를 바라셨던 부모님은 그런 나를 당연히 못마땅하게 여기셨다. 나는 아버지가 내 몫으로 모아 두었던 결혼자금을 빌려 작업실을 얻었다. 남들은 그런 나를 경외심 섞인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글쟁이는 굶어 죽기에 딱 좋은 직업이었다. 나는 곧 작가란 신분이 얼마나 처량한지를 깨닫기 시작했다. 한 반 년 정도는 잡지사도 구석 자리나마 지면을 내 주었으나, 그렇게 드문드문 써대는 원고료는 다 합쳐도 수표 한두 장을 채우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청탁마저도 몇 달이 지나자 완전히 끊어져 버렸다.
그러다 어느 날 웹서핑-정확히 말하면 남아도는 시간을 죽이느라 포르노물을 뒤적이고 있었다-을 하던 나는 어느 성인 사이트에서 소설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게 되었다. 물론 섹스를 주제로 하는 소설이었다. 나는 아무 생각없이 반쯤은 장난 삼아, 반쯤은 사춘기 시절의 유치한 상상을 되살려 그곳에 글을 보냈다. 한데 그 시도가 의외의 결과를 가져 왔다. 갑자기 은행통장 안으로 그때껏 소위 소설가라며 벌었던 것보다 몇 배는 많은 돈이 굴러들어왔던 것이다.
▲ 그림 최경태 | ||
그럼에도 나로서는 돈의 유혹을 거절할 수 없었다. 허울 좋은 자존심은 이내 잊었다. 핥고, 빨고, 넣고, 싸는, 하루종일 남녀의 벌거벗은 몸뚱아리만 상상하며 살더라도 빈한(貧寒)하게 사는 것보다는 그 편이 훨씬 나았다.
나> 서로 따로 지내신다면….
나는 키보드를 두들겨 질문을 보냈다.
그녀> 남편 분은 지금…, 어디 계신 건가요?
나> 그냥 조금 먼 곳에 있어요.
나> 먼 곳? 오래되셨나요?
그녀> 후훗, 너무 많이 알려고 하지 마세요.
나는 슬그머니 입을 다물었다. 어쩐지 내가 그런 질문을 던진다는 게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녀> 궁금하세요?
나> 아, 아니에요.
대꾸는 그렇게 했지만 그녀에게 조금씩 호기심이 생기고 있었다. 남편과 떨어져 사는 여자, 그녀의 분위기로 보건대 흔히 상상할 수 있는 이유는 아닌 것 같았다.
그녀> 실은 함부로 말하기가 그래서 그래요. 남편이 없다고 하면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까요.
나> 이상한 생각?
그녀> 뭐랄까, 남자들은 가끔 그런 여자라면 쉽게 접근할 수 있다고 믿더군요.
나> 쉽다….
어렴풋 의미를 짐작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솔직히 그보다 더한 경우도 있어요. 어떤 남자들은 남편이랑 떨어져 사는 여자들은 모두 원하고 있다고 착각하죠.
나> 원해요? 뭘요?
손가락을 움직이고 나서야 내 질문이 너무 순진했음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잠시 사이를 두고 말을 이었다.
그녀> 잠자리, 섹스요.
나는 말문을 잃었다. 그녀와의 대화에서 섹스란 단어가 나오리라고는 예상치 못한 탓이었다.
그녀> 왜들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그런 여자들 모두가 색녀는 아니잖아요. 섹스하고 싶어서 안달인 것도 아니고요.
그녀는 마치 자신은 섹스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강변하는 듯했다.
나> 저는 그런 사람들처럼 생각하지 않아요.
그녀> 아, 물론 알아요. ‘나’님이 그런 남자가 아니라는 건. ‘나’님은 좋은 사람인 것 같아요.
우리는 번쩍이는 기계장치인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을 뿐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진심으로 나에 대해 호의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 고마워요. 그렇게 말해 줘서.
그녀가 활짝 웃는 모양의 이모티콘을 그렸다.
나> 어쨌든 ‘그녀’님 말을 듣고 보니 실제로 그런 사람이 많다는 느낌이 드네요.
나는 화면을 쳐다보며 골똘해졌다. 그녀의 말처럼 어느 여자든 대화방에서 남자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털어놓는다면, 필경 그 여자는 하룻밤 섹스 상대를 찾는 사내들의 집중공세를 질리도록 받게 될 것이다. 적어도 컴퓨터를 꺼 버리기 전까지는.
하지만 그녀는 단순히 채팅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었다. 어쩌면 실생활 안에서도 그녀는 남자들의 관심을 끄는 여자인지도 몰랐다. 남자들의 시선을 받을 만한 유부녀라…. 나는 채팅을 한 이후 처음으로 그녀가 어떤 여자일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문득 무슨 게임을 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조각조각으로 전체를 상상하는, 퍼즐맞추기 같은 게임. 나는 머쓱히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나> 아무래도 서로의 경험 차이겠죠. 특히 결혼한 여자에 대해서.
그녀> 맞아요, 경험의 차이. 결혼은 익숙함도 가져다 주니까.
나> 익숙함이요?
그녀> 물론 다른 것도 있겠지만, 여자들 대부분은 결혼을 하고 나서야 섹스에 익숙해지거든요. 여자는 남자와 달리 성욕을 해소할 곳이 별로 없잖아요. 남자들처럼 사창가나 룸살롱에 들락일 수 있는 것도 아니구.
나> 아….
그녀> 어쨌든…. 남편이랑 오래 떨어져 있다 보면 섹스가 그리워지기도 하겠죠. 밤에는 외롭기도 할 테구요. 남자들이 그렇게 여기는 것도, 실제로 그런 걸 원하는 여자들이 있기는 있다는 뜻일 거예요.
그녀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그제야 조금은 멋쩍어진 양 그녀가 말했다.
그녀> 근데 제가 오늘 너무 이상한 얘기만 하고 있죠? 후후후.
잠깐 동안 침묵이 흘렀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혹시 지금껏 줄줄이 이어진 글자가 그녀 자신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었을까?
나> 그럼 ‘그녀’님은 그렇지 않나요?
그녀> 네?
나> 오해하지는 마세요. ‘그녀’님은 외롭지 않으세요? 남편 분과 오래 떨어져 계셨다는데….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웃는 모양의 아이콘만이 조용히 되돌아오고 있었다.
“포르노 소설이라면…. 그런 쪽에 경험이 많아야 하겠죠?”
“그런 쪽?”
효미의 뺨은 발갛게 홍조를 띠고 있었다. 그녀와 나는 그날따라 바(bar)에서 꽤 많은 술을 마시고 있었다. 어차피 바텐더도 매상을 올리는 곳이라지만, 우리는 둘이 함께 와일드터키 한 병을 거의 3분의 2가량 비우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여자 경험 말이에요.”
그녀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씁쓸히 이마를 찡그렸다. 기실 포르노 작가라는 신분을 밝힐 때마다 제일 먼저 받게 되는 질문이 그것이었다.
“효미씨, 몇 살이죠?”
문득 그녀의 나이조차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스물셋이요. 왜 그러세요?”
“내가 그런 얘기를 해도 되는지 궁금해서요.”
효미의 앳된 얼굴이 귀엽게 찡그려졌다. 스물셋, 나와는 정확히 열 살 차이인 셈이었다. 십 년 전의 내가 어떤 경험을 했는지 가물가물하게 느껴졌다.
“여자 경험이라….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이따금 경험담도 나오겠지만 다른 소설이나 마찬가지예요. 공포소설 작가라고 진짜 살인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첩보소설 작가라고 스파이 생활을 하지도 않는 것처럼.”
나는 그것을 슈퍼맨 논리라고 불렀다. 사람들이 슈퍼맨을 좋아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그렇게 되기를 원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렇게 될 수 없으니 상상으로 만족하기 때문이다. 포르노 소설도 똑같다. 내가 카사노바 같은 주인공이 되어 상상 속에서 수많은 여자와 섹스를 하는 것이다.
대충 둘러대는데도 효미는 퍽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그녀가 불쑥 카운터에 턱을 괴며 말했다.
“있잖아요. 그럼 여자 얘기 좀 해 주세요.”
“여자 얘기요?”
“네. 꼭 야한 얘기를 해 달라는 뜻이 아니라요, 그냥 옛날에 연애하셨던 이야기라도요.”
작가의 애정생활은 어떤지 궁금하다는 의미일까. 효미의 표정은 마치 남자 선생님에게 첫경험 이야기를 졸라대는 여학생 같았다.
“솔직히 말해서 별로 없는데.”
“으응, 그래도 듣고 싶어요. 한 명도 없지는 않으셨을 거 아니에요?”
글쎄다. 나는 머릿속으로 내가 아는 여자들을 기억해 보기 시작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이제까지 대여섯의 아가씨를 사귄 적이 있었다. 개중에는 함께 살을 섞은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잠시 스쳐간 사이이거나 그저 섹스 자체를 위해서 만났을 뿐이었다. 적어도 순수한 연애감정을 지녔던 여자는, 그리고 그럴 만큼 오래 곁에 머물렀던 여자는, 차은정 그녀밖에 없었다.
나는 멍하니 효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은정이를 닮은 그녀 앞에서 은정이의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는 게 왠지 서글펐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