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헤어진 여자친구하고 섹스하던 기억을 해요.
그녀> 다른 여자랑 같이 잘 때에도?
나> 네. 다른 여자와 같이 자면서도 그랬어요.
그녀> 후후, 이제 보니 나쁜 남자군요. ‘나’님은.
나는 밀려 오는 흥분에 몸을 떨었다. 그녀는 나를 비난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녀의 말투에는 다분히 음란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그녀> 얘기해 줘요. 옛날 애인도 저처럼 섹스를 좋아했나요?
나> 그 여자도 ‘그녀’님만큼이나 섹스하는 걸 좋아했어요.
그녀> 미인이었겠죠?
나> 윤기가 흐르는 짙은 색 살결에…. 치마를 잘 입고 다리가 예뻤어요.
그녀> 가슴이 크고 엉덩이가 탄탄한 글래머였을 것 같아요. 그래서 아직도 그 여자 분을 못 잊는 건가요?
나> 더 이상 그 여자를 생각하지 않아요. 이제는 섹스할 때마다 ‘그녀’님을 상상해요.
그녀> 아아…!
우리는 거의 매일 밤마다 예정된 시간에 예정된 대화방에서 만나 서로를 탐닉하기 시작했다. 불륜(不倫)이나 부정(不貞)이란 단어는 떠오르지 않았다. 사람들은 흔히 육체적인 증거에만 집착하기 마련이었다. 머릿속으로 수없는 간음을 저지르고, 상상 속에서 수많은 섹스를 치른들, 그 무엇에도 죄를 씌우지 못한다. 컴퓨터란 그런 죄책감을 가려 주는 데에는 더없이 유용한 문명의 이기였다. 그녀와 나는 전혀 몸을 더럽힐 필요가 없었다. 허울 너머에 우리 자신을 감춘 채 정신적인 교감만으로도 얼마든 욕정을 충족시킬 수 있었다.
K선배의 집들이 이후로 나는 은정이를 거의 만날 수 없었다. 언젠가 얘기했듯 작년 이맘때 동기녀석의 결혼식장에서 그녀와 우연히 마주쳤던 것이 마지막이자 전부였다. 어색한 목례만 나누었을 뿐 서로 말 한 마디조차 건네지 못했던 그날, 나는 유달리 진해 보이던 은정이의 화장기가 애써 뭔가를 감추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글쎄다. 혹시라도 그녀는 10년이란 세월을 지우고 싶어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조금이라도 고리타분한 신혼생활의 흔적을 가리고 싶어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무튼 은정이가 혼전 임신을 했다던 J의 귀띔은 사실이었다. K선배와 그녀의 신혼집에 다녀오고 나서 몇 달도 채 지나지 않아 그녀가 출산을 했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 은정이는 잘나가던 회사생활까지 접었다고 했다. 나는 여전히 그녀를 잊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갔다.
“태영이 너, K선배 얘기 들었냐?”
그러던 반 년 전쯤의 어느 술자리에서였다. J는 나를 앞에 두고 불쑥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아직 모르지? 그 선배 지금 미국에 가 있어.”
“미국…?”
“응. 벌써 몇 달 됐다는데, 나도 엊그제에야 알았어. 요새 넘쳐나는 게 국내 박사들이잖아. 그래서 아예 미국에서 학위를 따겠다고 나갔다던걸.”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하지만 원래 K선배는 대학원에서 전공을 바꿨잖아?”
“누가 아니래. 듣자니까 이제 겨우 랭귀지(language) 코스를 다닌대. 결국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셈이지. 참 나…. 황당한 얘기야.”
말 그대로 그것은 황당한 소식이었다. 차은정, 순간 나는 그녀의 이름부터 떠올렸다. J가 혀를 차댔다.
“은정이는 아예 따라가지도 못했다더군. K선배도 그렇지 마누라랑 아이까지 있는 판국에 지금 와서 뭘 어쩌겠다는 걸까? 은정이한테는 애 키우라고 회사까지 그만 두게 시켰었다던데.”
“그럼…. 그럼 어떻게 되는 거지?”
내 멍한 질문에 J는 무심한 목소리로 대꾸하고 있었다.
“어떻게 되기는, 먹고 살아야 하는데 은정이라고 별 수 있겠어? 애도 친정에 맡기고 얼마 전부터 도로 조그만 회사에 취직을 한 모양이야. 최소한 몇 년 동안은 남편 뒷바라지하면서 혼자 버텨야 할 테니까…. 하여간 그 기집애만 안 됐어. 결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졸지에 독수공방까지 하고 있으니 말이야.”
무능-내가 K선배에게 가질 수 있는 감정이란 끝내 그것밖에 없었다. 애꿎은 술잔만 만지작거리는 나를 향해 J가 넌지시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며칠 전에 은정이하고 전화통화했었다. 걔가 너 요새 어떻게 지내느냐고 묻더라.”
나는 이마를 찡그린 채 녀석을 바라보았다.
“이건 뭐 순전히 내 짐작이지만, 은정이도 한번쯤은 보고 싶어하는 눈치인 것 같던데…. 옛날 오해도 풀 겸 만나보지 그래?”
반(半) 농이라는 양 어깨를 으쓱거리는 J였다. 하지만 어렴풋 묘한 예감을 느끼면서도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오빠.”
효미가 방문을 열었을 때, 나는 미처 컴퓨터를 끄지도 못하고 있었다. 다행히 문가에 멈춰 선 그녀는 방 안으로 들어서지 않았다. 가녀린 한숨소리가 들려 왔다.
“또 채팅하고 있었어요?”
나는 돌아보지 못한 채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매일밤의 행사는 끝났지만 등 뒤의 효미에게는 대화방에 접속한 모니터 화면이 고스란히 보이고 있을 게 분명했다.
“우리 얘기 좀 해요, 오빠.”
그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솔직하게 말해 주세요. 제가 싫어지신 거예요?”
“무슨…, 뜻이야?”
“저번에도 말하려고 했지만 참았어요. 제가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세요? 요즘 오빠가 밤마다 무얼 하시는지 저도 다 알고 있어요.”
나는 그제야 흠칫거리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효미는 화를 내고 있었다.
“오빠가 다른 여자를 좋아하고 있는 거라면 차라리 낫겠어요. 하지만….”
애써 감정을 억누르듯 그녀의 어깨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제 스스로가 한심스럽게 느껴져요. 사람도 아닌 컴퓨터에 대해서까지 질투하고 있는 제 자신이 너무 한심스러워요.”
설마 효미가 나의 행위까지 눈치챘던 것일까. 알 수 없었다, 이윽고 방문이 닫히더니 현관을 나서는 발걸음 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텅 빈 방안을 둘러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효미 때문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정사 이후에 으레 찾아드는 허탈감과도 조금은 다른 기분이었다.
아쉬웠다. 그랬다. 이미 나는 무엇엔가 중독되어 있었다. 하지만 내가 중독된 대상은 효미의 짐작처럼 컴섹이나 채팅이 아닌, 바로 미지의 ‘그녀’ 자체였다.
효미는 그날 밤 오피스텔에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