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외국인들은 우리나라를 그물코 사회라고 불렀다. 혈연-지연-학연으로 촘촘히 얽힌 그물코에 하나라도 닿지 않으면 발붙이기 쉽지 않은 네트워크 사회라는 얘기다. 최근 몇 년간 우리나라에선 ‘호남’이란 그물코가 가장 ‘약발’이 컸던 것 같다. 정관계의 세력판도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재계에서 김대중 정부 들어 호남 출신의 경영인들이 상대적으로 약진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는 매해 상장회사 경영인명록을 펴내고 있는 상장사협의회의 자료에서도 확인된다. 지난달 말 나온 <2002 상장회사 경영인명록>에 따르면 국내 증권거래소에 상장된 회사는 모두 6백69개사에 등기임원은 모두 4천8백64명에 달한다.
올해의 특징은 지난해 4위였던 호남인맥이 3위로 올라섰다는 점이다. 올해 상장 회사 등기임원들을 출신 지역별로 나눠보면 서울 및 수도권(1천5백77명, 34.6%)-영남권(1천3백64명, 29.9%)-호남권(4백59명, 10.1%)-충청권(4백14명, 9.1%) 순이 된다.
호남 출신이 상대적으로 약진했다는 것을 알기 위해선 지난 몇 년간의 통계를 들춰보면 된다. 90년대 이후 상장회사 등기임원수는 줄어드는 추세다. 때문에 절대적인 수만 갖고선 특정 지역 출신들이 많아졌는지 줄어들었는지 알 수 없다. 대신 상대적인 비율로 특정지역 출신이 이전보다 중용되고 있는지 여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호남 출신 경제인들은 상장회사 임원수가 줄어드는 추세에도 그 비율이나 절대적인 수가 모두 늘어나는 파워를 보여줬다. 이는 2001년 통계와 2002년 통계에서도 드러난다. 2001년도 출신지역별 통계를 보면 서울(34.8%)-영남(30.2%)-충청(9.6%)-호남(9.5%) 순이었다. 이러던 것이 올해 다른 지역은 모두 그 비율이 감소했음에도 호남지역만 늘어나면서 호남권이 3위권으로 올라서면서 충청을 밀어낸 것.
서울-영남-충청-호남 순의 상장사 임원들의 출신지별 지역분포는 3공화국 이래 굳어진 순서였다. 지난 96년 2월 경제주간지인 <이코노미스트>가 30대 그룹 임원 5천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를 보면 90년대 중반에도 대기업 임원들은 서울-영남-충청-호남 순이었다.
당시 조사에서 서울 및 수도권(37.5%)-영남(34.2%)-충청(10.7%)-호남(7.9%) 순이었다. 그러던 것이 김대중 정부 집권 5년 동안 재계에서 차지하는 호남인맥이 10%대로 늘며 재계의 3대 인력공급풀로 부상한 것.
특정지역 인맥의 부상은 상장회사협의회가 작성한 97년도 출신고등학교별 현황과 2002년 출신고등학교별 현황을 비교하면 더욱 두드러진다. 출신 고등학교는 출신 대학보다는 더욱 지역색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지난 5년간 호남 지역 출신들의 득세를 더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상장사협의회가 발표한 지난 97년도의 출신고등학교별 임원 분포 상위 25개 학교를 보면 경기고 경복고 서울고 등 서울지역 14개 고등학교 출신들이 31.62%를 차지했고, 이어 영남의 경북고 부산고 경남고 등 8개 학교가 14.97%, 호남의 광주 제일고, 전주고 등 2개 학교가 2.45%, 충청권의 대전고가 2.19%를 차지했다.
이러던 것이 2002년 통계에선 서울 지역 경기 경복 서울고 등 14개고가 25.2%, 경북 부산 경남 등 영남지역 8개고가 13%, 광주제일고 전주고 광주고 등 호남지역 3개고가 3.82%, 충청권의 대전고가 1.64%를 차지한 것.(동률에 의해 모두 27개교)
97년과 2002년을 비교했을 때 소위 명문고라 불리는 고등학교 출신들 임원을 놓고 보더라도 서울권이나 영남권 충청권은 모두 절대적인 수나 비율에서 줄었지만 호남권 고등학교는 반대로 절대적인 수(1백53명→1백74명)로 보거나 비율(2.45%→3.82%)로 봐도 모두 증가한 것. 97년 25위권 밖이던 광주고등학교가 2002년 순위에 들어가고, 97년 17위였던 광주 제일고가 9위로, 23위였던 전주고가 13위로 뛰는 등 소위 호남권 명문고의 상장사 임원 진출 현황을 보면 현 정부 들어 호남 출신 재계 인사들의 약진이 더욱 실감난다.
물론 호남 출신은 전체 상장사 임원 중 10.1%에 불과하고 영남 출신들은 29.9%로 세 배에 가깝다. 그럼에도 호남 출신들의 약진이 더욱 도드라져 보이는 것은 충청권이나 강원도, 제주도 출신 경영인맥 비율이 여전히 미미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정계의 정권 교체는 97년 말 이뤄졌지만 2002년에나 와서야 그 여파가 반영되고 있는 셈이다. 지난 5년간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오는 12월 대선에서 다음 5년간 재계 인맥 지도를 바꿀 중요한 변수가 결정된다. 2007년 상장사 협의회 통계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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