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서울올림픽 당시 개막식에 등장한 노태우 대통령 내외. 납북 월북 작가들의 책이 해금되는 등 출판계의 ‘해빙’ 분위기는 그러나 그 다음해 바로 국가보안법이라는 ‘한파’를 만나 꽁꽁 얼고 말았다. (아래)북한에서 나온 <조선전사> 11~15권. | ||
1987년의 6월항쟁 후에 출현한 노태우정권은 온 국민의 민주화 열기를 거스를 수 없어서 잠시 겉으로나마 유화책을 쓰는 듯했다. 그런 중에 북한도서나 납북·월북자의 작품의 해금방침도 묻어 나왔다.
그러나 금서출판 해금의 새 지평은 잠시 보이는 듯하다가 사라졌다. 정부는 북한 원전의 출판에 대하여 압수, 판금, 구속, 처벌로 되돌아가서 군사압제의 본색을 드러냈다. 이번에 다루는 <조선전사>와 <해방조선>의 원전출판사건을 통하여 민족동질성 회복과 학문의 자유를 얽어매는 국가보안법의 사슬을 점검해본다.
<조선전사> 출판 강병선씨
강병선. 원광대학교 독문학과를 나오고 자유실천문인협의회(민족문학작가회의의 전신) 편집간사, 실천문학사 편집장을 역임한 그는 1988년 9월 ‘푸른 숲’이라는 출판사를 아내 명의로 등록, 실질적 대표자로서 출판업을 시작했다.
신생 출판사로서 뭔가 종래의 출판도서와 다른 성격의 책을 내고자 고심 끝에 북한에서 나온 역사서를 원전으로 출판하기로 했다. 마침 실천문학사에 근무할 때 우연히 입수하게 된 <조선전사> 복사본이 있어서 이것을 출판했다. <조선전사>는 북한 역사학계가 총력을 기울여 저술·완간한 총 33권의 방대한 역사서였다. 강씨는 그 중 제11권에서 제15권까지 5권을 중세 1, 2, 3, 근대 1, 2로 하여 간행하였다(1988년 11월).
학계와 언론에서는 북한 학술서의 원전 출판을 반기는 분위기였으며, 전향적인 변화로 받아들였다. 그 무렵 노태우 정부는 북한서적 내지 ‘금서’에 대한 통제를 완화하는 듯한 기미를 보인 바도 있었다. 1987년 6월 항쟁 후의 사회 분위기도 작용하였다. 1988년 7월 정부는 납북·월북 작가의 해방 전 문학작품의 출판을 허용하였고, 이어서 10월에는 1948년 정부 수립 이전에 공표된 납북·월북 작가들의 순수한 음악·미술 작품의 공개·공연을 허용한다고 발표했다. 뿐만 아니라, 북한 및 공산권 자료를 전국의 특수자료 취급인가기관(1백여 곳)에서 일반인도 열람할 수 있게 하였다.
출판계에서는 북한 원전 간행이 새로운 흐름을 이루어 <조선통사> <조선문화사> <근대조선역사> 같은 책을 서점에서도 볼 수 있게 되었다. 학문의 자유, 출판의 자유, 북한 바로알기 등에 획기적인 해금(解禁)이 온 듯싶었다.
그러나 경칩(驚蟄)이 온 줄 알고 지상으로 튀어나온 개구리는 엄동한파와 부딪혀야 했다. 강병선씨는 다음 해(1989년) 3월28일 서울시경 대공분실로 연행된 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해 5월11일 서울지검 이춘성 검사는 강씨를 구속 기소한다.
공소장에 따르면, 위의 <조선전사>는 “마르크스 레닌주의 유물사관에 준거한 소위 김일성의 주체사관에 입각하여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우리나라 근대사를 서술한 북한의 선전책자”이며, 미국을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통치를 지지한 민족의 원수라고 규정하여 왜곡된 반미 시각을 갖게 하는가 하면, 서재필·이승만을 매국노, 친미 분자로 매도하고 각종 역사적 사실을 과격한 반미 시각으로 표출하는 한편 근대조선의 결혼예식, 탈놀이 등의 문화, 풍습조차 주체사관에 입각하여 왜곡 평가하는 내용이라서 용공서적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공소사실에 대해서 강씨는 법정에서 완강하게 맞섰다. ‘우리나라 역사는 남북의 민족이 공유해야 할 역사이기 때문에 북한에서의 역사 서술이 어떠한지를 알고 연구하는 것이 통일을 위해서나 학문의 연구·발전을 위해서 매우 중요하다. 노대통령도 ‘7·7선언’에서 북한이 민족공동체의 일원임을 강조한 이상 북한 원전의 출판은 더욱이나 필요하며 또 허용되어야 한다. <조선전사>의 원전은 통일원 열람실에 가서 신청하면 일반시민도 열람할 수가 있다. 피고인 자신도 거기 가서 <조선전사> 제1권을 열람한 적이 있다. 만일 그 책을 읽게 하거나 소개하는 것 자체가 범죄라면 정부가 그렇게 열람을 허용할 리가 없다.
일본의 한국에 대한 식민지지배를 미국이 양해한 것은 남한의 역사서에서도 언급되어 있는 사실이다. 서재필·이승만에 대해서는 심지어 민족진영 내부에서도 매도하는 견해가 있다. ‘<조선전사>를 펴내면서’에서 “6·29 항복선언은 그 문맥에 맞는 실질적인 자유와 권리를 현실화시키는 것이 뒤따라야만 6월 민주투쟁도 값있는 것으로 안다”고 쓴 것은 너무도 당연한 말이 아닌가.’
위와 같은 강씨의 주장은 역사학계의 공론에 의해서도 뒷받침되었다. 앞서도 말했듯이 이 사건 출판 후 학계, 언론계, 출판계에서는 북한역사서의 원전 개방은 바람직한 일이라며 높이 평가하는 반응이 나왔고, 남한 사학계의 일반적 견해와 비교하면서 활발한 논의가 전개되었다.
뿐만 아니라, 역사학 전문지 <역사비평> 88년 겨울호에는 바로 이 <조선전사> 33권의 총 목차가 실렸으니, 그만큼 학문연구의 자료가치가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심지어 국사편찬위원회는 강씨가 구속중이던 1989년 1월18일부터 이틀 동안 한국사 학술회의를 열고 <조선전사> 33권을 중심으로 하여 ‘북한의 한국사 서술 동향과 분석’이라는 주제로 대토론을 벌인 일까지 있었다. 만일 <조선전사>의 출판이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면 사학계의 그와 같은 공개적이고 진지한 반응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강씨로서도 그런 책의 출판이 반국가적이라는 인식을 조금도 하지 않았으며, 다만 혹시라도 있을 과민 반응을 생각해서 원전에 있는 김일성의 교시 인용부분을 삭제하는 신중함을 보였던 것이다. <조선전사>의 서술방법이나 서술내용을 긍정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것을 소개하는 뜻에서 출판을 했을 뿐이었다.
강씨가 구속된 채로 1심 재판이 시작되자 사회 각계에서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정부, 북한자료 개방’ 의지 의문”, “정치 선전물과 동일시 말아라” “북한 원전 압수 찬바람” 등의 기사 제목이 그런 중론을 대변하고 있었다.
고려대 강만길 교수는 당시 담당 재판부에 낸 소견서에서 “북한측의 역사 해석 및 서술이 일정한 역사관에 너무 편중된 점이 있다 하더라도 이제 출판을 금지하는 방법으로 대응하는 단계는 넘었다고 생각되며, 어디까지나 학문적 차원의 고증과 해석을 통해 해결하는 것이 순리요, 효과적이라 생각된다”라고 견해를 밝혔다.
강씨는 그 해 6월29일 선고된 1심 판결에서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 집행유예 2년이란 형을 받아 그대로 확정되었다.
▲ 1988년 재발행된 <해방조선> Ⅰ~Ⅱ. | ||
이재선씨가 대표자로 있던 출판사 ‘과학과 사상’에서 <해방조선> Ⅰ, Ⅱ를 발행한 것은 1988년 5월30일, 그리고 그가 서대문경찰서에 구속된 것은 그 해 10월31일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 책이 출판되어 전국 서점에서 공공연하게 판매되고 나서 7개월 동안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이에 무슨 사단(事端)이 끼어들었기에 반년도 훨씬 뒤에야 문제를 삼았는가. 거기에는 ‘도서잡지윤리위원회’의 심의·결정이 그야말로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이 <해방조선>은 박헌영, 이강국 등이 주도했던 ‘민주주의 민족전선’(민전)에서 해방 후 1년 동안 조선에서 일어난 제반 사건·정세를 정리하여 1949년 10월 <조선해방연보>라는 제호를 붙혀 발간되었던 것인데, 이씨는 거기에 어구 수정만 하는 정도의 손질을 하고 원문대로 간행을 했다.
그 제1권에는 일지, 정세, 정당 사회단체의 활동 개요 등이 수록되어 있고, 제2권에는 경제, 사회, 노동, 토지개혁, 문화 등 사회 각 분야의 실태를 민전의 시각에서 당시 이북의 시책과 대비하여 서술한 것이었다.
그런 서적을 남한에서 간행했으면 즉각 국가보안법의 철퇴를 맞을 법도 한데,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을 감행한 이재선씨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는 당시 대학을 막 졸업한 26세의 청년이었다. 1981년 고려대 사학과에 들어갔다가 그 다음해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된 전력도 있다. 1986년 10월부터 1년 남짓한 동안 도서출판 ‘실천문학사’에서 일한 적이 있으며, 87년 2월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다음 해 4월부터 3개월 동안 도서출판 ‘과학과 사상’ 대표직을 맡았다.
그는 사회과학분야의 책을 많이 읽었다. 송건호 <한국민족주의의 탐구>, 박현채 <민족경제론>, 강만길 <해방전후사의 인식>, 김수행 <정치경제학 원론>, 조용범 <후진경제론> 등 공소사실에 열거된 것만 보아도 이씨의 성향을 쉽게 알 수 있다. 검찰은 이 같은 이씨의 독서 경향이나 전력을 견강부회하여 전가의 보도인 ‘색깔론’을 폈다.
그 무렵 검찰은 “북한의 실상을 프롤레타리아 혁명적 관점에서 찬양했다”는 이유로 재미교포 홍동근 목사의 북한방문기 <미완의 귀향>을 압수하고 발행인을 구속했다.
<해방조선>은 8·15해방 직후의 역사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자료집으로 학계에서도 평가하고 있는데, 어떤 기준과 근거에서 하루 아침에 ‘이적 표현물’로 둔갑하게 되었을까. 거기에는 앞서 본대로 도서잡지윤리위원회라는 데서 “위 도서에 대하여 관계당국에 제재를 건의한다”는 결정을 한 것이 사건화의 도화선이었다. 도서잡지윤리강령 및 도서윤리실천요강을 위반했다는 것인데, 결정의 ‘이유’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다.
“위 도서는 해방 직후 혼란기에 좌익단체인 ‘민주주의 민족전선’에서 편집한 연감으로 남한도 북한과 같은 사회주의 노선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공산주의자들의 일방적 주장을 천명한 내용이기 때문에 현 시점에서 청소년 독자들이 비판없이 읽을 경우 편향된 역사의식을 갖게 될 우려가 있으므로 도서잡지윤리강령 제1항 ‘건전성’ 및 도서윤리실천요강 제2항 ‘국가안보’ 등에 저촉된다고 인정, 주문과 같이 결정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청소년들이 비판 없이 읽을 경우’를 가상하여 재제를 건의한다는 대목이다. <해방조선>은 청소년 도서가 아니라 ‘민전’이라는 정치단체가 만든 연보라서 어른도 아무나 읽지 않을 책인데, 하물며 청소년들이 그것을 읽을 경우를 가정하여 건전성과 국가안보를 내세우다니 그 ‘우국충정’과 상상력에 그저 놀랄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