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의 추억’에 생사람 끼워 ‘재생’
▲ 기억 지운 공포 강간 피해자는 공포 때문에 범인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고 한다. 영화 <프레디VS제이슨>의 한 장면. | ||
사실 이 사건은 이씨와 전혀 관련 없는 사건이었다. 평범한 젊은이였던 이씨는 강도·강간을 하지 않았음에도 피해자들의 진술에 의해 공소가 제기돼 1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뒤 항소심에서야 누명을 벗을 수 있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항소심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실제 강도를 저지른 것으로 보이는 제2의 용의자를 체포했음에도 검찰이 이씨의 강간과 특수강도 혐의에 대한 공소사실을 유지했다는 사실이다.
먼저 사건 피해자들의 진술 등을 토대로 당시 작성된 검찰의 공소장을 보자. 공소 사실에 따르면, 범행은 2002년 5월6일 오후 2시께 일어났다. 첫 피해를 당한 여성은 최아무개씨(23)였다.
범인(피고인 이씨)은 서울 구로2동의 일반주택 2XX호에 사는 최씨 집에 은밀히 침입했다. 범행 대상을 노리던 중 최씨의 집 문이 잠기지 않은 사실을 발견한 것이었다. 범인은 거실에 있는 최씨를 발견하고 뒤에서 한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고, 다른 한 손으로는 허리를 끌어안았다.
뒤이어 범인은 방으로 최씨를 끌고가 침대에 엎드리게 한 뒤 이불로 최씨의 얼굴을 뒤집어씌웠다. 그리고는 예리한 도구로 이불 위를 가볍게 찌르는 방법으로 최씨를 위협한 뒤 최씨 뒤에서 성폭행하고 지갑에서 15만원을 훔쳐 달아났다.
2시간 뒤 범인은 인근 다세대주택 1층에 나타났다. 이번에는 잠긴 문을 도구를 이용해서 열어 젖힌 뒤 주방에 있던 과도를 꺼내들고 갈취할 물건을 물색했다. 그러다 방 안에 놓인 이아무개씨(여·22)의 가방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현금 15만원과 신용카드, 지갑, 휴대폰 등을 꺼냈다.
그 뒤 범인은 방안에서 잠을 자고 있던 이씨를 목 뒤에서 흉기로 위협해 추가로 금품을 요구하고 강간하려 했다. 그러나 이씨가 ‘곧 남자친구가 집으로 올 것’이라고 하자 범인은 부리나케 줄행랑쳤다는 게 검찰의 공소 사실이다.
사건 당시 강도·강간 피해 신고를 접수한 경찰은 피해자들이 진술한 인상착의와 비슷한 젊은 남성 이씨를 피해자들의 집 주변 골목길에서 발견했다. 그 뒤 이씨는 유력한 용의자로 몰리게 됐다고 한다. 출석 통보를 받고 7월9일 경찰서로 자진 출석한 이씨는 줄곧 범행을 부인했다. 그러나 몇몇 수사관들이 “네가 죄를 지었다는 내용으로 ‘반성문’만 쓰면 구속하지 않고 내보내 주겠다”고 회유하자 엉겁결에 범행을 시인하는 글을 남기고 말았다.
하지만 경찰과 검찰은 ‘약속’과는 달리 그를 법정까지 내몰았고, 결국 검찰에 기소된 이씨는 뒤늦게 후회하면서 범행 사실을 극구 부인했다. 그러나 2002년 10월 1심에서 이씨는 징역 6년의 중형을 선고받고 말았다.
항소심이 진행중이던 2002년 11월 특수강도 등의 혐의로 강아무개씨가 긴급 체포되면서 상황은 반전된다. 증거품으로 압수된 강씨의 가방 안에서 강도를 당했다는 피해 여성 이씨의 주민등록증이 발견된 것.
뒤이어 강씨가 강도 범행을 자백하면서 수사를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할 상황이 돼 버렸다. 그러나 검찰은 이때까지도 피해자들이 같은 동네에서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에 비춰 두 사건이 동일범의 소행이라는 확신을 버리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이씨에 대한 강도 혐의와 최씨에 대한 강간 혐의가 담긴 공소 사실을 그대로 유지했다.
이씨가 억울한 누명을 계속 뒤집어쓸 가능성이 다분했으나 2심에서 판결은 결국 뒤집히고 말았다. 2003년 2월12일 서울고등법원 형사6부(박해성 부장판사)가 “피해를 당한 여성들의 진술에 신빙성이 없다”며 이씨 혐의에 대해 모두 무죄를 선고한 것이었다. 당시 재판부는 “객관적 증거 없이 신빙성을 부여하기 어려운 피해자의 진술을 그대로 받아들여 유죄로 인정한 원심은 ‘증거의 가치판단’을 그르친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 부장판사의 단호한 결정에 검찰도 상고를 포기하여 이 사건은 무죄로 확정됐다.
결과적으로 피고 이씨는 반 년 넘게 억울한 옥살이를 해왔던 셈이다. 그렇다면 피해여성들이 무고한 이씨를 ‘범인’으로 여겼던 까닭은 무엇일까. 여기서 이씨가 범인으로 지목된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경찰은 수사 초기에 유력한 용의자로 이씨를 지목하면서 이씨 집 앞에서 잠복근무를 했다고 한다. 잠복중 피해자 이양에게 이씨의 모습을 확인시켰더니 이양이 “범인이 맞다”는 진술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곧바로 경찰은 이씨를 불러 사진을 찍은 뒤 또 다른 피해자 최씨에게 이 사진을 보여주었다. 역시 최씨에게서도 “그렇다”는 진술이 나왔다. 삼자대면에서도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경찰은 이씨를 범인으로 확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뒤늦게 또 다른 피의자 강씨가 검거된 상황에서 경찰이 강씨를 두 피해자에게 대면시키자 한결같이 “전혀 모른다”는 진술을 했다고 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대부분 강간 사건 피해자는 매우 긴박하거나 위험한 상황에서 범행을 당하고 상황을 목격한다. 그렇기 때문에 피해자들은 범행 당시 각종 스트레스와 긴장, 불안, 공포 등 정서적 동요를 경험하게 된다. 법심리학적으로 보면, 심리적으로 불안한 상황에서는 시야에 근접한 사물에 대해 집중력이 떨어져 범인에 대한 결정적인 정보 입수에 대부분 실패한다.
▲ 기억의 변질 강간 피해자는 또 수사진의 잘못된 용의자 제시에 쉽게 수긍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사진은 영화 <살인의 추억>의 한 장면. | ||
특히 강간 피해자 최씨는 범인이 자신을 범하는 등 꽤 오랜 시간 집에 머물렀음에도, 범인의 외관상 특징을 기억하지 못한 채 오로지 용의자 사진만 보고 범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결과적으로 경찰이 보여준 용의자의 사진에서, 범행 현장에서 본 범인의 인상보다 더욱 또렷하고 명료한 자극을 받은 것이다.
게다가 최씨는 이미 이양에 의해 용의자로 간주된 이씨의 사진만 제시받았다고 한다. 용의자를 하나로 압축한 경찰의 무언의 암시가 현장의 범인을 대신하게 된 것이다.
미국에서는 강간 등의 피해자가 수사관의 주관적인 수사 절차에 이끌려 범인의 인상이나 특징을 잘못 진술하는 사례를 막기 위해 특별한 지침이 마련돼 있다. 지난 99년 만들어진 미국 법무성 지침에는 피해자나 목격자의 진술을 듣는 수사관들이 지켜야 할 규정이 제시돼 있다.
이 지침은 4가지 절차적 요건을 골자로 한다. ▲목격 진술을 받아내는 수사관의 요건 ▲피해자나 목격자에 대한 수사관의 지시 요건 ▲용의 인물(혹은 사진)의 구성 요건 ▲피해자 확신에 대한 요건 등이 그것이다.
하나씩 자세히 설명하면, 목격자로부터 진술을 받아내는 수사관은, 사건의 용의자로 제시된 인물(사진) 중 사건 담당 수사관들이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간주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수사관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 3의 수사관이 목격자 진술을 받고 객관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수사관은 진술을 받기에 앞서 목격자에게 제시되는 인물들 속에 진범이 포함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전제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목격자에게 누군가를 반드시 용의자로 지목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경찰은 유력한 범인으로 지목하는 용의자의 두드러진 특징이 제시된 사진 등을 피해자가 범인을 지목하기 전에 반복적으로 보여주어서는 안 된다. 목격자나 피해자가 범인을 지목한 직후 지목 인물에 대한 추가 정보를 다시 보여주기 전에 목격자로 하여금 자신이 확신한 정도를 명백히 표시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도 수사관들이 지켜야 할 요건이다.
일반적으로 범인을 처음 지목할 당시 느끼는 확신감보다 법정에서 나타난 확신감이 월등히 높을 경우, 목격자나 피해자 진술은 신뢰성이 없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법심리학적 근거와 지침의 내용이 일맥상통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지침은 ‘무기효과’(weapon effect)라는 심리학적 현상의 중요성을 집중 부각시키고 있다. ‘무기효과’란 범행을 당하는 피해자들이 무의식적으로 범인이 들고 있는 총, 칼 등의 무기나 흉기에 대해서만 기억이 또렷이 남는 현상을 말한다.
이씨 사건의 경우에도 피해자들은 흉기의 모양과 크기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고 한다. 흉기 자체가 가져다준 두려움 등이 범인의 또 다른 외관상 기억을 제한한 셈이다.
피해자 이씨는 범인이 들고 있던 칼에만 정신이 쏠려 범인의 인상이나 신체상 특징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이불이 씌워진 채 뒤에서 강간을 당했던 최씨도 범인이 들고 있던 흉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릴 틈조차 갖지 못했던 것이다.
이 강간 사건은 무고한 사람이 범인으로 둔갑하는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수사 시스템, 특히 피해자 진술에 대한 더욱 철저한 검증 절차가 필요하다는 또 하나의 교훈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