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 수렁속 발버둥
▲ 영화 <공공의 적2>의 한 장면을 그래픽 처리한 이미지. | ||
법조계에서는 대표적인 사례로 지난 2001년 발생한 강원도 속초 40대 남자 피살 사건을 꼽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사건은 피고인들의 허위 진술에 따라 수사 기관이 가공해낸 사건이다. 다른 강도 혐의로 붙잡혀 조사를 받던 20대 남성 세 명이 경찰의 유도 신문과 회유를 못 이겨 속초에서 40대 남자를 피살하고 암매장했다고 허위 진술했다가 되레 살인 및 사체 유기 혐의 용의자로 몰려 1심에서 무기징역 등 중형을 선고받은 사건이었다.
사건이 발생한 시점은 지난 2000년 6월. 강원도 속초의 H콘도에서 40대 남자가 피살됐다. 이 남성을 살해한 것은 20대 남자 세 명. 이들이 40대 남성을 미행하다 이 남자가 콘도 3층 객실로 들어서자 “콘도 직원”이라며 벨을 누른 뒤 남자가 문을 열자 미리 준비한 흉기로 복부를 찌른 것. 40대 남성과 함께 있던 여인은 소화기로 머리를 내려쳐 실신시켰다. 곧바로 이들은 정신을 잃은 40대 남자를 5층 옥상으로 끌고 간 뒤 밑으로 떨어뜨려 숨지게 했고, 시신을 인근 공동묘지에 묻었다.
이것이 경찰에서 정리한 속초 사건의 주요 내용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어디까지나 경찰이 만들어낸 가상의 사건이었다.
경찰이 이 같은 사건 스토리를 ‘창작’한 것은 2001년 10월의 일이었다. 경찰은 이 무렵 강도 혐의로 검거된 황아무개씨(당시 20세·무직)와 이아무개씨(당시 23세·노무자)의 여죄를 추궁하다 이들에게서 “속초 콘도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시체를 암매장했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뒤이어 이들이 공범으로 지목한 방아무개씨(당시 26세)를 구속한 경찰은 이들을 집중 추궁, 발생하지도 않은 속초 살인 사건의 각본을 하나둘씩 짜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에 “H콘도 주변 공동묘지에 시신을 암매장했다”는 이들의 진술대로 실제 11월18일 그 공동묘지에서 40대 남성의 변사체가 발견되는 영화 같은 일이 벌어지면서 경찰은 20대 남성 3명이 유흥비를 마련하기 위해 실제 속초 H콘도에서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결국 검찰도 그해 11월 이들 3명을 살인 및 사체 유기 혐의로 구속, 기소하기에 이르렀다. 더구나 검찰은 2000년 6월 범행을 했다는 경찰 조서 내용을 바꿔 이들이 2001년 7월 범행을 저질렀다고 공소 기록에 기재했다. 나중에서야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들 3명 모두 2000년 6월 교도소에 있었기 때문에 검찰이 시점을 고쳤던 것이다. 결국 1심 재판부인 속초지원은 검찰의 공소 사실을 받아들여 이씨에게 무기징역, 황씨에게 징역 20년, 방씨에게는 징역 7년을 선고했다.
그러나 항소심을 맡은 서울고등법원 형사5부(당시 재판장 전봉진 부장판사)의 판단은 달랐다. 2003년 1월28일 재판부는 원심 판결을 뒤집고, 피고인 3명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린 것이다.
오히려 재판부는 “공소사실만으로는 범행 일시, 장소, 방법 등 어느 하나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소설과 같은 사건”이라며 검찰과 1심 재판부를 향해 쓴 소리를 내뱉었다. 그 해 5월에는 검찰의 상고도 기각시켰다.
재판부는 ▲범행 시점은 여름임에도, 묘지에서 발견된 시체는 겨울 점퍼가 걸쳐져 있었고 또한 백골 상태인 점 ▲묘지에서 발견된 시체를 감정한 국립수사연구소와 서울대, 고려대 의대가 시체의 부패 시작 시점이 1년 전이라고 결론내린 점 ▲살해당했다는 피해자의 차량이나 남은 물건, 미반납 열쇠 등이 발견되지 않은 점 ▲피해자가 콘도 5층 옥상에서 떨어져 숨졌다는 피고인들의 진술과 달리 실제 묘지에서 발견된 시체에서는 골절 흔적이나 칼로 찔린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 ▲피해자들로부터 갈취한 반지와 목걸이를 처분했다는 상점 등에서 그 장물이 발견되지 않은 점 등을 주목했다.
또한 재판부는 사체가 발견된 지점과 근접한 곳에 깊이 1m, 직경 5m 크기의 웅덩이가 있었다는 경찰 현장 검증 결과 기록과 관련, “범행을 저지른 사람은 누구건 간에 당시 급박한 상황에서는 땅을 파기보다는 기존의 웅덩이를 사용했을 것”이라며 현장 정황과 범행 스토리가 상식적으로 들어맞지 않는다는 의문도 함께 제기했다.
또 피고인들이 진술한 유기 지점에서 경찰이 여러 차례 사체를 발견하지 못하다가 황씨, 이씨가 다른 사건으로 검찰에 송치된 이후 변사체를 발견하게 된 점도 피고인들이 시신을 암매장했다고 단정지을 수 없는 정황으로 해석했다.
특히 재판부는 피고인 3명이 일반인들보다 ‘지적 수준’이 낮다는 점에서 이들의 진술을 토대로 작성된 검찰 공소 기록의 신빙성에 강한 의문을 제기했다. 실제 황씨는 초등학교 졸업자로 특히 인지 능력이 상당히 떨어졌고, 방씨는 정신지체 장애인이었다. 방송통신고를 졸업한 이씨의 경우 상대적으로 나은 편이었으나, 그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채 교도소에 들락날락하면서 심각한 정신 장애를 앓고 있었다. 이러한 피의자들의 진술이 그대로 공소 기록에 옮겨졌다는 점에서 선뜻 유죄를 내리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 피의자 황아무개씨는 검거 전날 본 영화 <세이 예스>의 장면을 그대로 진술하기도 했다. <세이 예스> 포스터. | ||
밤샘 조사와 허기, 각종 고문 등의 위협을 견디지 못한 황씨가 허위 진술을 하고 만 것이다. 여기에 강압 수사에 버거워하던 이씨 역시 3일 후에 범행 자백을 하고, 두 사람이 엉겁결에 공범이 되어 버리자 수사는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황씨가 “이씨가 당신(황씨)이 사람을 죽였다고 하더라”는 경찰의 유도신문에 “이씨가 죽였다”고 발끈하면서 소설 같은 범행 사실이 계속 추가됐다.
결국 살인 누명을 뒤집어쓰게 된 이씨와 황씨가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연이어 서로에게 불리한 허위 자백을 늘어놓는 사이 조서는 그럴듯하게 꾸며졌다. 이 과정에서 정신장애인인 방씨가 공범으로 구속됐다.
특히 황씨는 어처구니없게도 경찰에 검거되기 전날 본 <세이 예스(Say Yes)>라는 영화 장면을 그대로 진술하기까지 했다. 하는 수 없이 사건에 대해서 진술을 해야 할 황씨로서는 주 무대가 사건이 일어난 속초 H콘도이고, 내용 역시 결혼한 부부가 속초에서 연쇄살인범을 만나는 이 영화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특히 재판부로서는 이들 세 사람이 1심 재판에서 ‘수사 당시 허위 진술을 했다’고 줄곧 항변한 부분을 지나치기 힘들었다. 황씨는 “여죄를 추궁받던 중 ‘이씨가 당신이 사람을 죽였다고 하더라’는 경찰관의 유도신문에 발끈해 ‘내가 아니고 이씨가 사람을 죽였다’라고 자연스럽게 범행 사실을 지어냈다”고 고백했다.
이씨 또한 “고성경찰서에 있을 때 황씨가 먼저 거짓말을 해 나로서도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놨다.
특히 이씨는 “범행을 부인하자 경찰관으로부터 봉으로 1백여 대를 맞고 전기고문 등을 하겠다는 위협을 받아 겁이 나서 범행을 시인했다”며 일부 수사관의 ‘물리적 압력’ 또한 경찰이 원하는 대로 진술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라고 주장했다. 정신지체 장애인 방씨는 두 사람이 이러한 취지로 자백하자 수사 과정에서 덩달아 범행을 시인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공범 사건의 경우, 서로의 책임을 피하고 형량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허위 진술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 이번 사건에서도 경찰의 회유에 넘어가 허위 진술을 하게 됐고, 결국 그것이 되레 자신들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법심리학에서 공범들의 심리 상태를 설명하는 이론 중 하나가 ‘죄수의 딜레마’라는 것이다. 만약 두 사람이 동일한 사건에 연루된 경우, 수사관들은 “두 피의자 중 한 사람이 자백하고 다른 피의자가 자백하지 않는다면 자백한 사람은 수사에 도움을 준 대가로 석방되고, 다른 피의자는 최대의 형량을 받게 될 것”이라고 회유 작전을 펴는데, 이에 대다수 피의자들은 심리적 동요를 일으켜 본능적으로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사건임에도 마치 자신의 범행인 것처럼 구체적으로 자백을 한다는 것이 ‘죄수의 딜레마’ 이론의 골자다. ‘죄수의 딜레마’ 이론에 따르면, 한 피의자의 자백을 지켜본 다른 피의자도 모종의 피해 의식 때문에 자백을 한다.
피의자들이 일체 자백을 하지 않아도 두 공범은 무거운 형을 피할 수 있다. 그러나 법심리학 연구 결과, 공범들은 70% 이상 수사 과정에서 공범들끼리 ‘경쟁적 전략’을 선택하려는 경향이 강하다고 한다. ‘남을 죽여야 내가 살 수 있다’는 생존 법칙이 무의식적으로 그들의 뇌를 지배하고 있는 셈이다.
피의자들이 수사관들의 회유, 압박으로 인해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 본의 아니게 서로를 공범으로 끌어들이고 스스로 소설 같은 스토리를 만들어낸 이번 사건은 ‘죄수의 딜레마’ 이론의 전형을 보여주는 사건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