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줬다”만 믿은 검찰 발등 찍혔다
▲ 사진=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 ||
이처럼 뇌물 사건에서는 특히 뇌물을 공여한 피의자가 혐의를 모면하기 위해 거짓 진술을 하거나 제3의 인물에게 죄를 덮어씌우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한다. 이런 경우, 수사 기관은 대체로 뇌물을 제공한 사람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고 믿는다. 더구나 돈을 받은 피의자가 공여자 진술에 대해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다면 영락없이 ‘코너’로 몰릴 수밖에 없다.
법조계에서는 대표적인 케이스로 92년 발생한 ‘김제시 산업과장 뇌물 수수 사건’과 지난 2003년 ‘월드컵휘장사업 로비 의혹 사건’을 꼽는다. 뇌물 수수 혐의를 받은 공무원이 기소된 두 사건은 뇌물 공여자의 불명확한 진술로 인해 공무원들이 누명을 쓴 사건이다. 결국 수년에 걸친 재판에서 이들이 검찰의 공소 사실을 제대로 반박해 결국 무죄가 선고된 사건이기도 하다.
김제시 산업과장 뇌물 수수 사건은 자동차 정비업 관련 시설 허가 문제가 빌미가 된 사건이다. “시의 중간 간부가 업무 관련 청탁 대가로 돈을 받았다”는 익명의 제보를 받은 검찰은 뇌물 공여자와 수수자를 조사한 끝에 김제시청에서 교통행정 업무를 총괄하던 A과장이 윤아무개씨로부터 직무와 관련해 뇌물을 받았다는 결론을 내리고 A과장을 기소했다. 소환조사 과정에서 검찰은 뇌물 공여자 윤씨의 진술이 신빙성을 갖췄다고 판단한 것이다.
검찰은 A과장이, 김제시에서 92년 1급 자동차정비업 허가를 받은 윤씨로부터 ‘정비업 허가증 발급 및 토지 용도변경 허가와 행정 단속 과정에서 업소를 잘 봐달라’는 명목으로 92년11월23일 김제시 요촌동 S다방에서 2백만원을 받았다며 그를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했다. A과장은 줄곧 혐의를 부인했으나 검찰은 전혀 요동하지 않았다.
뇌물 수수 액수가 2백만원에 불과한 이 사건이 법조계 내에서 회자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사건의 재판이 무려 4년 가까이 진행됐기 때문.
지루한 공방전이 펼쳐진 이 사건은 결국 1심과 항소, 상고심에서 모두 A과장에 대해 무죄가 선고되면서 막을 내렸다.
법원은 세 가지 측면에서 ‘뇌물 공여자’ 윤씨에 대한 수사가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먼저 법원은 윤씨의 진술 오류를 꼬집었다. 특히 법원은 윤씨가 93년 6월24일 전주지검 1차 조사에서 ‘92년 11월24일 오전 10시 A과장에게 2백만원을 주었다’고 진술하는 등 줄곧 뇌물 공여 시점을 바꾸지 않다가 A과장과의 대질심문에서 ‘11월23일에 뇌물을 주었다’고 진술한 점을 주목했다.
또한 ‘A과장이 직접 허가장을 교부했다’는 윤씨의 진술과, 법원에 증인으로 출석한 시 공무원 강아무개씨가 직접 윤씨에게 허가장을 교부한 것으로 진술한 부분이 서로 맞지 않는다는 점도 지적했다.
덧붙여 법원은 윤씨가 A과장에게 돈을 주게 된 동기를 진술한 부분도 뭔가 석연치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윤씨는 줄곧 “시에서 정비업 관련 업무를 담당한 A과장이 나의 일로 수고했기 때문에 돈을 줬다”고 주장했으나 A과장은 실제 농지 변경과 정비업 허가 관련 업무를 맡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실제 윤씨의 토지가 용도 변경된 시점과 정비업 허가가 난 것은 각각 92년 3월28일과 7월25일이었다. 그러나 당시 A과장은 각종 인허가 업무와 관련 없는 기획감사실에 있다가 8월27일에서야 산업과장으로 발령받았다. 법원으로서는 “허가에 대한 수고비 명목”이라는 윤씨의 주장을 선뜻 납득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법원이 결정적으로 무죄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 것은 윤씨가 A과장에게 돈을 건넸다고 주장했던 시점인 11월23일 아침 A과장이 서울로 3박4일 출장을 떠났다는 사실에서였다. 특히 이날 정비공장 개업식을 연 윤씨가 오전에 손님들을 맞은 뒤 동분서주하던 상황에서, 서울로 출장을 간 A과장을 다방에서 따로 만나 돈을 전해주었다는 것은 사실 관계가 매우 어색하다고 본 것이었다.
또다른 예가 지난 2003년 초 정계를 뒤 흔든 ‘월드컵 휘장사업권 로비의혹 사건’이다. 이 사건 역시 현재 대법원 상고심을 남겨두고 있긴 하지만, 뇌물 수수 혐의를 받은 공직자가 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 사건은 2002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2000년부터 3년간 대회기나 로고 등을 각종 사업에 활용하는 이권을 놓고 C사 등 여러 업체가 정치인과 고위 공무원을 상대로 로비를 벌였다는 의혹이 제기된 사건이다.
의혹이 불거지면서 로비에 관련됐을 것으로 지목된 정계 인사만도 약 20여 명에 달했다. 자칫 거대 게이트로 확산될 수 있었던 사건이었다. 그러나 법원은 뇌물을 공여했다고 진술한 당시 C사의 김아무개 사장, G사의 심아무개 사장, K사의 또 다른 심아무개 사장 진술에 신빙성이 없다고 보고 돈을 받은 혐의로 기소된 주요 관계자들에게 무죄를 선고하였다.
▲ 지난 2002한일월드컵 개막식 때 대회 휘장이 입장하고 있다. 1년 뒤 이 휘장은 ‘로비의혹’에 휩싸였다. | ||
공무원인 김 국장의 경우, 2000년 4∼9월 C사 사장 김씨로부터 사업권 유지 청탁 명목으로 네 차례에 걸쳐 8천만원을 받는 등 월드컵 휘장사업 관련 업체로부터 모두 1억1천3백만원을 받은 혐의로 2003년 5월 구속 기소됐다.
김 국장은 1심에서 3천3백만원의 뇌물 수수 혐의가 인정돼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3년, 추징금 3천3백만원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김 사장으로부터 받은 8천만원은 무죄가 선고됐으며 항소심에도 결국 두 명의 심 사장으로부터 받았다는 3천3백만원 수수 혐의까지 무죄가 선고됐다.
법원은 김 국장에게 돈을 주었다는 세 사람의 진술에 문제가 많다고 봤다. 특히 김 사장의 경우, 김 사장이 김 국장에게 돈을 건넸다고 특정한 네 날짜가 모두 뇌물을 주고받기에 적절치 못한 날이라고 지적했다.
검찰 공소 기록상 처음으로 2천만원을 건넨 것으로 기재된 2000년 4월28일은 공교롭게도 김 국장의 환갑날이었다. 법원으로서는 김 국장이 환갑날 김 사장을 만날 이유가 전혀 없었다고 보는 시각이었던 것.
김 사장이 김 국장에게 두 번째로 2천만원을 건넸다고 진술한 시점인 ‘2000년 8월5일’ 역시 법원의 의심을 샀다. 김 사장은 검찰 조사에서 김 국장이 ‘(G사) 심 사장이라는 사람이 폭력배가 아니고 사업가니 안심하고 동업을 해도 좋다’라는 얘기를 전하러 자신을 방문했기에, 그 자리에서 2천만원을 건넸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원은 ‘정몽준 당시 월드컵 조직위원장 지시에 따라 C사(김 사장의 회사)가 유령회사인지를 파악하러 김 사장 사무실에 갔다’는 김 국장의 진술에 무게를 실어줬다. 김 국장이 단지 다른 업체 심 사장 얘기를 하기 위해 전화도 없이 불쑥 찾아갔다는 게 쉬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김 국장이 김 사장을 불시에 찾아갔는데, 김 사장이 그 자리에서 2천만원을 줬다는 것도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는 판단이었다.
김 사장이 지난 2000년 8월18일 월드컵조직위 최아무개 사무총장을 만나고 나오는 길에 김 국장 사무실에 들러서 2천만원을 건넸다는 진술도 법원으로서는 매우 찜찜한 부분이었다. 법원은 2000년 8월 당시 조직위 공문철을 확인한 결과, 김 사장이 최 총장을 방문한 날짜가 8월22일 이후였다는 점을 파악하고 있었다.
김 사장이 9월1일 김 국장에게 마지막으로 2천만원을 제공했다는 검찰 공소 사실에 대해서도 법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법원이 눈여겨본 부분은 김 사장과 김 국장이 식사를 한 이후 지불한 돈의 액수였다. 김 사장이 계산했다는 식대와 실제 식대가 크게 차이가 난다는 것이었다. 김 국장이 9월1일 김 사장을 만난 기억이 없다고 주장한 반면, 김 사장은 이날 H식당에서 김 국장을 만나 한정식을 먹었다면서 식대 4만~5만원을 현금으로 지불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그 식당은 실제 한정식 가격이 1인당 3만5천원이었으며, 손님의 90% 이상이 신용 카드로 계산하는 곳이었다.
식사를 하기 위해 차를 주차했다는 지점도 애매모호했다. 김 사장은 한정식 집에서 식사를 하기 위해 강남 역삼동 이면도로에 차를 주차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 지점은 테헤란로와 직접 연결되는 곳인 데다 인도와 차도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은 곳이었다. 주차를 하려면 인도에까지 진입할 수밖에 없는 곳인 셈. 더구나 법원으로서는 유동 차량이 많은 저녁 시간에 인도와 접한 차도에 승용차를 주차했다는 김 사장의 진술이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G사 심 사장의 경우에도 진술상의 허점이 발견됐다. 특히 그는 2000년 8월27일 골프라운딩을 하고 오후 7시 김 국장의 아파트 부근에서 돈을 건넸다고 주장했으나, 실제 당일 전국적으로 태풍이 몰려와 폭우가 내려 골프장이 다 문을 닫은 사실이 확인되면서 심 사장 진술을 그대로 공소장에 옮긴 검찰도 ‘망신’을 당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