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에 기원 열었다 IMF로 접어…유튜버로 돌아와 프로가 못하는 ‘눈높이 강의’
박영진 아마 7단.
“제대하고 20대 중반부터 대구 시내에서 기원을 열었습니다. 사람들과 많이 만날 수 있는 기원영업이 적성에 맞았어요. 장소와 이름은 세 번 정도 바뀌었습니다. 마지막 기원은 94년에 개업했는데 그해 여름이 유독 더웠고, 에어컨 없이 많이 고생했기에 특히 기억에 남아요. 기원에서 만난 사람들이 인연이 되어 95년부터 도서관, 초등학교, 문화센터 등에서 바둑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인원이 꽤 많아서 바둑강의로만 한 달에 1000만 원씩 벌었죠”라고 회상한다.
97년 말 IMF 외환위기는 바둑계도 얼려버렸고, 바둑강사 박영진은 다른 생업을 찾았다. 그러다 2000년 닷컴 열풍이 불고 인터넷에 바둑사이트가 활기를 띠기 시작하면서 바둑계로 돌아왔다. 2003년부터 2005년까지 약 2년 반 동안 박영진은 매일 밤 두 시간씩 인터넷 바둑사이트에서 강좌를 열었다. 강의를 무료로 개방하면 순식간에 300~400명이 들어올 정도로 호응을 얻었고, 강의전용 유료회원만 매달 150명이 넘었었다.
덕영배에서 직접 박영진을 만나 “바둑은 어떻게 시작했나요?”라고 묻자 “중학교 들어갔는데 바둑을 좋아하시던 아버님이 ‘초급자 지도’라는 광고를 보고 동네 기원에 절 보내셨어요. 그 기원 원장은 이전에 만화방을 하다 망했는데 처분 못한 책들이 기원에 잔뜩 쌓여있었지요. 바둑 가르쳐준다는 원장님은 항상 내기바둑에 빠져있어 전 즐겁게 만화책만 봤습니다. 기원에서 그렇게 몇 개월 놀았는데 우연히 어떤 초심자와 바둑을 두다 만방 지고 충격을 받았죠. 이후 바둑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해 중2 때 물1급이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지금 간신히 인터넷 7단 정도 되는 많이 약한 기력이었는데 기고만장했죠. 고등학교 시절 조병탁을 만나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당시 프로에게도 두 점으로 버텼는데 나이대가 비슷한 조병탁하고 치수고치기하면서 7점까지 내려간 적도 있어요. 나중에 얼굴이 벌게져서 씩씩대면서 뒀는데 결국 그게 피가 되고 살이 되었지요. 졸업하고 영남대학교 들어가서 기우반 활동하면서 두 점 정도 더 늘어 지금 실력이 되었습니다”라고 말한다.
오랜 바둑친구 조병탁 아마 7단(왼쪽)과 대국장면. 제36회 덕영배 아마대왕전 본선.
박영진은 61년생이다. 프로나 아마나 기량은 20대가 절정이고 누구나 오는 젊은 시절 전성기엔 박영진도 전국대회에서 이름을 꽤 날렸다. 꾸준히 공부한 보람인지 박영진에겐 2차 전성기가 50대에 찾아왔다.
“바둑에 자신감이 충만한 시절이었습니다. 새벽에 등산을 다녀와서 아침에 잘 가는 사우나에서 반신욕을 합니다. 그리고 아침을 먹고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일본 프로기사 고바야시 고이치 9단이 항상 아침 일찍 접속하기 때문이었어요. 아이디가 ‘3586’이었는데 생기는 거 없어도 센 사람하고 붙어보고 싶은 욕망 있잖아요. 한국이나 중국 프로기사들은 모르는 아이디면 대국신청 자체를 안 받아줍니다. 그런데 3586은 신청만 하면 항상 대국을 받아줬습니다. 한 아이디만 대국하면 알아챌까봐 제가 인터넷아이디만 100개를 만들었습니다. 고바야시 9단은 아침 유희에 불과했겠지만, 전 최선을 다했고 그와 승부를 겨루는 순간이 정말 즐거웠습니다. 승률은 6 대 4 정도로 제가 밀렸지만, 인터넷 바둑이라도 팬들이 환호하는 무대에서 이겨가며 자신감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런 기세로 2010년 무렵 아마추어 대회에서 몇 번 우승했었죠.”
2013년부터는 유튜브에 다시 동영상 강좌를 올리기 시작했다. 현재 구독자 수만 8만 6000명에 달하지만, 광고는 전혀 싣지 않는다. 박영진은 “1시간 강의를 올려도 준비하는 시간은 최소 10배가 듭니다. 힘든 작업이지만, 돈을 벌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바둑팬들이 예전 내 강좌를 다시 찾아보려면 불편하기도 하고, 몇 년 잠수(?)탄 게 미안해서 시작했죠. 바둑강의에 가장 목말랐던 사람이 나였기에 팬들의 심정을 생각하며 제작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박영진은 아마추어 중급자 마음을 가장 잘 아는 선생님이다. “바둑승패는 99% 마음에 달려있습니다. 기술연마도 중요하지만, 대부분 승부는 상대가 실수해서 이기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그래서 바둑 둘 때 몸 컨디션이나 마음상태가 가장 중요합니다. 승부의 비결은 단순합니다. 고급스럽게 표현하면 ‘평정심을 길러야 한다’인데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평소에 운동을 열심히 해라’입니다”라고 팁을 준다.
바둑팬들과 소통하는 즐거움을 잊지 못해 최근 다시 바둑세계로 돌아왔다고 말한다. “프로기사가 아니라면 바둑만 두고 살 수가 없어요. 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면 바둑도 망가집니다. 몇 년간은 바둑세계를 떠나 제 생활의 안정을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야 작은 목표를 이뤘습니다. 그냥 편안하게 살고 싶은 나이가 되었지만, 바둑 늘고 싶은 마음만은 여전합니다. 조금이라도 더 알게 되면 유튜브에 올리고 팬들과 공유하는 작업도 이어갈 생각입니다.”
“프로기사들 강좌를 보면 아마추어들의 정말 가려운 곳은 긁어주지 못해요.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안 된다고 말하는데 왜 안 되는지를 안 가르쳐주죠. 전 정말 궁금해서 만날 수 있는 주변 프로기사들에게 하나씩 물어서 체득한 지식을 바둑팬들과 공유했습니다. 제 실력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수들은 이세돌, 이창호 9단에게 달려가 무릎 꿇고 물어보고 싶을 때도 있었어요. 이제는 인공지능이 있습니다. 제가 게임을 좋아해서 그래픽카드와 컴퓨터 환경 등에 대해 아주 잘 압니다. 역대 최고수인 인공지능 ‘릴라’나 ‘엘프고’에게 이제 마음껏 물어봐야죠. 내 평생 그렸던 수들이 정수가 맞는지?”
박주성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