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에 미운털이 박히면 회사를 어떻게 운영하라는 거얏. 너희들이 우리 회사 말아먹을 일 있어?”
최태호는 조한우의 멱살이라도 잡을 듯한 표정이었다.
“천박한 엘리트라는 말은 제가 했습니다. 조한우 소장은 관계가 없습니다.”
이상희는 차갑게 내쏘았다.
“뭐야? 당신은 누구야?”
최태호가 이상희에게 삿대질을 했다.
“연구소의 이상희 박사입니다.”
비서실장이 재빨리 허리를 숙이면서 대답했다.
“박사 좋아하네. 똥오줌도 못 가리는 주제에 무슨 박사야?”
“호호호. 회장님께서는 굉장히 다혈질적이시군요. 제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우리나라 대기업의 40%는 1년 안에 부도가 납니다.”
이상희는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무, 무슨 소리야? 뭐가 부도가 난다는 거야?”
“지금 정부 경제팀은 경제 운용을 잘못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정책을 운용해도 쉽지 않을 텐데 1년 후에 어떻게 돌아갈지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고 있으니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우리 KG그룹도 위험합니다. 당장 신규투자를 중단하고 유동 자금을 충분하게 확보해 두어야 합니다. 특히 달러를 많이 준비하지 않으면 그룹이 해체될 위험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알아듣게 설명을 해봐.”
“그룹의 KG전자는 텔레비전, 냉장고 같은 가전제품이 주력상품입니다. 지금 LCD 분야와 반도체 분야에 집중투자하려고 하는데 반도체는 버려야 합니다. 양쪽을 다 먹으려면 그룹이 흔들립니다.”
최태호는 벼락을 맞은 듯한 표정으로 이상희를 쏘아보고 있었다. 최태호가 입을 다물자 장내는 기묘할 정도의 침묵이 흘렀다.
“소장이 올린 보고서 보셨습니까?”
“무슨 보고?”
“그룹 자금운용에 대한 보고서를 올렸습니다.”
“난 못 봤는데…. 누구에게 올린 거야?”
“연구소를 담담하고 있는 총무이사에게 올렸습니다.”
“그 새끼 당장 올라오라고 해. 왜 보고서를 지 혼자 보고 나한텐 보고조차 하지 않아?”
최태호가 비서실장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비서실장이 황급히 부속실로 달려 나갔다.
“회장님, 보고서를 보신 뒤에 저희와 다시 면담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알았어. 나가 봐.”
최태호가 손을 내저었다. 이상희는 조한우와 함께 회장실을 나와 부속실을 거쳐 엘리베이터 앞에 이르렀다. 조한우는 그때서야 이마의 땀을 훔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조한우는 최태호 앞에서 말 한마디를 하지 못한 것이다.
‘한국에서 오래 살면 노예가 된다니까.’
이상희는 KG그룹 사옥에서 나올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조한우를 보자 어이가 없었다. 남자들이 너무 왜소해지고 있다. 어떻게 재벌그룹 회장 앞이라고 말 한마디를 하지 못하는가. 당당함은 없어지고 몰염치와 익명성만 살아 있다. 상대가 없으면 대통령에게도 욕을 하지만 상대가 앞에 있으면 청와대 미화원에게도 벌벌 떠는 것이 한국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연구소에서 뵐게요.”
이상희는 조한우에게 작별을 고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올 때 휴대폰 플립을 열자 장충공원으로 나오라는 유령의 문자 메시지가 찍혀 있었다.
‘유령이 한국까지 왔다는 말인가?’
이상희는 문자 메시지를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나 유령과 접선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한우는 아쉬워하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아직도 최태호 회장이 재떨이를 던진 탓인지 넋이 빠진 듯한 얼굴이었다. 최태호는 영악한 인물이었다. 재떨이를 던졌으나 사람에게 맞지 않도록 살짝 옆으로 던졌기 때문에 조한우가 직접 맞지는 않았다. 그러나 조한우를 비롯하여 회장실에 있던 사람들의 넋을 빼놓기에는 충분한 시위였다.
이상희는 택시를 타고 장충공원으로 달려갔다. 어느 사이에 사방은 캄캄하게 어두워져 있었고 뺨을 간질이는 바람에 축축한 물기가 묻어 있었다.
‘비가 오려나?’
이상희는 택시에서 내려 장충공원으로 들어가자 어두운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늘에 별이 하나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이상희가 수표교 쪽으로 걷고 있을 때 뒤에서 낮게 웃는 유령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느 사이에 로만칼라에 검은 사제복을 입은 유령이 그녀의 뒤에 바짝 다가와 있었다.
“감사합니다.”
이상희는 전신이 빳빳하게 긴장되어 오는 것을 느끼면서 대답했다.
“서라벌호텔 커피숍에 다나카 씨가 와 있소. 그 분은 창보그룹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궁금해 하고 계시오.”
“그 분에게 창보그룹 사태를 설명하겠습니다.”
“좋소.”
유령은 창보그룹 사태 외에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 그 중에는 한국의 3대 자동차 회사인 유아자동차를 재벌 1위 오성그룹에서 인수하게 하라는 것도 있었다. 이상희는 유령이 물러가자 서라벌호텔로 걸어 올라갔다. 유령이 말한 다나카는 회색 정장 차림으로 로비 쪽의 커피숍에 앉아 있었다.
‘저 사람이 다나카 미사토인가?’
다나카 미사토는 일본 재계의 숨은 실력자고 국제금융가였다. 창보그룹에도 막대한 투자를 했으나 언제 자금을 회수해야할지 궁금해 하고 있는 것이다. 다나카 미사토가 창보그룹에 빌려준 돈은 13%가 넘는 고금리의 단기자금이었다. 일본의 여러 은행에서 6%대로 자금을 빌린 뒤에 다시 한국에 빌려주어 자기 돈은 한푼도 들이지 않고 창보그룹 한 곳에서만도 수억 달러의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차관이라는 명목으로 들어오는 돈 중에 10%가 넘는 국제금융은 대부분 외국 금융기관에서 저리로 돈을 빌려 한국에 단기 고리로 빌려준 것이다. 이 자금들이 몽땅 빠져나가면 한국은 순식간에 붕괴되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이상희입니다.”
이상희는 신문을 읽는 체하고 있는 다나카 미사토의 손가락에 있는 반지를 확인하고 인사를 했다. 국제금융을 좌우하는 멤버들은 모두 장미 문양의 반지를 끼어 자신들의 신분을 드러내고 있었다.
“반갑소.”
다나카 미사토가 신문을 접고 이상희에게 밝은 미소를 지었다. 이 자는 블랙마리아 못지 않은 거물이다. 한국의 기라성 같은 재벌그룹 회장들은 일본에 가면 다나카 미사토를 만나려고 혈안이 된다. 다나카 미사토는 잔잔하게 웃으면서 이상희의 미모를 칭찬하는 등 엉뚱한 이야기만 잔뜩 늘어놓고는 30분이 지나자 창보그룹 사태를 CD로 구워줄 것을 요구했다.
“지시대로 하겠습니다.”
“내일 6시에 동교호텔에서 식사나 합시다.”
다나카 미사토가 이상희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상희는 다나카 미사토의 손을 잡아 악수를 나눈 뒤에 일어섰다. 다나카 미사토가 한국에 온 것은 극비일 것이다. 이상희는 천천히 로비에서 나와 택시를 타고 오피스텔로 돌아왔다. 그녀의 오피스텔에는 해커 창이 와 있었다. 창은 나이가 스물세 살이다. 워싱턴에 있을 때 나체로 캠팅을 했기 때문에 오랜 연인 사이나 다를 바 없었다.
“배고파 죽겠네. 먹을 거 없어?”
이상희는 소파에 털썩 앉아서 창을 향해 말했다.
“스테이크를 만들고 있었어요. 레인지에서 익히기만 하면 돼요.”
창이 이상희의 무릎 위에 누우면서 말했다. 창의 손이 이상희의 가슴을 만지작거렸다.
“적포도주도 있을까?”
“주류백화점에서 사왔어요.”
“역시 창은 내 마음을 잘 알아.”
이상희가 블라우스 단추를 풀면서 말했다. 이상희의 풍만한 가슴이 드러났다. 창이 홀린 듯이 바라보다가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문질렀다. 이상희는 창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창이 일어나서 주방으로 갔다. 레인지가 작동을 하는 미세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희는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하고 나왔다. 창은 이미 식탁에 저녁 식사를 차려놓고 와인 잔까지 준비하고 있었다. 창은 이상희가 식탁에 앉자 와인 잔에 적포도주를 따랐다.
‘귀여운 놈. 오늘 조한우와 사랑을 하지 못했으니 이놈과 사랑을 나누어야겠어.’
이상희는 혀로 입술을 핥으면서 창을 응시했다. 하체에서 뜨거운 기운이 스멀거리고 올라온다. 창은 더벅머리에 안경을 쓰고 있다. 눈도 작고 체구도 볼품이 없지만 머리는 비상한 놈이다. 얼핏 보면 아직 스무 살도 안 되어 보일 정도로 앳된 얼굴을 갖고 있었다.
“밤을 위하여!”
창이 와인 잔을 들어 이상희의 잔에 부딪쳤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