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나 죽어.”
나중에 안 일이지만 김경실이 그런 반응을 보인 것도 처음이었다. 오준태는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내가 왜 네 여보야, 하고 속으로는 비웃었지만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소리를 질러대는 김경실에게 점점 동화되어 갔다.
남자가 가장 좋아하는 여자, 소위 명기에 대해서 들은 일이 있다. 명기는 여자의 은밀한 부위가 특별한 모양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명기에 대해서는 남자의 물건을 바짝 조이는 특이한 기능을 갖고 있다는 등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실제로는 소리를 잘 내는 여자라고 한다. 일제 강점기 때 장안의 한량들을 안달하게 했던 명월관의 명기도 실제로는 남자가 진입하기만 하면 울음을 터뜨려서 남자들이 좋아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김경실도 명기가 아닌가. 한국의 여자들은 섹스를 할 때 소리를 내지 못한다. 가옥 구조상 시부모나 가족들이 들을까봐 입을 꼭꼭 다물고 섹스를 해야했다. 그러한 관습이 소리를 지르는 것을 억제해 온 것이다.
“여보, 여보….”
김경실을 울게 만든 것은 대성공이었다. 김경실은 그날 이후 오준태에게 완전히 코가 꿰이고 말았다. 빌딩 매각건은 6개월 만에 승부가 났다. 빌딩은 값이 올라 투자자들이 팔자고 제안을 하여 원래 목표 200억보다는 적은 150억의 차액을 거두었다. 그래도 6개월 만에 150억 원을 남긴 것은 엄청난 것이었다.
오준태는 약 3억 7000만 원의 돈을 챙겼다.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6개월만 더 있었으면 빌딩 값이 올라 더 많은 이익을 챙길 수 있었으나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었다. 오준태는 3억 원을 통장에 넣고 5000만 원은 아내에게 주었다. 그냥 쓰라고 준 것이 아니라 집을 늘릴 때 요긴하게 사용할 것이다. 3억 원은 그의 투자 자본이었다. 1500만 원으로 겉만 번지르한 포텐샤 중고차를 사고 500만 원은 빳빳한 자기앞 수표 10만원권으로 바꾸어 지갑에 넣고 다녔다.
‘돈이 돈을 번다.’
오준태는 김상복의 회사에 다니면서 돈의 흐름을 볼 수 있었다. 조금만 머리를 돌리면 IMF인데도 충분히 돈을 벌 수 있었다. 돈이 날개가 돋친 듯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오준태는 떳다방도 계속했다. 떳다방도 잘만 하면 떼돈을 벌 수 있었다. 강남의 수많은 여자들이 아파트를 사고팔아 돈을 벌고 있었다.
‘세상에서 돈을 제일 잘 버는 것은 권력이다.’
그것은 춘추전국시대 여불위와 그의 아버지 대화에서 나온 말이다. 농사를 지으면 열 배, 귀금속을 팔면 백 배의 이익을 얻을 수 있지만 권력을 잡으면 천만 배의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한 것이 여불위의 아버지다. 그의 말은 2000년이 훨씬 지난 오늘에도 유효하고 널리 통용된다. 주애란은 권력을 동원하여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주애란에게 공을 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오준태는 틈만 나면 주애란을 만났다. 주애란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빌딩을 산 사람은 누굽니까?”
오준태는 주애란에게 물었다. 빌딩을 산 사람도 주애란이 데리고 왔다. 빌딩 구입과 매각을 주애란이 모두 해치운 것이다.
“일본인이잖아. 악수를 하고도 몰라?”
주애란이 안경 너머로 오준태를 쏘아보면서 말했다. 남산에 있는 호텔의 스카이라운지였다. 오른쪽으로는 서울시청이, 왼쪽으로는 남대문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악수를 하고 명함이야 받았지만 뭘하는 사람인지 모르지 않습니까.”
“일본 기업가야. 그건 알아서 뭘해?”
“알아둬서 나쁠 건 없잖아요.”
잠시 대화가 끊겼다. 주애란은 서울시청 쪽을 무심한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옆얼굴이 데스마스크처럼 단아해 보였다. 이 여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정말 남자관계는 깨끗한 걸까.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였다.
“그건 그렇고 김경실이하고 잘나가고 있지? 그 얘기 해주기로 했잖아.”
주애란이 갑자기 오준태에게 시선을 돌리면서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런 이야기가 뭐가 재미있습니까.”
“내가 도와주었는데 얘기 안할 거야?”
“선배가 한번 주면 얘기해 주고 그렇지 않으면 안할랍니다.”
“주긴 뭘 줘. 돈을 벌게 해주었더니 모른 체한다 이거지?”
“선배와 비교도 되지 않잖아요. 큰돈은 선배가 벌고…. 선배, 그러지 말고 우리 방이나 잡읍시다. 아랫도리가 불끈거려서….”
오준태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주애란에게 집적거렸다.
“난 사디스트야. 그걸 할 때 상대방을 채찍으로 때리지 않으면 흥분이 안 돼. 나한테 채찍으로 맞을 자신 있어?”
오준태는 주애란의 말에 입이 딱 벌어졌다. 발가벗고 주애란에게 매를 맞는 생각을 하자 소름이 돋았다. 이 여자가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정말 멀쩡하게 생긴 여자가 사디스트란 말인가.
“정말입니까?”
“흥분할 때만 그래. 그래서 우리 남편이 불쌍하기도 해. 섹스를 하고 싶으면 채찍으로 맞아야 하니…. 너도 한 번 맞아 볼래?”
“사, 사양하겠습니다.”
주애란의 말에 오준태는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주애란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높다랗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절간의 추녀에 걸린 풍경소리처럼 귓전에 찰랑거렸다.
“선배, 농담이지죠?”
“왜 겁나?”
“겁나기는요. 다시 생각해보니 선배 같은 미인과 밤을 지낼 수 있다면 맞아죽어도 좋습니다.”
오준태는 <감각의 제국>이라는 일본 영화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주애란에게도 그와 같은 광기가 있다는 말인가. 그러고 보면 주애란의 눈가에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신비스러운 빛이 뿜어지고는 했다. <원초적 본능>이라는 영화도 있다. 정사 도중에 얼음송곳으로 남자를 죽이는 샤론 스톤의 야릇하게 요염한 눈빛이 관객을 압도했었다. 여자들에게 정사 도중에 남자를 죽이려는 본능이 있다는 말인가. 사마귀는 교미를 할 때 수컷의 머리를 뜯어먹는다는 말이 떠올랐다. 주애란이 정사 중에 내 목을 조이는 상상을 하자 기분이 미묘했다.
“무슨 생각을 해?”
“창밖의 빌딩을 보고 있었어요. 저렇게 빌딩이 많은데 왜 내 것은 없나 생각했어요.”
“빌딩을 갖고 싶어?”
“그야 당연한 거 아닙니까.”
“그러면 가지면 되잖아.”
“선배가 도와주어야지요. 내가 무슨 재주로 돈을 법니까.”
“내가 시키는대로 할 거야?”
주애란의 눈에서 야릇한 빛이 뿜어졌다.
“사람 죽이는 일만 빼놓고 선배가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
“그럼 지금 당장 서점에 가서 주식에 대한 책을 사서 읽어. 내가 적어 줄게.”
주애란은 핸드백에서 수첩을 꺼내더니 몇 권의 책 제목을 적어서 오준태에게 주었다. 오준태는 비로소 주애란이 허튼소리를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책을 다 읽은 뒤에 연락해.”
주애란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준태는 주애란은 주차장까지 배웅하고 서점으로 갔다. IMF 상황이라 서점도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오준태는 주애란이 적어준 책 10권을 모두 사서 문지영이 자취를 하고 있는 옥탑방으로 갔다. 문지영에게는 한 달에 100만 원씩 생활비를 대주고 있었기 때문에 오준태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오늘은 일찍 오시네요.”
문지영이 출근할 준비를 하고 있다가 오준태를 반갑게 맞이했다. 문지영은 회사에서 경리를 할 때와는 사뭇 달랐다. 어딘지 모르게 닳아버린, 퇴폐적인 모습이다.
“당분간 책이나 읽으면서 지내야 할 것같아.”
“무슨 책이에요?”
문지영이 오준태가 가지고 온 책을 들여다보면서 물었다.
“주식 책이야. 주식에 투자를 해야겠어.”
“그럼 회사에 출근하지 않을 거예요?”
“낮에는 출근을 해야지.”
“나는 밤에 출근하고…. 그럼 만날 시간이 별로 없네요.”
문지영은 출근을 하면 한 달에 기본급으로 150만 원을 받는다. 손님들에게 차비조로 2만~3만 원씩 받는 팁까지 합치면 한 달에 200만 원을 약간 넘게 번다.
“나 오늘 출근하지 말까?”
“왜?”
“자기랑 있고 싶어서….”
문지영이 오준태를 껴안고 입술을 부벼대면서 속삭였다. 문지영은 매일 같이 술을 마셔야 하는 술집 일에 지쳐가고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