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가는 한국의 미 알리기<8>
얼굴은 ‘춘이월 반개도화(半開桃花) 옥빈에 어리었고, 초승에 지는 달빛 아미간(蛾眉間)에 비친’ 듯하지만 ‘사주에 청상살이 겹겹이 쌓인 고로’ ‘삼십 리 안팎에 상투 올린 사나이는 고사하고 열다섯 넘은 총각도’ 스치고 지나가기만 해도 다 죽게 만들었다는 옹녀와 ‘천하의 잡놈’ ‘천생음골(天生陰骨)’ 변강쇠가 만나 지리산에 들어가 살림을 차린다.
‘부엌에 토정(土鼎) 걸고, 방 쓸어 공석(空石) 펴고, 낙엽을 긁어다가 저녁밥 지어 먹고, 터 누르기 삼삼구(三三九)를 밤새도록 한 연후에 강쇠의 평생 일하여 본 놈이냐. 낮이면 잠만 자고, 밤이면 배만 타니’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진 옹녀가 나무라도 해오라고 내보낸다. 그러나 천성이 게을러 하라는 나무는 않고 낮잠만 잔 강쇠란 놈이 오는 길에 길가에 세워진 애꿎은 장승을 패가지고 온다.
억울하게 도끼에 찍혀 부서진 장승의 혼령이 ‘경기 노강(鷺江) 선창 목의 대방 장승’ 즉 이곳의 최고 우두머리 장승을 찾아와 신세 한탄을 하며 강쇠란 놈을 그냥 두면 장승이 다 없어질 판이라고 호소하자 팔도 장승들이 모여 어떻게 벌할지 논의한다.
결국 ‘고생을 실컷 시켜 죽자 해도 썩 못 죽고 살자 해도 살 수 없어 칠칠이 사십구 한 달 열아흐레 밤낮으로 볶이다가 험사(險死) 악사(惡死)하게 하면 장승 화장한 죄인 줄 저도 알고 남도 알아 쾌히 징계될 것’이라는 해남 장승의 말을 따라 마침내 만 가지 동티가 나게 만들어 고생 끝에 죽게 한다는 것이다.
장승을 함부로 대하지 않던 민간 신앙이 구수하고 질펀한 해학 속에 녹아있다.
장승은 옛날 마을을 지키는 든든한 수호신이자 집 떠난 나그네들의 지친 몸과 마음을 어루만져 주던 다정한 길벗이었다. 그 옛날 아무도 없는 산길이나 들길에서 만나던 장승은 어떤 것은 험상궂은 모습이고 또 어떤 것은 털털한 모습이었지만 모두가 더없이 반가운 존재였다. 장승은 지역의 경계나 길의 이정표의 구실을 했고 또는 마을의 수호신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장승의 기원은 남근숭배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사찰의 경계표에서 나온 것이라는 장생고(長生庫) 표지설, 솟대나 서낭당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고유민속기원설이 있으며 또한 퉁구스기원설, 남방벼농사기원설, 환태평양기원설 등과 같은 비교민속기원설 등이 있다.
장승은 지역마다 다양한 이름으로 존재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장생, 장신, 벅수(법수), 벅시(법시), 돌미륵, 당산할아버지, 돌하루방 등등이다. 이런 이름에서도 장승에 토속신앙과 불교신앙이 혼합돼 있음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