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끝이 아니야.’
김영택은 마호가니 원목으로 제작한 이탈리아 책상에 앉아서 눈을 부릅떴다. 은행장은 시작에 불과하다. 공적자금을 지원받고 있는 은행을 합병시켜 덩치를 키우고 금융계의 황제로 군림하는 것도 2차적인 목표에 지나지 않는다. 국내 1위의 대형 은행 은행장을 역임하면서 스톡옵션으로 대박을 터트리고, 그 명성으로 세계적인 금융투자회사를 설립하는 것이 그의 최종 목표였다.
은행장에게는 공식적으로 여러 사람들이 따른다. 은행의 전직원을 수하로 거느리기도 하지만 부속실에만도 남녀 직원 5명이 있고 수행비서도 있다. 고급 승용차와 운전기사를 배정받고 골프 회원권을 비롯하여 수억 원대의 판공비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
은행장이 되면 무엇보다도 인사권이 있다. 은행장이 되기 전부터 그에게 줄을 서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전무, 상무를 비롯하여 본점 부장급의 임원들, 1급지의 지점장들이 신임 은행장인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난과 분, 그리고 화환을 보내 왔다. 그의 은행이 주거래은행으로 지정되어 있는 기업 회장들도 난을 보내왔다. 드물게는 직인을 만들 수 있는 고가의 도장석이나 그림을 보낸 인물도 있었다.
“유 과장, 화환 모두 치우고 명단 만들어 놔.”
김영택은 부속실의 유성일 과장을 불러 지시했다. 은행장에 갓 선출되었는데 화환이나 난을 복도에 늘어놓을 수는 없었다.
“네. 알겠습니다.”
유성일이 머리를 잔뜩 조아리고 대답했다. 유성일은 깔끔한 외모를 갖고 있는 30대 후반의 사내다.
“오늘 스케줄이 어떻게 되지?”
“10시에 이취임식이 있고 11시 30분에 청와대 내방, 오후 2시에 금감원 내방, 5시에 여당 정책실 내방이 있습니다. 신문사 순방은 내일로 잡혀 있습니다.”
유성일이 수첩을 들여다보면서 줄줄이 스케줄을 읽었다. 청와대 내방은 경제수석에게 인사를 드리는 것이고 금감원 내방은 금융감독위원회 위원장에게 인사를 드리러 가는 것을 말한다. 2, 3일 동안은 인사를 드리러 다니는 일만으로 눈코 뜰 새가 없을 것이다. 신문사를 순방하는 것은 언론에 밉보이지 않기 위해서다.
“취임사 원고는 누가 썼지?”
“홍보부장님께서 초안을 마련하셨습니다.”
“초안 가지고 들어오라고 해.”
“예.”
유성일이 허리를 숙이고 나가자 부속실의 미스 신이 녹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김영택은 녹차를 좋아하지 않았다. 싱겁기 짝이 없는 녹차를 마시느니 몸에 좋은 쌍화차를 마신다. 미스 신에게 쌍화차를 들여오라고 지시한 뒤에 안락의자에 앉아 컴퓨터를 부팅시켰다.
“행장님, 삼인그룹 전화인데 연결할까요?”
부속실에서 인터폰을 울렸다.
“아니야. 오전에는 회의 중이라고 하고 어떤 전화도 연결하지 말아.”
김영택은 전화를 받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휴대폰도 잇달아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은행에서 대출을 받은 기업 회장들이나 담당 임원들의 전화, 국회의원, 경쟁 은행 행장들의 전화가 빗발쳤다. 주애란과 정희숙도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김영택은 자신이 은행장이 되는데 그녀들이 1등 공신이라고 생각했다. 주애란에게는 간략하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정희숙에게는 다정하게 전화를 받아주었다. 김동철은 정희숙을 여의도 오피스텔에서 살게 하려고 하고 있었다.
‘영감탱이가 정희숙에게 완전히 빠졌어.’
김영택은 속으로 웃었다. 정희숙에게는 충분하게 사례를 했다. 김동철을 소개해 주기 전에 그가 먼저 정희숙을 데리고 잤기 때문에 후회는 없었다. 여불위도 자신의 첩을 진시황의 아버지에게 바치지 않았는가. 조금 아깝다 싶었지만 미련없이 내주었다. 다만 정희숙을 달래는 데 상당히 애를 써야 했다. 대리로 진급을 시키고 2000만 원이라는 큰돈을 집어주었다. 정희숙처럼 돈에 개념이 없는 여자들은 몸뚱이를 아끼지 않는다.
김영택이 사외이사로 임명된 주애란을 만난 것은 은행장에 선출된 지 일주일이 되었을 때였다. 이사회 회의를 마친 주애란이 돌아갔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 행장실에 들어와 있었다.
“주 교수는 여전히 눈이 부시게 아름답군.”
행장실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은 주애란을 본 김영택은 감탄했다. 사외이사 임명을 반대했던 대주주들을 뇌쇄시킬 정도로 주애란은 헤어스타일이며 패션이 아름다웠다.
“부국은행을 합병할 생각하지 마.”
“무슨 소리야? 나보고 한양은행 은행장으로 만족하란 말이야?”
김영택은 멈칫하여 주애란을 쏘아보았다. 주애란은 외국 투자자와 투기회사들에 대한 정보망을 갖고 있다. 주애란이 선수를 치고 나오는 것은 그들로부터 사주를 받았기 때문이다.
“내가 건드리지 말라고 하면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아.”
“누구에게 얘기를 들었어?”
“내가 그것까지 밝혀야 돼?”
“이것 봐. 내가 은혜를 원수로 갚는 놈이야? 자기가 원하는 대로 대해 주고 있는데 왜 그래? 내가 수청까지 들어줬잖아?”
마지막 말은 주애란의 굳은 얼굴을 풀어주기 위한 것이다. 김영택이 예상했던 대로 주애란이 피식 웃었다.
“나도 자기를 위해서 어떤 놈한테 수청을 들었어.”
“그러니 우리끼리는 툭 털어놓으면 좋잖아? 서로 알 거 다 알면서 왜 그래?”
김영택은 주애란의 뒤로 돌아가서 가슴을 안았다. 집무실이라고 해서 김영택이 가리지는 않는다.
“여하튼 건드리지 않는 게 좋아.”
가슴을 애무하자 주애란은 싫지 않은 듯이 얼어붙어 있던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다. 김영택은 주애란의 몸을 잔뜩 애무해 준 뒤에 은행장 책상에 앉았다.
“빅스타야?”
“눈치 한 번 빠르네.”
주애란이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김영택을 돌아보았다. 자신을 흥분시켜 놓고 책상에 앉아버린 김영택이 뜻밖이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제기랄, 왜 하필이면 부국은행이야?”
“국책은행이니까 그렇지.”
국책은행은 정부가 지분을 소유하고 있다. 정부 지분만 손에 넣으면 합병하는 것은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쉽다. 김영택도 그러한 까닭으로 부국은행을 노린 것이다.
“나는 한양은행으로 만족할 수 없어.”
“백성은행이 있잖아? 백성은행을 합병하면 될 텐데 왜 그래?”
“그건 민간은행이야. 주주들이 모두 국민들이라구.”
백성은행은 민간은행이기도 하지만 우량은행이고 대형은행이다. 그런 백성은행을 한양은행이 합병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안 되는 일이 어디 있어?”
주애란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돌아가려는가 생각했는데 김영택에게 다가와서 얼굴을 끌어안아 자기 가슴에 문질렀다. 김영택은 주애란의 풍만한 엉덩이를 쓰다듬으면서 은행 합병 시나리오를 새로 짜야겠다고 생각했다. 미국 투기자본 빅스타가 개입한다고 해서 내가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다. 그러나 한순간 빅스타에게 밀릴 수 없다는 생각이 섬광처럼 뇌리를 스쳤다. 주애란의 한마디에 물러서는 것보다는 치열하게 대립하는 체하다가 물러서면 반사이익이 생길 수도 있는 것이다.
“흐흐… 대한민국에서 안 되는 일은 없지. 빅스타가 개입한다고 해서 내가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어.”
김영택은 주애란의 스커트를 걷어 올렸다.
“뭘하는 거야?”
주애란이 눈에 쌍심지를 돋웠다.
“다 아는 처지에 뭘 그래?”
“내 말은 빅스타와 끝내 대립을 하려는지 묻는 거야.”
“빅스타가 언제부터 대한민국을 좌지우지했어?”
“이 사람 큰일 낼 사람이군.”
“빅스타는 투기자본일 뿐이야.”
“대한민국 경제를 파탄에 빠트릴 수 있어.”
주애란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하더니 김영택에게서 떨어졌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