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애국자가 아니야. IMF가 다시 온다고 해도 상관하지 않아.”
김영택이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설득을 해야 소용이 없다. 주애란은 김영택의 얼굴에서 얼음가루가 날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김영택은 하이에나 같은 인물이었다. 주애란은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고 은행장 집무실을 나왔다. 김영택을 만만하게 보았더니 끝내 배신을 때리고 있다. 하기야 김영택 같은 작자가 그녀의 손에서 호락호락 놀아날 리가 없다. 주애란은 학교로 돌아오면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김영택을 구렁텅이로 밀어 넣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쥐도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면 고양이에게 덤벼들지 않는가. 잘못 건드리면 벌집을 쑤시게 되는 것이다.
강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강의는 늘 최선을 다했는데 열의가 솟아오르지 않았다.
“김영택 씨가 부국은행을 합병하려는 것 같아요.”
저녁 때 남편 조한우가 퇴근을 하자 주애란은 지나가는 말로 알렸다.
“은행장 된 지 얼마되지 않았는데 무리수를 두고 있는 거 아니야?”
조한우가 커피를 마시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빅스타에서 그냥 있지 않겠죠?”
“그냥 있으면 빅스타가 아니지.”
조한우는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주애란은 조한우가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일이면 조한우는 이상희를 만나서 이와 같은 사실을 알려줄 것이다. 주애란은 한때 조한우가 만나는 사람이 누구인지 흥신소를 시켜서 조사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흥신소 소장은 이상희를 미행한 지 일주일이 못되어 얼굴이 파랗게 질려 주애란 앞에 나타났다.
“이상희라는 여자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흥신소 소장은 30대 초반으로 특수부대 출신이었다. 주먹도 쓸 줄 알고 머리도 잘 돌아가는 사내였다. 그런 그가 잔뜩 공포에 질려 있었다.
“왜요?”
“무서운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배경이라니요? 정치인이 뒤에 있다는 말입니까?”
“정치인 같으면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그보다 더 무서운 조직입니다. 살인을 하면서 눈 한번 깜짝 하지 않는 놈들입니다.”
“도대체 어떤 배경을 말하는 거예요?”
주애란은 짜증이 났다. 흥신소 소장은 에둘러 말하면서 변죽만 울리고 있었다.
“살인집단입니다.”
“우리나라에 그런 집단이 있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닙니다. 외국인입니다.”
주애란은 흥신소 소장의 말에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는 흥신소 소장의 보고를 받은 뒤에 조한우와 저녁식사를 했다. 흥신소 소장은 이상희의 배경에 대해서 말을 하려는 눈치가 아니었다. 외국인들이 연결되어 있다면 국제적인 조직이라는 것을 어린애도 알 수 있을 것이다.
“프리메이슨이라는 단체 알아요?”
“서양의 신비단체라고 그러는데 왜?”
“우리나라에도 그 조직이 들어와 있어요?”
“멘사가 있다는 말은 들었어도 프리메이슨은 처음이야. 음모론 같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거 아니야?”
조한우는 대수롭지 않은 듯이 대답했다. 멘사는 상위 2%의 IQ 테스트를 통과한 사람들의 모임이다. 주애란은 조한우에게서 마땅한 대답을 들을 수 없자 스스로 프리메이슨에 대해서 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전설적인 해커인 ‘창’을 인터넷 채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창은 자신이 직접 전 세계 사이트를 돌아다니면서 조사한 결과 프리메이슨인지는 알 수 없으나 룩셈부르크에 신비조직이 있고, 그 조직의 우두머리는 의장이라고 부르는 백발노인이라고 했다. 그들은 전 세계의 경제를 좌우하는데 한국에 IMF가 오게 한 것도 그들이라고 했다. 이상희는 실질적인 행동을 하는 블랙마리아 휘하의 행동요원이라고 했다. 블랙마리아는 자신들의 정체를 숨기거나 조직을 위해 살인도 서슴지 않는다는 것이 창의 말이었다. 주애란은 창의 이야기를 듣고 소름이 끼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박태수 씨, 그럼 한양은행 행장은 뒷조사를 할 수 있죠?”
며칠 동안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주애란은 흥신소 소장을 다시 불렀다.
“거물이군요. 여자 문제를 조사하는 것입니까?”
흥신소 소장 박태수는 흥미가 당긴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모든 걸 포함해서요. 그가 은행에서 어떤 일을 하려는 것까지 조사해야 돼요. 할 수 있겠어요?”
“나하고 일하면서 언제 돈 걱정을 했어요?”
“알겠습니다.”
박태수는 주애란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자 입을 다물었다. 박태수의 조사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김영택은 은행장에 취임한 두세 달 동안 바쁘게 지내고 있었다. 은행 경영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키겠다면서 창구에서의 고객 서비스 강화, 유니버설 변액 보험 도입 등 신임 은행장으로 뉴스에 자주 등장했다.
‘이건 촌지깨나 돌렸겠군.’
영향력이 가장 큰 신문에 신경영 기법 도입이라는 김영택 기사가 크게 실린 것을 보고 주애란은 속으로 웃었다. 김영택은 언론 플레이까지 하고 있다. 자신이 은행경영의 마에스트로라는 인식을 국민들에게 심어준 뒤에 부국은행 합병에 돌진하려는 계획인 것이다.
“김영택은 부국은행 합병팀을 만들었습니다.”
박태수가 김영택을 자세하게 조사한 뒤에 보고했다.
“그래요?”
“겉으로는 구조조정본부라는 이름을 갖고 있지만 실제로는 한양은행이 부국은행을 합병하려는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부국은행은 어떻게 하고 있어요?”
“부국은행도 대응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외형이나 자산면에서 부국은행보다 훨씬 작은 한양은행이 부국은행을 먹어 치우려고 한다고 펄펄 뛰고 있습니다.”
“한바탕 전쟁이 벌어지겠군.”
주애란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은행들 간의 전쟁이다. 그런데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국제 컨설턴트라는 미국의 헨리 제이콥스라는 사내가 한국의 은행에 대해서 연구를 한다고 접근했을 때 주애란은 협조해 주겠다고 혼쾌하게 동의했었다. 서양인으로 크지도 작지도 않은 중키에 금발머리, 푸른 눈이 매력적인 사내였다. 그와 여러 차례 식사를 함께 하고 술을 마셨으나 호텔에 가지 않았다.
헨리 제이콥스는 경제학 교수로서 옷차림도 수수하면서도 핸섬했다.
“헨리, 프리메이슨에 대해서 알아요?”
주애란은 헨리 제이콥스를 만나 저녁식사를 하면서 물었다. 남산에 있는 호텔의 양식 식당이다. 그는 스테이크를 썰면서 포도주를 마셨다.
“정확하게는 몰라요. 왜 그러죠?”
헨리가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신 뒤에 주애란에게 물었다.
“한양은행이 부국은행을 합병하려고 하고 있어요. 그런데 실제로는 빅스타가 부국은행을 노리고 있어요.”
“빅스타라면 미국의 투기자본 아닙니까?”
“그래요. 빅스타의 배후가 프리메이슨이 아닌가 해서요.”
“빅스타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신비단체가 배후라는 소문이 있어요. 그런 일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좋아요.”
“내가 한양은행 주식을 갖고 있어요. 부국은행 합병하려다가 실패하면 주식이 떨어지죠.”
주애란의 말에 헨리 제이콥스가 잔잔하게 웃었다.
“왜 웃어요?”
“당신이 아름다워서요.”
“어머. 오늘은 듣기 좋은 말씀을 하시네.”
헨리 제이콥스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오늘 밤 일을 저질러버려? 주애란은 식사를 하면서 헨리 제이콥스와 알몸으로 뒹구는 상상을 했다. 그러자 하체에서 전율과 같은 쾌감이 일어나 전신으로 빠르게 번졌다. 주애란은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비틀었다.
“춤추러 갈까요?”
헨리 제이콥스가 물었다.
“네. 좋아요.”
주애란은 들떠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호텔의 나이트클럽은 시간이 이른 탓인지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그래도 흐느적거리는 음악에 맞춰 몇몇 남녀가 부둥켜안고 스텝을 밟고 있었다. 호텔의 나이트클럽이 좋은 것은 출입하는 사람들이 부유층이기 때문에 물이 좋다는 사실이었다.
‘어머나!’
주애란은 춤을 추다가 자신의 복부를 묵직한 것이 찔러오자 깜짝 놀랐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