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교수, 정통부에 아는 사람 있어요?”
전자공학과 주임교수인 최재원이 식사를 하다가 말고 주애란에게 물었다. 한정식 점심 특선이었다. 주애란은 정보통신부 인맥을 머릿속에서 꼽아보았다. 작달막한 키에 통통한 몸집의 정윤철이 먼저 떠올랐다.
“네. 정윤철 국장을 아는데 왜 그러세요?”
“우리가 세컨드 라이프에 대한 연구를 하는데 연구용역비를 지원받으려고 합니다. 주 교수가 도와주면 신세를 잊지 않을게요.”
최재원은 50대 초반으로 전형적인 학자 스타일이었다. 그러나 주임교수가 되면 학과를 위해 정치적인 일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같은 학교 일인데 신세랄 것이 있나요? 교수님을 도와 드려야지요.”
주애란은 미소로 답했다.
“그럼 자리를 마련해 주십시오.”
“그러죠. 그보다 용역비를 얼마나 지원받을 생각이세요?”
“희망사항이기는 하지만 최대 5억 원이고 작으면 2억도 괜찮아요.”
“기업에서 협조를 하지 않나요?”
“기업도 인맥이 있어야 하는데 연구실에만 처박혀 있던 내가 뭘 알아야지요.”
최재원은 키는 크지만 순박한 데가 있다. 주애란은 최재원의 솔직한 말이 마음에 들었다.
“제가 한 번 알아봐 드릴게요.”
“그래요? 성사만 되면 내가 주 교수에게 큰절을 하겠습니다.”
최재원의 말에 다른 교수들이 손가락질을 하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호호호. 큰절까지 하실 필요가 있나요? 밥이나 한 번 사면 되죠.”
“주 교수 같은 미인하고 밥을 먹는다면 이런 일이 아니라도 매일같이 밥을 살 수 있어요.”
최재원이 기분이 좋은지 너스레를 떨었다.
“주 교수가 뭐 밥만 먹고 사는지 아시오?”
철학과 박영도 교수의 말에 좌중에 한바탕 폭소가 터졌다. 남자들은 식사를 하면서도 성적인 농담을 주고받는다.
“저는 밥만 먹고 살아요.”
주애란의 말에 좌중이 일시에 긴장을 했다.
“농담이에요.”
주애란은 근엄한 교수들에게 한방 먹였다. 교수들이 다시 왁자하게 웃음을 터트리면서 식사를 했다. 주애란은 오후에 강의가 없었다. 교수실에 앉아서 강사와 조교들과 학생들의 중간시험 문제를 이야기한 뒤에 장은숙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영훈이라는 자가 대주주고 장은숙이 2대주주인 e-북회사는 사업의 다각화를 위해서 마침 세컨드 라이프 사업에 뛰어들려고 하고 있었다. 세컨드 라이프는 문자 그대로 제2의 인생을 말한다. 온라인에서 이루어지는 세컨드 라이프 가입자가 전 세계적으로 2000만 명이 넘고 각 나라가 대사관까지 다투어 개설하고 있다고 했다. 장은숙에게 최재원과 연결시켜주면 서로에게 좋은 일이 될 것이다. 장은숙은 돈이 많지만 남자가 없고 최재원은 돈도 없고 여자도 없다.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국내에서 가장 뛰어난 IT 전문기술뿐이었다. 최재원은 얼마 전 부인과 이혼을 했다. 부인이 화가인데 호스트바에 갔다가 경찰의 일제단속에 걸려 9시 뉴스에 나오는 바람에 이혼을 하게 된 것이다. 그 문제로 한동안 학교가 떠들썩했었다.
‘남자들은 룸살롱에 가면서 여자들은 호스트바에 가면 왜 이혼을 당해야 돼?’
주애란은 최재원이 마땅치 않았으나 그들 부부의 일에 감 내놔라 대추 내놔라 할 필요가 없었다.
“장 여사, 우리 대학교수를 소개해 줄게 모레쯤 시간을 내봐요.”
장은숙은 이상희를 통해서 만난 일이 있다.
“좋은 일인가요?”
“그럼요. 사업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분이에요.”
“알았어요. 저녁에 만나기로 해요.”
저녁때가 되자 헨리 제이콥스로부터 연락이 왔다. 주애란은 지난번의 황홀했던 기억이 먼저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렇게 오랫동안 사랑을 나눈 것은 처음이었다. 오늘은 남편도 집에 없으니 그와 사랑을 나누더라도 일찍 들어가야지 하고 생각하면서 호텔 식당에서 제이콥스를 만났다. 제이콥스는 빅스타와 관련이 있는 인물이다. 제이콥스는 일식으로 식사를 하면서 김영택이 부국은행 합병을 추진하는 걸 막아달라고 부탁했다.
“김영택이 웬일인지 말을 듣지 않아요.”
주애란은 얼굴을 찌푸리면서 대답했다. 제이콥스는 캐주얼 차림이었다. 금발머리가 캐주얼에도 잘 어울렸다.
“그러면 김동철을 무너트린다고 협박을 해요.”
“그건 너무 심하지 않을까요?”
“아무튼 김영택은 절대로 부국은행 합병을 추진하면 안돼요.”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막을게요.”
주애란은 어쩐 일인지 자신이 제이콥스의 하수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와 즐길 화려한 섹스를 생각하자 하체에서 야릇한 감각이 꿈틀거렸다. 호텔에서 술과 식사를 마치고 룸으로 올라갔다. 주애란이 샤워를 하고 하얀 타월을 걸치고 나오자 제이콥스는 이미 붉은 와인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외국인들은 무드를 잡을 줄 알아.’
주애란은 와인을 마시고 침대로 올라갔다. VIP룸의 트윈침대는 쾌적했다. 실내공기는 맑고 조명은 은은했다. 주애란은 점점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제이콥스가 애무를 하지 않았는데도 술에 취한 듯 정신이 몽롱하면서 황홀한 전율이 혈관을 누볐다.
‘내가 왜 이러지?’
주애란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무엇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으나 황홀하면서도 감미로운 전율이 전신을 누비고 있었다. 몸이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렸다. 주애란은 술 탓이라고 생각했다. 저녁을 먹으면서 마신 소주와 와인이 화학작용을 일으켜 갑자기 취기가 오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이콥스는 옷을 벗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주애란은 옷을 벗고 그에게 다가갔다. 그가 손을 흔들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아이들이 기다리니까 빨리 끝내고 돌아가야 돼.’
주애란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의 의지에 지나지 않았다. 끝없는 쾌락과 짐승의 시간이 그녀에게 준비되어 있었다. 그녀는 시간이 정지되어 있기라도 하듯이 제이콥스와 알몸으로 뒹굴었다.
‘내가 어떻게 된 것일까?’
밤새도록 껴안고 뒹굴면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운 주애란은 새벽에야 정신이 돌아왔다. 호텔 바닥이 지저분할 정도로 어질러져 있었다. 주애란은 자신이 밤새 무엇을 했는지 뚜렷하게 기억하지 못했다. 몽롱한 기억 속에서 제이콥스와 뒤엉켰던 일만이 끊어진 필름조각처럼 반추되었다.
‘내가 정신이 이상해진 거야.’
주애란은 서둘러 옷을 입고 집으로 돌아왔다. 새벽에 돌아온 것이 다행이었다. 주애란은 거의 비틀대면서 아이들의 아침을 차리고 학교에 보낼 준비를 했다.
“어제 늦게 왔어?”
아이들이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주애란에게 말했다.
“그래. 어제 회의가 늦게 끝났어. 엄마가 늦게 와서 미안하구나.”
주애란은 아이들을 달래서 학교에 보내고 자신도 샤워를 했다. 금요일은 강의가 없지만 교수실이라도 지키는 시늉을 해야 한다. 아침 10시가 지나서 학교에 출근한 주애란은 학과 교수들과 미팅을 마치고 커피를 마셨다. 지난밤에 얼마나 격렬한 사랑을 나누었는지 아직도 하체가 얼얼했다.
‘내가 미친 것이 분명해.’
제이콥스를 만나고서부터 이상하게 절제할 힘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제이콥스를 만나게 되지 못할까봐 걱정이 되었다. 불안하고 초조했다. 주애란은 오후가 되자 호텔로 제이콥스를 만나러 갔다. 제이콥스가 잠을 자다가 뜻밖이라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맞아들였다.
“와인이나 한 잔 마셔요.”
제이콥스가 붉은 빛의 와인을 주애란에게 권했다. 주애란은 갈증이 났던 참이라 망설이지 않고 와인을 받아 마셨다. 제이콥스가 침대에 누워 손짓을 했다. 주애란은 옷을 벗고 그의 침대로 올라갔다. 제이콥스가 그녀를 눕히고 위로 올라왔다. 주애란이 팔을 뻗어 제이콥스를 안자 그가 주애란의 몸속으로 깊숙이 진입해 들어왔다.
‘아아 너무 황홀해.’
주애란은 몸이 허공으로 두둥실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