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택은 주애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국은행을 합병하겠다는 계획을 언론에 발표했다. 언론과 대부분의 금융인들이 새우가 고래를 잡겠다는 격이라면서 김영택에게 비난을 퍼부었고 부국은행 쪽에서도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교수님,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왜 갑자기 막가파식으로 나오는 거지?”
김영택은 야유하듯이 말했다. 주애란에게 끌려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주애란 같은 여자가 스스로 불구덩이 속에 뛰어들지 않으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누군가 보이지 않는 손을 뻗친 것이 분명하다.
“나도 좋아서 이런 짓을 좋아서 하는 거 아니야. 그러나 김 행장이 부국은행을 합병하겠다고 나서면 같이 죽을 수밖에 없어.”
주애란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비장감이 느껴졌다.
“진심이야?”
“진심이야.”
주애란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김영택은 전화기를 붙잡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주애란이 이렇게 나온다면 뭔가 큰 문제가 터진 것이다.
“무슨 일이 있는지 얘기해 봐.”
“전화로 얘기할 수 없어. 어디서 잠깐 만나는 것이 좋겠어.”
“좋아. 그럼 길상사에서 만나.”
“길상사?”
“옛날에 요정이었던 절 있잖아? 성북동에 있는 거. 거기가 비교적 조용해.”
길상사는 한때 대원각이라는 이름의 요정이었었다. 60년대는 정치인들이 몰려들어 기생들과 술을 마셨고 70년대는 일본인들이 기생관광을 왔던 곳으로 유명했다. 요정을 소유하고 있던 주인 여자가 조계종에 바쳐 절이 되었다.
“알았어.”
주애란이 전화를 끊었다. 김영택은 주애란의 목소리가 전과 달리 활기차지 않다고 생각했다. 주애란은 확실히 누군가의 협박을 받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주애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김영택은 전화를 끊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부국은행을 합병하는 일은 부총리 김동철을 설득하고 있는 중이었다. 김동철뿐이 아니라 대통령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영부인과 비서실장에게도 손을 쓰고 있었다.
‘어리석은 놈들. 내가 부국은행을 합병하려는 것인지 알아?’
김영택은 자신을 비난하는 금융계 인사들을 떠올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부국은행 쪽에서도 김영택에게 합병되지 않으려고 배수의 진을 치고 있었다. 부국은행 노동조합까지 동원하여 대통령 가까이에 있는 운동권 출신 참모들에게 손을 뻗고 있었다. 그들이 주애란을 협박했다면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행장님, 우리가 승산이 있을까요? 이쯤에서 손을 터는 것이 어떻습니까?”
김영택이 안락의자에 앉아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인사부장 출신의 박진우 전무가 행장실로 들어왔다. 김영택이 행장이 된 뒤 부장에서 전무로 발탁한 인물이다.
“미쳤어? 지금 포기하려면 시작도 하지 않았어.”
김영택은 박진우를 쏘아보면서 눈을 부릅떴다.
“잘못하면 너무 많은 사람이 다칠 것 같습니다.”
“왜 다쳐?”
“우리가 전방위로 로비를 하고 있는 사실이 언론이라도 알게 되면….”
“얼빠진 소리 하지 말아. 언론이 모르고 있을 것 같아? 기자들은 알고 있으면서도 기사를 쓰고 있지 않을 뿐이야.”
“누군가 검찰에 고발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박진우는 아직도 불안한 표정이 다.
“내부자 단속이나 잘해. 로비할 때 증거를 일체 남기지 말고.”
“전 언론이 제일 걱정입니다. 내부자가 기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면 문제가 커집니다.”
“기자들은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는 절대 기사를 쓰지 않아. 우리나라 기자들은 조직에 잘 길들여져 있어. 독단적으로 폭로기사를 쓰지 않아.”
“알겠습니다. 전 백성은행에 대해서 더 조사를 하겠습니다.”
박진우 전무가 고개를 숙이고 물러갔다. 김영택은 오후 스케줄을 취소하고 길상사로 달려갔다. 한때 기생들이 지분냄새를 뿌리면서 술과 웃음을 팔던 요정이었던 길상사는 한낮의 고요 속에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김영택이 산문으로 들어가자 주애란은 길상사 대웅전 앞의 느티나무 밑에 있는 벤치에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앉아 있었다.
“왜 그렇게 부국은행을 합병하려고 안달이야?”
“내가 그랬잖아? 내 꿈은 금융계의 황제가 되는 거라고….”
김영택은 검은색의 원피스가 감싸고 있는 주애란의 몸을 훑어보면서 말했다.
“단도입적으로 말할게. 몇 년이나 살고 싶어?”
“훗훗… 몇 년을 살다니? 지금 체력으로는 20년은 충분히 살 것 같은데. 교통사고로 죽지 않으면 말이야.”
“감옥에 가서 20년을 살고 싶어?”
주애란이 쌀쌀맞게 말했다. 김영택은 그때서야 주애란의 말이 감옥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누가 날 집어넣겠대? 내가 당하고 있을 것 같아?”
“반항을 하지 않으면 추징금으로 재산 모두 날리고도 감옥에서 2년은 썩겠지. 혼자 죽지 않겠다고 언론에 떠들어대면 괘씸죄가 추가되어 20년을 썩어야 할 거야.”
김영택은 주애란의 냉랭한 말에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저쪽에서 내 뒷조사를 하고 있는 모양이지?”
김영택은 부국은행이 만만치 않게 대응해 오고 있다고 생각했다.
“저쪽 누구?”
“부국은행이지 누구겠어?”
“잘못 짚었어. 부국은행 따위가 어떻게 나를 협박하겠어?”
주애란이 선글라스를 벗었다. 김영택은 주애란의 얼굴이 핏기가 없이 창백하다고 생각했다.
“대체 누가 협박을 하고 있다는 거야? 교수님이 왜 이렇게 의기소침해졌지?”
“흥! 우리가 갖고 있는 돈이나 힘은 아무 것도 아니야. 나는 함정에 빠졌어. 놈들이 나를 마약중독자로 만들어버렸어.”
“마약중독자?”
김영택은 주애란의 말에 경악했다. 주애란이 마약중독자가 되었다는 것은 금시초문이었다. 몇 달 동안 만나지 않았을 뿐인데 이런 변화가 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다.
“내가 마시는 맥주와 와인에 마약을 탔어. 나는 그것도 모르고 매일 같이 마약이 들어 있는 와인을 마신거야. 결국 중독자가 되어버렸어.”
김영택은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주애란처럼 도도하고 똑똑한 여자에게 마약을 복용하게 만들다니. 주애란을 협박하는 자들이 평범한 범죄 조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그런 짓을 했어?”
“블랙마리아.”
“그게 뭐야?”
“프리메이슨 같은 국제조직이야. 조직의 이름은 몰라. 그 조직이 우리나라에 IMF가 오게 만들었어.”
“소설처럼 음모론을 말하는 거야? 블랙마리아는 누구지?”
김영택은 주애란의 말이 공허하게 들렸다.
“그들 조직 행동대의 책임자래. 그 여자의 지시를 받고 세계 경제를 조종하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어. IMF 이후 외국인들은 우리나라에서 수십조 원의 국부를 탈취해 갔어.”
김영택은 주애란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부국은행을 인수한 뒤에 구조조정을 하고 5조 원의 순이익을 올릴 예정이야.”
“5조 원이라고? 어마어마한 숫자로군.”
“그들은 피도 눈물도 없는 자들이야. 그들은 내가 마약중독자라고 폭로하겠대.”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마약을 끊어야지. 이를 악물고 끊을 거야.”
주애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김영택은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부국은행을 합병할 생각은 없었어. 부국은행을 합병할 듯이 나서면 백성은행을 합병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판단했어.”
김영택은 일단 물러서는 시늉을 했다.
“그럼 합병 의사가 없는 걸로 알게.”
주애란이 안도하는 표정으로 벤치에서 일어섰다. 김영택은 주애란에게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주애란이 김영택의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