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길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나라가 망한다는 소문이 있어요.”
정민구 후보의 유세를 따라다니면서 취재를 하는 기종철에게 오미란이 말했다.
“정민구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들 주장일 뿐이야.”
“동영상 사고도 문제잖아요? 당선 되어도 임기 내내 고달프겠어요.”
이정길 후보는 과거에 증권 투기회사 사건의 동영상이 갑자기 공개되어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선거는 혼미한 양상으로 계속되고 있었다.
“어쨌거나 오늘이 마지막 유세네요.”
“밤 12시면 모든 선거운동을 중지해야 돼.”
밤 12시만 지나면 선거운동을 할 수 없고 내일 아침 6시면 투표가 시작된다. 정민구 후보는 명동에서 마지막 저녁 유세를 시작할 예정이었다. 지금은 저녁 식사 시간으로 수행원들과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기종철도 같은 식당 홀에서 오미란과 마주앉아 설렁탕으로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마지막 선거 유세니 어떤 폭탄선언이 나올 지 알 수 없었다. 지난 대통령선거에서도 단일화를 했던 한 후보가 갑자기 결별을 선언하면서 국민 여론이 분노하여 돌아선 것이다.
“유세 끝나면 내 아파트로 가요.”
오미란이 깍두기를 아작아작 씹은 뒤에 기종철에게 말했다.
“아파트에는 왜?”
기종철은 오미란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건성으로 묻다가 아차 하는 생각을 했다. 오미란이 약간 쌀쌀한 눈빛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유세하는 동안 쉬지도 못했잖아요?”
“내일 아침부터 취재를 해야 돼.”
후보들은 아침 일찍 투표를 하기 때문에 그것을 취재해 보도해야 했다.
“그래도 좀 쉬어요. 누가 잡아먹나.”
잡아먹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오미란이 과도하게 친절하게 대해주기 때문에 그것이 문제였다. 기종철은 여차하면 오미란이 결혼을 하자고 달려들까 봐 걱정이었다.
“알았어.”
기종철은 오미란을 향해 웃어주었다. 정민구 후보는 저녁 식사가 끝나자 명동에서 즉석 유세를 하기 시작했다. 이정길 후보는 광화문에서 유세를 하고 있었다. 정민구 후보는 명동에서 유세를 한 뒤에 광화문으로 옮겼다. 이정길 후보는 학생들이 많은 신촌과 홍대 앞, 그리고 성신여대 앞에서 최종 유세를 했다. 정민구 후보는 홍대 앞, 신촌, 흑석동에서 유세를 했다. 기종철은 마지막 유세까지 따라다니면서 취재를 했으나 특별한 이슈거리가 나오지는 않았다.
“휴. 이제 겨우 유세가 끝났군.”
기종철은 대통령선거 유세가 완전히 끝나자 오미란의 아파트로 향하면서 하품을 했다. 기사는 그때그때 노트북으로 송고를 했기 때문에 밤 12시에 회사로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거리는 인적이 끊어져 있었다. 그러나 기종철은 오랫동안 선거 유세를 쫓아다녔기 때문에 나른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샤워하고 나와요. 간단한 안주거리 준비할게.”
아파트 거실로 들어가자 오미란이 파자마를 가지고 나오면서 말했다. 오미란의 아파트는 여자 혼자 사는 집답게 아늑하고 인테리어가 섬세했다. 기종철은 옷을 벗고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했다. 후보들도 지금쯤 샤워를 하고 있을까. 오랫동안의 선거 유세로 후보들도 지치고 지쳐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밤과 개표가 시작되는 내일 밤에는 결코 잠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욕실에서 나와 텔레비전을 틀자 마지막 뉴스가 방송되고 있었다.
“나도 샤워할게. 우선 목을 축이고 있어.”
오미란이 소시지와 오이, 계란프라이로 간단한 안주거리를 만들어 맥주와 함께 거실의 탁자에 놓았다. 기종철은 소파에 앉아 맥주를 따라서 한 모금을 마셨다. 샤워를 하고 마신 탓인지 시원한 맥주가 목으로 넘어가면서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맥주 시원해?”
오미란이 샤워를 하고 나온 것은 기종철이 맥주 두 잔을 혼자서 비웠을 때였다. 오미란이 옆에 앉자 풍성한 머리숱에서 향긋한 샴푸냄새가 풍겼다.
“응. 잠이 잘 오겠어.”
기종철은 오미란의 허리를 안아서 키스를 했다. 실크 네글리제 하나만 걸친 오미란의 몸이 닿자 새삼스럽게 세포들이 즐거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기종철은 새벽 2시가 되어서야 잠이 들었고 새벽 5시에 일어났다. 후보들이 투표를 하러 나오기 전에 투표소에 먼저 가 있어야 했다. 오미란은 커피를 끓여주고 아침은 집에서 먹으라고 차려주지 않았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입니다.”
기종철은 오미란의 아파트로 와서 아침을 먹고 신문사로 나갔다. 신문사에서는 동영상 사건과 관계없이 이정길 후보가 당선이 확실시된다고 예측하고 있었다. 기종철은 오미란의 아파트에 돌아와 쉬었다. 오미란은 신문사에 출근하지 않고 집에서 텔레비전으로 투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신문사는 언제 사표 낼 거야?”
기종철은 오미란의 옆에 앉아서 물었다. 오미란은 신문사를 그만두고 출판사를 차릴 예정이었다.
“내일 사표를 낼 거야.”
오미란이 기종철의 가슴에 어깨를 기대면서 대답했다. 텔레비전은 국민들이 투표하는 모습을 지루하게 방송하고 있었다. 기종철은 투표가 끝날 때까지 오미란과 뒹굴다가 저녁 6시가 넘자 정민구 후보 캠프의 상황실로 갔다. 방송은 벌써 출구조사 발표를 하느라고 떠들썩했다. 정민구 후보는 집에서 쉬고 있었다. 상황실에서는 긴장감과 기적을 바라는 선거운동원들의 표정이 무겁게 흐르고 있었다. 텔레비전의 화면을 통해 보이는 이정길 후보의 상황실은 승리한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인지 밝아보였다.
이내 개표가 시작되었다. 이정길 후보가 처음부터 근소한 차로 앞서기 시작하더니 시간이 흐를수록 리드하는 폭이 넓어졌다. 정민구 후보의 상황실에 모인 선거운동원들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정민구 후보는 밤 10시가 되어서 상황실에 나타나 개표방송을 지켜보는 요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면서 격려했다.
“여러분,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것입니다.”
정민구 후보는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명대사를 인용해 착잡한 표정으로 선거운동원들과 상황실 요원들을 격려한 뒤에 집으로 돌아갔다. 그때는 이미 이정길 후보와 50만 표 이상 벌어져 있었다. 밤 12시가 되자 격차가 더욱 벌어져 이정길 후보가 200만 표 이상을 앞서 당선이 확실시되었다.
“제기랄, 국민들이 너무해!”
상황실 요원 누군가가 분통을 터트렸다. 정민구 후보의 선거운동원들 중에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상황실에 앉아 있던 여당의 고위 간부들도 침통한 표정으로 귀가했다.
‘끝났군. 새로운 사람이 이제 대통령이 되겠어.’
기종철도 상황실에서 나와 귀가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집으로 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이정길 후보 상황실 쪽으로 갔다. 이정길 후보의 상황실이 설치되어 있는 당사 앞 광장에는 벌써 수많은 시민들이 모여들어 이정길을 연호하고 있었다. 이정길 후보 쪽은 완전히 축제 분위기였다.
밤 12시가 조금 지나자 이정길 후보가 나타났다. 사람들이 두 줄로 갈라서 이정길 후보를 맞이하면서 환성을 질렀다. 이정길 후보는 만면에 미소를 짓고 손을 흔들어 시민들의 환호에 답했다. 그를 수행하는 사람들도 쟁쟁한 국회의원들이었다.
“여러분, 우리는 10년 만에 정권교체를 이루었습니다. 마침내 잃어버린 10년을 되찾았습니다. 우리는 이제 새 시대를 열어가야 할 것입니다.”
이정길 후보가 즉석연설을 하자 박수소리가 물결처럼 쏟아졌다. 승리자의 자신에 넘친 목소리였다. 광장은 열기와 흥분이 넘치고 있었다. 이정길 후보가 상황실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기종철은 오미란의 아파트로 돌아왔다.
“집에 간다더니 어떻게 우리 집으로 왔어?”
오미란이 문을 열어주면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오늘은 쉽게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내가 재워주기를 원해?”
오미란이 눈을 빛내면서 기종철의 목에 팔을 감았다.
“응. 미란이 품속에서 잠들고 싶어.”
“젖 먹여서 재워줄게.”
오미란이 깔깔대고 웃음을 터트렸다. 기종철은 그날 밤 오미란의 품속에 아기처럼 안겨서 잠을 잤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