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관련 조사관 배제하고 검찰과 경찰, 민간조사관으로 구성...행정 조치나 검찰 고발도 가능
약 3만 9000여 명. 1948년 국군 창설 뒤 2012년 12월까지 66년 간 군 복무 중 사망한 비순직 군인의 숫자다. 한 해 평균 600여 명이 전투와 관련없이 각종 사건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이들은 한국전쟁과 베트남전 등 전투에서 순직한 군인들과는 다르다. 모두 국가로부터 아무런 예우도 받지 못한 채 사라졌다. 그리고 그 중 일부는 기록도, 흔적도 보존되지 않아 아직도 죽음의 원인조차 모른다.
서울 용산구 국방부 앞 윤일병 추모제. 군 의문사 희생자 부모들이 자식의 영정을 든 채 슬픔에 잠겨 있다. 윤일병 사건 진정이 이번 군의문사위에 접수됐다. 사진=일요신문DB
3만 9000여 건의 군 의문사는 국군 역사와 함께 차곡차곡 쌓여 왔다. 폐쇄적인 군 조직을 제외하면 어느 곳에서도 발생할 수 없는 특수한 사건들이다. 군은 특별조사와 진상규명 작업에 착수하면서도 왜, 어떻게 사망에 이르렀는지에 대해 ‘타살 혐의가 없으니 자살’이라는 일방적인 결론을 내놓고 사건을 종결해 죽음의 책임에서 회피했다. 심지어 ‘부모가 이혼해서’,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등의 이유로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며 그 책임을 유족에게 떠넘기기도 했다.
논란과 의혹의 꼬리표를 달지 않은 군 의문사는 한 건도 없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진상은 밝혀지지 않는다. 외부에 공개돼 사회적 공분을 사면서 여러 차례 재조사를 거친 ‘허원근 일병 사건’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건 31년 만이다. 법원은 ‘자살인지 타살인지 알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나마 허 일병 사건처럼 군 담장 밖을 넘어 법원 판결까지 내려진 사건들은 운이 좋은 편에 속한다. 3만 9000여 건의 다른 사망 사건 대부분은 논란은커녕 작은 의혹도 제기하지 못한다. 사고현장과 목격자, 참고인, 모든 증거들이 군 내부에 있고 담당 군 수사관을 만나거나 수사기록을 보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국방의 의무를 위해 아들을 군에 보냈다가 하루아침에 자식을 잃은 유족들이 할 수 있는 건 억울하고 답답하다고 말하는 것, 그게 전부였다.
# 진상규명에 초점 맞춘 2기 군 의문사위
2018년 9월 28일, 대통령 직속 군 사망사고 진상규명위원회가 공식 출범했다. 전에 없던 새로운 위원회는 아니다. 특별법이 제정돼 출범했음에도 별다른 주목도 받지 못했고, 기대치도 낮았다.
불신의 그림자가 짙어서다. 그동안 국방부가 운영해온 특별조사단과 진상규명위원회는 결과적으로 제 역할을 못했다. 1999년부터 2001년까지 운영된 ‘민원제기 사망사고 국방부 특별조사단’은 1980년 이후 1999년 9월30일까지 일어난 사망사고 가운데 민원이 접수된 사망사고 166건에 대해 조사했지만 20여 건을 순직 처리하는데 그쳤다. 타살 의혹이 제기된 사건이 많았지만 진상이 밝혀진 건 1건도 없었다.
2006년부터 2009년까지 활동한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2006년~2009년)’ 역시 접수된 600건 진정 가운데 절반도 채 못 미치는 246건에 대해 진상 규명 결정을 내렸다. 여기에 군 의문사위에서 ‘순직’으로 군에 통지한 것은 162건이지만 실제 군에서 재심의를 거쳐 인정한 것은 40건에 불과했다.
2기 격인 이번 군 사망사고 진상규명위원회는 불신의 그림자부터 걷어 냈다. 앞서의 특조단과 1기 군 의문사위는 군 헌병대가 재조사를 진행했는데, 선배가 맡았던 사건을 후배가 다시 조사하고 ‘군 규정’이라는 이유로 일방적이고 폐쇄적인 수사가 이뤄지는 등 부작용이 적지 않았다.
과거 군 의문사 재조사 과정과 결과에 대해 유족들의 불신의 목소리가 높았다. 사진=임준선 기자
이번 2기 군 의문사위는 군 관련 조사관을 배제하고 검찰과 경찰, 민간조사관으로 구성했다. 위원장은 장관급 지위를 갖고 상임, 비상임위원들은 법조계와 과학수사, 범죄심리학 교수와 전문가들이다. 강제조사권도 일부 갖고 있다. 사망 사건 가운데 가해자가 있을 경우, 동행을 명령할 수 있고 불응할 경우 위원회가 행정 조치나 검찰에 고발 할 수도 있다.
과거 특조단과 1기 군 의문사위와의 결정적인 차이는 조사 과정과 결론을 내는 방식에 있다. 고상만 군 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조사총괄과장은 “과거 특조단이나 1기 위원회는 결과적으로 순직 결정이라는 행정 절차를 위한 디딤돌에 불과했다. 유족들의 상처 치유를 순직 처리로 해결하려는 시도였던 셈이다. 심지어 순직 절차를 위해 정해진 예산 안에서 사건 처리 숫자와 비율을 조정하고, 예산을 넘어서면 다음해로 미루는 일도 있었다”며 “그러나 이번 위원회는 ‘진상규명’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사건 자체부터 그 전후 사정까지 모두 조사 대상이다. 과거엔 단순히 ‘타살’ ‘자해 사망’으로 결론 내는데 그쳤다면 이번 위원회는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그 선택을 하는 과정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까지 모두 투명하고 명확하게 밝혀내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현재까지 2기 군 의문사위에 접수된 200여 건의 진정서 가운데 절반은 이미 순직이 결정된 사건들이다. 그동안 군 의문사 유가족 단체들은 줄곧 “사망원인과 사망경위 및 과정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자식을 마음 편히 보내주고 싶다”고 요구해 왔다.
과거 위원회보다 순직 권고 범위도 더 넓어졌다. 2015년 군인사법 개정으로 최근 순직은 폭넓게 인정된다. 2012년 7월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한 자해 사망도 순직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바뀐 이후 수사를 못했거나,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것도 국가가 실패하고 책임지는 방향 등으로 점차 인정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 현재는 ‘군복을 입고 사망한 경우’ 대부분이 순직으로 인정된다. 징병제 국가에서 국민이 국방의 의무를 다했다면, 국가는 그에 대한 관리 의무와 책임이 있다고 군 의문사위는 강조한다.
# 국방부 간섭 없다
국방부도 위원회에 협조적이다. 대통령 직속 기관이라는 ‘타이틀’과 “외부기관의 의견을 존중하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지시를 떠나 국방부 차원에서 이번 진상규명 활동에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과거 특조단과 1기 위원회와 달리 2기 위원회가 권고하는 사항은 국방부 차원의 재조사나 재검토 없이 곧바로 수용하는 점이 대표적이다. 그동안 국방부는 특조단이나 1기 군의문사위의 권고를 받고도 재심의나 재조사 등을 거쳤다.
위원회가 요청하는 자료는 빠짐없이 받을 수 있도록 시스템도 구축되고 있다. 위원회 한 관계자는 “국방부는 이번 위원회 활동에 일절 간섭하지 않는다”며 “위원회를 통해 과거사와 관련된 오해를 풀고 싶어한다. 과거 군이 잘못한 부분은 잘못했다고 지적하고, 반대로 수사가 잘됐었거나 진상 규명이 명확했던 경우도 있는 그대로 공개해 달라고 했다”고 귀띔했다.
그밖에 군 의문사위는 제도 개선도 준비하고 있다. 조사를 통한 진상 결과와 별개로 군인들의 사망과 명예회복에 관련된 국제 규범, 사례 등을 조사해서 국제사회 인권기준에 걸맞은 권고를 할 방침이다.
군 의문사위의 진상규명 활동은 진정서가 접수돼야 가능하다. 현재까지 200여 건이 접수됐고, 공식 출범 이후 최근까지 매주 10~20건 씩 접수되고 있다. 최근 ‘윤일병 사건’이 진정으로 접수되기도 했다. 진정은 유족뿐만 아니라 함께 군 복무를 했던 동료와 지인, 사건 내용을 전해들은 사람들도 할 수 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
군 의문사는 ‘개죽음’...고통은 가족에게 확산 군 의문사 유가족들의 고통은 자식의 죽음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현장을 보고, 목격자와 참고인을 만나 ‘그날’의 진실을 알고 싶어 하지만 부대 안으로 발을 딛는 일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결국 시민단체와 국방부, 국회, 청와대로 민원을 제기해 보지만 답변은 결국 다시 사건이 일어난 부대로부터 받는다. 군으로부터 고소 고발을 받는 일도 적지 않다. 억울함과 답답함을 과격하게 표현하면서 폭행이나 공무집행방해 혐의를 받는 일뿐만 아니라, 진상을 밝히기 위해 장례절차를 미루면 군에서 사체인도소송과 가압류를 걸기도 한다. 유족들은 집과 자동차, 월급과 바꿔 법적 절차, 진상규명 활동을 병행한다. 군 의문사에서 비롯된 죽음의 고통은 온 가족에게 번진다. 진상 규명 시간이 길어지면 몸이 상한다. 어머니가 정신분열증으로 고생하는 모습을 보는 여동생, 줄담배를 피우다 결국 폐암에 걸려 아버지를 잃은 형 등 모두 실제 사례다. 진상규명 활동 자체를 하지 않는 유족들도 있다. 이혼과 가정형편 등을 이유로 자식의 죽음을 자기 탓으로 돌린다. 이들은 유가족 단체가 찾아가 함께 활동을 요청해도 “여러분과 저는 다릅니다. 저 때문에 아이가 세상을 떠났습니다”라고 말한다고 한다.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라는 말은 그들에게 들리지 않는다. 고상만 조사총괄과장은 군 의문사를 ‘개죽음’이라고 표현한다. 거친 표현이지만, 국어사전을 보면 ‘아무런 보람이나 가치가 없는 죽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명시돼 있다. 본인으로부터 시작해 유족들에게까지 확산되기만 하는 죽음, 이만큼 정확하게 군 의문사를 표현하는 말은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조 과장은 이번 위원회의 중심은 유가족에 있다고 말한다. 그는 “유족들이 원하는 건 순직 처리를 떠나 진상이다. 내 자식이 군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적어도 왜, 어떻게 그렇게 됐는지는 알아야 보내줄 수 있다”며 “하다못해 자동차 사고가 나도 보험사를 부르고 경찰을 부르고, 도로를 막아도 이해하고 돌아가는데 군에서 사람이 죽으면 이런 절차는커녕 예우도 없었고 처리도 쉽지 않았다. 유족들이 이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위원회 중심은 유가족에 맞춰 운영된다. 가족 사건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건 유족들이다. 조사관들이 직접 대응하고 적극적으로 사건에 대해 물어본다. 어떤 부분에 대한 조사가 필요한지부터 결과, 이후 보완할 점 등을 물어보고 다시 답해준다. 그게 기본 방침이다. 유족이 제기한 의혹 외에 유족이 몰랐던 새로운 사실을 찾아내서 그걸 하나라도 더 알려주는 게 위원회의 목표다”라며 “21년째 군 의문사 활동을 해왔는데 여러 번 재조사한 사건들도 진상이 밝혀지거나 사건이 해결되기보다 논란만 이어졌다. 비슷한 위원회를 여러 번 구성한다는 지적도 있지만, 가장 효율적인 건 조사 많이 하면서 논란만 남기는 것보다 한 번 제대로 조사해서 확실하게 매듭짓는 것이다. 국민의 의무를 다했다면 국가도 의무를 다해야 한다. 이 당연한 상식이 제 자리를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 |
고상만 조사총괄과장은?... 군 의문사 진상 규명 활동 독보적 역할 고상만 조사총괄과장은 군 의문사 진상 규명 활동에서 독보적인 역할을 해왔다. 고 과장은 1992년부터 최근까지 인권운동을 해왔다. 첫 발은 1992년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 대책위원회’ 간사를 맡으면서 내디뎠다. 군 의문사 진상 규명은 1998~99년 천주교 인권위원회 시절 ‘판문점 김훈 중위 사망 사건’을 조사하면서부터다. 김훈 중위 사건 이후로 ‘군 의문사’라는 단어가 생겨났다. 고상만 군 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조사총괄과장. 사진=문상현 기자 2002년부터 2년간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군 의문사 조사관으로 활동했다. 1960~70년대 민주화운동가 장준하(1918~75) 선생의 의문사 사건도 집중 조사했다. 이 때문에 국내에서 장준하 의문사 사건을 가장 깊이 파헤친 인물로도 꼽힌다. 김광진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서도 일했다. 고 과장은 이때 앞서의 비순직 군 사망자 3만 9000여 명을 군 역사상 처음으로 집계했다. 짧막한 이 통계는 지금까지도 주요 근거자료로 사용되고 있다. 5개로 흩어져 있던 유가족 단체를 모아 하나의 목소리를 내도록 하기도 했다. [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