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작·갑질·접대 등 숱한 사건사고…고개 숙였으나 권력은 내놓지 않아 ‘무책임’
그동안 국회 국정 감사에서 측근 인사와 선수촌 내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 점을 지적받았던 이 회장은 최근 선수촌 내 성폭력 사건이 폭로되면서 책임론과 사퇴 여론에 벼랑 끝 행보를 보이고 있다. 바람 잘 날 없는 대한체육회 수장, 이기흥 회장한테 어떤 ‘적신호’가 켜진 것일까.
최근 선수촌 내 성폭력 사건이 폭로되면서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이 책임론과 사퇴 여론에 직면했다. 박은숙 기자
쇼트트랙 선수인 심석희의 용기 있는 고백으로 시작된 체육계 미투 운동이 유도는 물론 태권도, 정구 종목에까지 확대되고 있다. 그동안 침묵하던 대한체육회 이기흥 회장은 15일 이사회에 앞서 공식 입장을 밝혔다. ‘합숙소에 CCTV를 늘리겠다’ ‘선수촌에 여성 부촌장을 기용하겠다’ ‘성폭력 조사를 전적으로 외부 기관에 맡기겠다’ ‘선수 육성 시스템의 근본적인 개선 방안을 마련하겠다’ 등등 다양한 쇄신안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 회장의 쇄신안은 이미 오래 전부터 반복됐던 내용과 대동소이하다.
이 회장은 이날 체육계 폭력 및 성폭력 사태에 대해 공식 사과 및 쇄신안을 발표하면서 “후원을 해주신 기업인 여러분께도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전했다. 중차대한 상황에서도 대한체육회 후원사를 챙기는 수장의 여유를 보인 것이다.
체육인들은 물론 시민 단체에서 이 회장의 사퇴를 요구하는 이유는 한 가지. 무책임함이다. 그동안 논란이 일어날 때마다 고개를 숙였지만 이 회장은 자신의 권력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법명이 보승(寶僧)인 이 회장은 1985년부터 이민우 신민당 총재 비서관을 지냈고, 1989년 레미콘 제조업체인 (주)우성산업개발을 경영하며 부를 축적했다. 2000년 대한근대5종연맹 부회장을 맡으면서 체육계와 인연을 맺었고, 2010년에는 수영연맹 회장을 맡았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과 2012년 런던 올림픽 때는 선수단장을 역임했다.
2005년 이 회장은 관급공사 수주 청탁 명목으로 건설업체로부터 수억 원의 금품을 받고, 회사자금을 횡령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1심에선 징역 5년, 2심에선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는데 대법원에 상고했다가 2007년 12월 돌연 상고를 포기했다. 그리고 일주일 후 이 회장은 법무부의 특별사면 대상에 포함되면서 사면 복권됐다.
이 회장이 대한수영연맹 회장을 맡을 당시 수영연맹은 박태환의 런던올림픽 포상금 5000만 원을 지급하지 않아 여론의 뭇매를 맞았고, 연맹 임원들이 온갖 비리를 저지르는 바람에 2016년 3월 대한체육회의 관리단체로 지정된다. 이 회장은 이후 사퇴 수순을 밟았다.
흥미로운 것은 이 회장이 그 해 10월 대한체육회장 선거에 출마했고 당선됐다는 사실. 선거인 명부 조작 의혹이 불거졌고, 체육회 요직에 측근들을 배치했다는 지적도 받았다. 급기야 2017년 6월에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 후보에 ‘셀프 추천’을, 2018 평창 동계 올림픽에서는 자원봉사자를 상대로 갑질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2018년 10월, MBC TV 탐사기획 ‘스트레이트’는 방송을 통해 태광그룹 계열사인 골프장 휘슬링락에서 정관계 인사와 전·현직 경제관료 등을 대상으로 전방위 골프 접대가 진행됐다고 보도했다. 방송에 따르면 임태희 전 대통령실 실장, 이귀남 전 법무부 장관, 김종훈 전 의원, 노대래 전 공정거래위원장, 김수일 전 금융감독원 부원장, 최규연 전 조달청장 등 정관계 인사들이 휘슬랑락에서 골프를 친 비용 대부분을 태광그룹 측이 제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이기흥 회장이 이들 중 일부 인사들을 초청해 총 5차례 비용을 결제했는데 4번은 휘슬링락 골프 상품권을, 1번은 태광그룹이 150만 원을 결제했다고 소개한 것. 당시 이 회장은 태광그룹 골프 접대 의혹과 관련, “조계종 불자 신도회 분들과 다녀온 것”이라며 정재계 연루 의혹을 완강히 부인했다. 그러나 체육계에서는 대한불교조계종 중앙신도회장이기도 한 이 회장이 골프 상품권을 이용해 태광그룹과 정관계 인사들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했다고 의심했다.
이기흥 회장은 스스로 물러나지 않는 한 파면되지 않는다. 대한체육회가 국가올림픽위원회(NOC)로서의 지위를 함께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은 지난해 1월 24일 평창올림픽 선수단 결단식 모습. 임준선 기자
이 회장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체육계 인사 A 씨는 기자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이 회장은 수천억 원대의 자산가다. 그러나 한 가지 부족한 게 있다면 권력과 학벌이다. 방송통신대를 졸업하고 충남대 행정대학원을 수료한 그는 행시 출신의 관료, 판검사들과 인맥을 넓히는 데 주력했다. 그런 부분이 태광그룹 골프 접대로 터진 것이다. 이 회장이 체육인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는 회장 당선 직후 선거 캠프에서 자신을 도왔던 일부 인사들을 대한체육회로 끌어 들이면서 문제를 확산시켰다는 이유 때문이다. 자신한테 듣기 좋은 소리만 하는 인사들을 중용하고, 회장의 신임을 받은 대한체육회 고위 인사들의 전횡이 심하다는 불만도 확산됐다. 이 회장은 그걸 통제하지 못했다. 인간적인 매력과 보스 기질을 가진 인물임은 분명하지만 주위에 똑똑한 사람이 없다는 것도 그가 가진 함정이다.”
이 회장은 최순실-김종 등 적폐 세력이 활개 치던 시절, 드라마처럼 ‘체육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지금 여권인 당시 야권이 그를 지지했고, 촛불 혁명으로 정권이 바뀌면서 이 회장은 호랑이 등에 날개를 달듯 훨훨 날았다. 그런데 지금은 예전 적폐들처럼 거센 사퇴 요구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이 회장은 스스로 물러나지 않는 한 파면하거나 해임할 수 없는 신분이다. 대한체육회가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공공기관일 뿐만 아니라 국가올림픽위원회(NOC)로서의 지위를 함께 갖고 있기 때문이다.
IOC의 ‘올림픽 헌장 27조 6항’에 따르면 ‘국가올림픽위원회는 정치·법·종교·경제적 압력을 비롯한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자율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이 규정을 위반할 경우 IOC는 해당 국가의 자격을 정지시킨 뒤 국제 스포츠 행사 참가를 금지해왔다. 실례로 쿠웨이트 정부가 올림픽 헌장을 어기고 자국 올림픽위원장을 비롯해 경기단체장들을 직접 임명하는 바람에 IOC로부터 징계를 받자,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쿠웨이트 선수단은 자국 국기 대신 올림픽기를 들고 입장했다. IOC가 올림픽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각국 NOC의 자율성을 철저히 보호하는 상황에서 대한체육회를 관리·감독할 권한이 있는 문체부가 이 회장을 임의대로 해임시킬 수는 없는 것.
앞서 언급한 체육계 인사 A 씨는 “김종 전 차관이 비난받았던 과정을 이 회장이 그대로 답습하는 모양새”라면서 “체육인들로부터 신뢰를 잃은 이 회장이 회장직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한 대한체육회 관련된 분란은 끊이지 않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2016년 3월 대한체육회와 국민생활체육회 통합 이후 그 해 10월 대한체육회 수장으로 당선된 이 회장의 임기는 2021년 2월까지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