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칼엔 ‘제한적 주주권’ 조양호 이사 유지 가능성 커…‘저배당 블랙리스트’ 남양유업엔 역공 당해
전북 전주시 국민연금공단 본사 전경.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도 지난 1월 23일 청와대에서 열린 공정경제추진전략회의에서 “앞으로도 정부는 대기업 대주주의 중대한 탈법·위법에 대해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코드(기관투자자의 의결권 행사 지침)를 적극 행사해 국민이 맡긴 주주의 소임을 충실하게 이행하겠다”고 말하며 주주권 행사에 힘을 실었다.
오는 3월 정기주주총회를 앞두고 한진칼 외에도 네이버, 대림산업 등 여러 기업의 이름이 오르내리자 많은 이들이 국민연금의 향후 행보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현재 상황을 보면 나서지 않으니만 못한 꼴이 됐다.
가장 화제가 됐던 대한항공·한진칼에 대한 주주권 행사 여부 안건을 논의한 국민연금 최고의결기구 기금운용위원회(기금위)가 지난 1일 서울 플라자호텔에서 열렸다. 회의는 4시간 20분에 걸쳐 진행됐다. 그 결과 한진칼에 대해 ‘제한적 범위’ 내에서 적극적 주주권을 행사하기로 했다. 기금위는 오는 3월 열리는 한진칼 주총에서 회사 정관에 ‘임원이 횡령·배임을 저질러 금고 이상의 형이 확정되는 경우 임원직에서 자동 해임된다’는 내용의 정관 변경 안건을 제출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사해임, 사외이사 선임, 의결 대리행사 권유 등 다른 적극적 주주권 행사는 하지 않기로 했다. 국민연금이 추진하는 정관 변경이 이뤄지면, 조양호 회장은 현재 기소된 재판 결과에 따라 한진칼 등기이사에서 자동 해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한항공에는 주주권을 행사하지 않기로 했다. 국민연금이 지분 11.56%를 보유, 자본시장법의 10%룰에 따라 ‘단기 매매차익반환 대상’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은 적지 않다. 기금위 회의에 앞서 열린 기금위 산하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수탁위)의 논의에서도 주주권 행사 분과 9명 위원 중 7명이 대한항공과 한진칼에 대한 적극적 주주권 행사를 반대했을 정도다. 당초 상당수 수탁위 위원이 진보 성향 단체 추천을 받은 만큼 의외의 결과라는 반응이 많았다.
조양호 회장이 이미 경영권과 지배구조를 공고히 해 견제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제기되기도 한다. 한진칼이 지난해 12월 단기차입금을 기존 1650억 원에서 3250억 원으로 늘려 자산총액 2조 원을 넘기는 방식으로 경영권 방어에 나섰기 때문. 상법상 자산총액 2조 원 이상이면 상근감사가 아닌 최소 3명 이상의 감사위원이 속한 감사위원회를 설치한다. 이 경우 출석주주 50%, 발행주식 전체의 25%의 찬성만 얻으면 된다. 지분 28.93%를 가진 조양호 회장 측이 이사자리를 뺏길 가능성이 적어진 것이다.
국민연금이 두 번째로 주주제안을 한 남양유업은 아예 정면으로 반박했다. 남양유업은 ‘대리점 밀어내기 갑질’ 등으로 한동안 논란이 된 기업이다. 국민연금 수탁위는 회의를 통해 지난 7일 남양유업에 ‘배당정책 심의위원회 설치’를 골자로 하는 정관변경을 요구했다. 앞서 국민연금은 남양유업을 2016년 6월 대화 대상기업, 2017년 비공개 중점관리기업으로 지정했다. 그리고 지난해 5월 공개 중점관리기업으로 지정해 ‘저배당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바 있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임준선 기자
남양유업의 역공을 받은 국민연금은 마찬가지로 저배당 블랙리스트에 오른 현대그린푸드에 대해서는 고심 끝에 스튜어드십코드 적용을 하지 않기로 했다. 국민연금 수탁위는 지난 14일 주주권행사 분과위원회를 통해 현대그린푸드에는 주주제안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현대그린푸드 역시 지난 2015년부터 과소 배당성향 문제를 지적받아온 데 이어 지난해 5월 저배당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오른 바 있다.
국민연금은 지난해 말 기준 현대그린푸드 지분 12.82%를 보유해 2대 주주에 올라 있다. 최대주주는 현대백화점그룹 정교선 부회장(23.0%)과 정지선 회장(12.7%) 등 오너 일가와 특수관계인으로 총 37.7%를 갖고 있다. 이에 따라 현대백화점그룹의 실질적 지주사 역할을 하고 있다.
국민연금은 현대그린푸드를 중점관리기업 명단에서도 빼기로 했다. 수탁위 측은 “최근 현대그린푸드가 수립한 배당정책이 예측 가능성을 지녔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실제 현대그린푸드는 국민연금이 남양유업에 정관변경을 요구하는 모습을 보고 즉각 대응했다. 지난 8일 현대그린푸드는 “배당에 대한 투자자 예측 가능성 제고를 위해 2018~2020년 사업연도의 배당성향을 종전 6.2% 대비 2배 이상 높은 13% 이상으로 유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재계 관계자는 “국민연금 입장에서는 남양유업의 주주제안 반대 의사에 적잖이 당황했을 텐데 이런 상황에서 현대그린푸드마저 비슷한 주주제안에 대해 반대 입장을 내면 처음 스튜어드십코드 적용 선전포고가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며 “이런 상황에서 현대그린푸드가 선제적으로 반응해 개선책을 마련하니 국민연금도 체면치레하면서 출구전략을 짤 수 있었다“고 해석했다.
국민연금의 처음 엄포와 달리 기업들에 큰 영향을 미치진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수탁위 한 관계자는 “문재인 대통령까지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코드 적극 행사를 언급했는데, 보건복지부나 국민연금, 위원들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며 “이 상태로 가면 결국 이번에도 공염불로 끝날 것 같다”고 우려를 표했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