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나고 힘들어도 스스로 극복하려는 노력만이 내 길”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 오연지. 임준선 기자
[일요신문] 과거 세계 복싱 무대에서 대한민국이 강국으로 통하던 시절이 있었다. 아시안게임이 열리면 10개 이상의 메달을 쓸어담기도 했다. 하지만 복싱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고 선수층이 얇아지며 하락세를 걸어왔다. 지난해 여름을 뜨겁게 달궜던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는 오연지가 여자 복싱 60kg 이하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는 대한민국 복싱의 유일한 메달이기도 했다.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오연지는 지난 25일 열린 코카콜라 체육대상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어느덧 한국 복싱 간판으로 부상한 그를 ‘일요신문’이 만나봤다.
아시안게임에서 그의 선전에 일각에서는 ‘오연지가 대한민국 복싱을 살렸다’는 말이 나왔다. 최근 국제대회를 바라보는 대중들의 시각은 바뀌고 있는 추세다. 결과보다 선수들의 노력과 그 과정이 더욱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행정 분야에서는 여전히 결과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 인사는 “오연지 금메달이 아니었으면 복싱은 체육계에서 목소리를 내기가 더욱 힘들어졌을 것”이라며 “이를테면 국가대표 선수촌 입촌 일수나 인원 등이 줄어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 아시안게임 금메달이라는 결과로 이런 것들이 현상유지 될 수 있었다”고 귀띔했다.
이에 대해 오연지는 쑥스러워하며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꼭 결과를 내고 싶은 대회였기에 최선을 다했고 좋은 결과가 나와서 기뻤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링 위에서는 매섭게 상대에게 달려드는 그이지만 평상시엔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이다. 시상식에서도 다양한 사진 포즈를 취해달라는 요청이 있었지만 유난히 어색해 하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그는 복싱 동작을 취하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김서영(수영), 이대훈(태권도), 남현희(펜싱) 등 스포츠 스타들과 함께 참석한 시상식. 임준선 기자
오연지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아마추어 스포츠 시상식에 초대될 수 있었던 이유는 역시나 아시안게임 금메달이다. 그는 지난해 여름 아시안게임을 떠올리며 “그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대회가 아닐까”라며 “대회에 출전하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웠다. 대진이 어려웠기에 크게 욕심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 게임, 한 게임에 최선을 다하자는 마음이었다. 결승전을 마치고 심판이 내 손을 들어주는 순간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오연지는 국내에서만큼은 적수가 없는 1인자다. 전국체전에서 여자 복싱 종목이 탄생한 2011년부터 지난해까지 8년 연속으로 금메달을 독식해 왔다. 하지만 국제대회로 무대를 옮기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소속팀 인천시청 복싱팀에서 오연지를 지도하고 있는 김원찬 감독은 “연지는 2015년, 2017년 아시아선수권에서 2연패를 한 선수다. 그렇다고 해서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예상하지는 않았었다. 토너먼트에서 연지가 이긴 선수 중에는 세계선수권 우승자도 있었다”면서 “복싱은 붙어봐야 아는 것이다. 육상이나 수영처럼 기록을 측정하는 종목이 아니기 때문에 6대를 때리고 10대를 맞아도 이길 수도 있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2011년부터 국내 챔피언자리를 놓치지 않은 그이지만 유독 국제 종합대회와는 인연이 없었다. 올림픽, 아시안게임 예선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억울한 일을 당하기도 했다. 그는 “운동을 시작하고 초반에는 주변에서 ‘복싱보다 다른 운동을 했어야 했다’는 이야기도 많이 했다. 경기도 잘 풀리지 않으면서 좌절감이 들고 내가 짓밟히는 느낌이 들었다”면서 “그런 와중에도 할 수 있다고 격려해 주시는 분들이 있었다. 그런 말을 듣고 힘을 내며 포기하지 않았다. 복싱선수로서 꾸는 꿈이 있어서 참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오연지는 “물론 그런 좌절을 겪으면 힘들다”며 “그래도 또 다른 성과를 내면서 다 잊게 된다. 복싱을 하면서 얻는 성취감이 크다”고 했다. 힘든 과정을 이겨내는 방법은 오직 노력이었다. 그는 “남을 이기려하지 않고 나 자신을 극복하려 했다. 사실 겁이 많은 성격이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타협하지 않고 나를 다잡으려 노력한다. 그러다보면 겁이 없어지는 것 같다. 그동안 노력했던 과정을 돌아보며 지금은 겁 없이 자신있게 경기에 나간다”고 말했다.
인터뷰에 나선 오연지와 김원찬 인천시청 복싱팀 감독. 임준선 기자
하지만 감독의 눈에 선수가 100% 만족스러울 수는 없는 법이다. 김 감독은 아쉬운 점으로 ‘경기 내에서의 센스’를 꼽았다. “지켜보면서 안쓰러운 점은 그렇게나 열심히 하는데 센스가 부족하다는 것이다(웃음). 주먹이 날아오면 교묘하게 피하면서 때리고 해야 하는데 이런 부분은 센스가 필요하다. 이걸 가르쳐 주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옆에서 이를 듣던 오연지는 “저는 센스가 있다고 생각하는데…”라며 웃었다.
또한 김 감독은 제자의 센스를 지적하면서도 “연지가 공을 잘 찬다”며 새로운 면을 귀띔했다. 그는 “운동신경이 있어서 그런지 공을 잘 차더라. 축구를 좋아해서 그런지 아까 시상식장에서 나하고는 사진 안 찍고 축구감독(김학범 감독)하고는 사진을 찍더라”라며 웃었다. 지난해 아시안게임 당시 시간이 나면 축구 경기장에서 김학범 감독이 이끌던 축구대표팀을 응원했던 추억을 소개하기도 했다.
지난해 아시안게임 금메달, 세계선수권 동메달이라는 성과를 올린 오연지의 시선은 이제 2020 도쿄올림픽을 향하고 있다. 모바일 메신저에 ‘준비하자 동경올림픽!’이라는 문구를 남겨 놓은 김원찬 감독 또한 마찬가지다. 김 감독은 “본인은 올림픽까지 앞으로 2년 정도 복싱을 더 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후엔 청와대 경호원에 도전해보고 싶어 하더라. 내 욕심 같아서는 5년 정도 더해서 전국체전 12연패를 달성했으면 좋겠지만”이라며 웃었다.
오연지는 향후 2년정도 더 선수생활을 지속할 뜻을 밝혔다. 임준선 기자
올림픽은 오연지가 선수생활을 결심하던 때 부터 ‘꿈의 무대’였다. 중학생 시절, 그저 운동을 위해 외삼촌이 운영하던 체육관을 찾아 복싱 장갑을 처음 꼈다. 취미로 생각하던 복싱이었지만 2012 런던올림픽때 여자 복싱이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다. 이후 그는 복싱선수로 올림픽 무대에 서는 꿈을 꿨다.
“앞으로 미련 없이 선수생활을 하고 싶다. 후회 없이 준비해서 올림픽이라는 무대에 서든 못 서든 그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고 싶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