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택구금’ 수준 조건부 보석 받아 ‘이럴 줄 알았다면 43일만 견딜걸’
이번 서울고법 형사1부(정준영 부장판사)의 보석 조건부 허가는 항소심 재판부가 새로 구성돼 구속 기한인 4월 8일까지 충분한 심리가 이뤄지기 어렵다는 현실적인 이유가 결정적이었다. 이번 보석 허가를 두고 법원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높지만 법조계에선 사실상 재판부가 외통수에 몰려 피치 못하게 허가를 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또한 ‘병보석’은 받아들여지지 않아 이 전 대통령 측에 무조건 좋은 일은 아니라는 얘기도 있다.
뇌물·횡령 등의 혐의로 1심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1년 가까이 구속되어 있었던 이명박 전 대통령이 6일 오후 서울 송파구 동부구치소를 나서고 있다. 임준선 기자
# ‘10억짜리 짧은 외출’ 될 뻔했던 석방 첫날
349일 만의 석방이 이뤄진 3월 6일. 그렇지만 위기의 순간들도 여러 번 있었다. 보석 조건을 어겨 자칫 몇 시간 만에 보석 허가가 취소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조건부 보석을 허가하면서 재판부는 “보석조건 위반을 이유로 보석이 취소돼 재구금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기 바란다”고 밝힌 바 있다. 보석조건을 위반할 경우 재구금은 물론이고 10억 원의 보증금도 돌려받지 못하게 된다. 자칫 10억 원짜리 짧은 외출이 될 수도 있는 것.
재판부가 밝힌 보석의 조건은 우선 논현동 사저로 주거지를 제한한 것이다. 허가 없이는 외출도 안된다. 또한 배우자와 직계혈족과 그 배우자, 변호인 외에는 접견과 통신도 제한된다. 진료를 위해 서울대병원에 방문할 경우에도 사유 등을 기재해 법원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이 전 대통령은 6일 오후 3시 48분께 서울 송파구 동부구치소에서 나와 검은 제네시스 차량을 타고 4시 10분께 강남구 논현동 사저에 도착했다. 동부구치소 앞에는 이재오 자유한국당 상임고문, 맹형규 전 행정안전부 장관, 이동관 전 청와대 홍보수석, 김효재 전 청와대 정무수석, 안경률 전 새누리당 의원 등 측근들과 수십 명의 지지자들이 이 전 대통령을 맞이했다. 주거지와 외출이 제한된 이 전 대통령이 짧게 측근들과 마주한 것. 만약 이들과 어떤 대화를 나눴다면 접견 제한을 위반했다는 논란이 불거질 수도 있었지만 이 전 대통령은 손을 흔들어 화답했을 뿐이었다. 물론 예외적인 상황인 만큼 짧은 대화를 나눈 것을 접견 제한 위반이라 보긴 힘들지만 이를 둘러싼 논란은 불거졌을 수도 있다.
측근이나 지인의 논현동 사저 방문은 심각한 접견 제한 위반이 될 수 있다. 그런 위기 상황도 연출됐다. 이 전 대통령이 사저에 도착하고 채 1시간도 되지 않은 오후 5시께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이 방문한 것. 그렇지만 만남은 이뤄지지 못했다. “뉴스를 보고 한 번 와 봤다”는 최 전 위원장은 취재진에게 “만난다면 할 얘기가 아주 많았을 것”이라며 발길을 돌렸다. 행여 문이 열려 사저 안으로 들어가 실제로 많은 얘기를 나눴다면 접근 제한 위반이 된다. 그만큼 이번 조건부 보석은 ‘자택구금 수준’에 가깝다.
서울 동부구치소 앞에는 이동관 전 청와대 홍보수석, 맹형규 전 행정안전부 장관, 이재오 자유한국당 상임고문 등 측근들과 수십 명의 지지자들이 이 전 대통령을 응원했다. 임준선 기자
# 항소심 실형 땐 다시 구속재판 가능성
항간에선 오히려 구속기간 만료까지 43일을 버티는 게 더 좋았을 수도 있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이 전 대통령의 구속 기한은 4월 8일까지로 이때까지 항소심 선고가 이뤄지지 못하면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게 된다. 불구속 재판은 지금의 보석과는 달리 별다른 제한이 없다. 예를 들어 구속 기간 만료로 석방될 경우 바로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할 수도 있었다.
반면 이번 보석은 이런저런 조건이 많다. 보석 결정 직후 이 전 대통령 측 강훈 변호사가 취재진을 만난 자리에서 “어차피 곧 석방되는데 왜 굴욕적인 조건을 받아들이냐는 참모도 있었다”고 전했을 정도다. 또한 “이 전 대통령 역시 재판부가 자신을 증거인멸 우려가 있는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 아니냐며 다소 기분 나쁜 반응을 보였다”는 말도 했다.
이 전 대통령 측에서 가장 아쉬운 대목은 병보석이 기각됐다는 부분이다. 이 전 대통령 측은 심리지연에 따른 구속기간 만료 임박에 따른 ‘피고인의 방어권 보장’과 ‘건강 악화’를 사유로 보석을 청구했다. 기관지 확장증, 역류성 식도염, 제2형 당뇨병, 탈모, 황반변성 등 9개 병명을 기재했다. 그렇지만 재판부는 건강 문제에 따른 병보석은 기각했다. 또한 건강 문제를 이유로 서울대병원을 주거지로 해달라는 요청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건강 악화는 보석 취소 사유가 될 수도 있다. 보석 허가 조건을 밝히며 재판부가 “입원이 필요할 경우 오히려 보석 허가를 취소하고 구치소 내 의료진의 도움을 받는 게 타당하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병보석이 받아들여졌을 경우 행여 항소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을지라도 보석을 이어갈 여지가 있었지만 지금 상황에선 실형을 받아 대법원에 가게 되면 다시 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만큼 항소심의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 ‘무죄 추정 원칙에 따른 피고인의 방어권 보장’을 이유로 보석을 신청한 이 전 대통령 측은 무죄 판결을 위해 집중할 예정이다. 강 변호사는 “이 전 대통령도 마음 편하게 옛날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되살릴 여유를 가지게 됐다”고 이번 보석의 의미를 설명했다.
보석 허가로 항소심 재판을 서두를 필요가 없어 변호인단은 충실한 심리를 강조하며 항소심을 끌어갈 수 있게 됐다. 항소심 법정에서 증인신문을 통해 검찰 조사 당시 진술의 신빙성을 깨는 전략을 들고 나온 이 전 대통령 측은 핵심 증인들의 출석 거부로 어려움을 겪어 왔다. 구속 기간 만료 시점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증인 신문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피고인의 방어권 보장’을 이유로 보석을 신청했고 이 요청이 받아들여졌다. 법조인들은 이제 시간은 이 전 대통령의 편이 된 터라 주도권을 갖고 항소심에 임할 것으로 보인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