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수비에 ‘깨진 쪽박’…“극적인 경기일수록 표현도 풍부”
“후지산이 무너집니다”라는 구절이 탄생한 1997년 ‘도쿄대첩’. 연합뉴스
[일요신문] 끊임없이 회자되는 1997년 ‘도쿄대첩’. 이 경기를 더욱 빛나게 한 것은 당시 중계진으로 나섰던 송재익 캐스터의 “후지산이 무너집니다”라는 한마디였다. 송 캐스터는 이외에도 수많은 특유의 표현으로 눈길을 끌어왔다. 40여 년간 스포츠 현장을 누린 그는 “다 지나간 얘기고 자랑거리는 아닌데…”라며 스스로 자신의 인상적인 멘트를 꼽아봤다.
▲ “깨진 쪽박입니다. 물이 줄줄 새고 있습니다.” - 잠실. 프랑스월드컵 아시아예선. 대한민국 vs 일본
“‘도쿄대첩’에서 이기고 잠실에서 홈경기로 프랑스월드컵 최종예선이 열렸다. 그때 우리가 0-2로 졌다. 홍명보가 없어서 그랬는지 수비가 엉성했다(당시 홍명보는 경고 누적으로 결장). 그래서 ‘깨진 쪽박’이라는 단어를 썼다. 그 외에도 홍명보가 없는 모습을 ‘막대기 없는 대걸레’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 “고추 밭에 벗어놓은 검정 고무신처럼 있기는 있는데 안보입니다.”- 말레이시아 조호르바루. 프랑스월드컵 아시아 플레이오프. 일본 vs 이란
“제 3국 말레이시아에서 일본과 이란이 월드컵 티켓 한 장을 놓고 맞붙었다. 3만 관중이 꽉 찼는데 일본 원정 응원단이 거의 99%였다. 이란에서도 도구를 챙겨 왔는데 정말 조금이었다. 그 모습을 보니 그런 말이 나왔다.”
“후지산이 무너집니다”의 주인공 송재익 캐스터가 하나원큐 K리그2 2019로 중계석에 돌아왔다. 이종현 기자
“우리가 말리랑 비기기만 해도 1948년 이후 처음으로 올림픽 8강에 진출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전반부터 0-3으로 끌려갔다. 조재진이 2골까지 넣었는데 마지막 한 골이 안 나왔다. 한 골이 절실한 상황에서 말리 자책골이 나왔다(웃음).”
▲ “6만 3000 송이의 장미꽃이 활짝 핀 대구월드컵 경기장입니다. 장미의 특색은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향기, 하나는 가시입니다. 오늘만큼은 가시였으면 좋겠습니다” - 대구. 2002 한일월드컵 조별리그 2차전. 대한민국 vs 미국
“이전까지 월드컵 중계를 하면서 한 번도 우리가 이기는 것을 못 봤다. 그런데 1차전 부산에서 황선홍, 유상철이가 골을 넣어서 이겼다. 그리고 대구로 갔는데 나도 좀 들떴을 것 아니우(웃음). 중계에서 중도를 지켜야 하는데 2002년 때는 나도 좀 더 나갔다.”
▲ “끝없이 추락하는 히딩크의 주가가 언제쯤 반등 할 것인지, 끝없이 뒷걸음질 치는 한국축구가 언제쯤 유턴을 할지. 그날이 오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 부산. 국가대표 친선경기. 대한민국 vs 나이지리아
“히딩크 감독이 초반엔 별명이 ‘오대영’이었다. 당시 여론이 너무 안 좋아서 마냥 두둔해주기도 힘들었다. 방송국으로 항의 전화가 많이 오던 시절이다. 그래도 반등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저런 이야기를 했었다.”
그는 이처럼 과거를 더듬으며 “대단한 일도 아니다. 다만 사람들에게 추억거리는 될 수 있겠다”며 웃었다. 송 캐스터가 언급한 경기는 대한민국이나 아시아 축구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순간들이었다. 그는 “아무래도 중요한 경기, 극적인 경기일수록 더 좋은 말들이 나오는 것 같다”면서 앞으로 중계를 맡을 경기들에 대해서는 “이제는 속을 비워 뒀다. 겸손한 자세로 말을 줄이고 담백하게 하겠다”고 말했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