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관, 행동주의 펀드, 소액주주 등 주주제안으로 다양한 목소리…경영진과 힘겨루기도 불사
올해 슈퍼 주총 데이의 본격적인 막이 오른 가운데, 주주제안을 주총 안건으로 올린 상장사들이 치열한 표 대결을 예고하고 있다. 사진=최준필 기자
‘일요신문’이 올해 초부터 지난 3월 15일까지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 등에 공개된 12월 결산법인 상장사의 정기 주주총회 공시를 분석한 결과, 주주제안으로 올라온 안건은 총 132건을 기록했다. 역대 최대 규모다. 한국기업지배구조원 따르면 주주제안 건수는 2016년 31건, 2017년 66건, 2018년 92건으로 집계됐다.
정기주총 공시 마지막날인 지난 15일까지 주주제안 안건 공개가 이어졌다. 특정 날짜에 주총이 몰리는 ‘슈퍼 주총 데이’를 피해 일정을 짠 회사는 일찌감치 주주제안 안건을 공개했지만, 공시 마지막 날까지 안건 상정과 관련해 내용을 정정하거나 확정한 회사도 적지 않았다. 안건 내용은 이사·감사 선임 안건이 84건으로 가장 많았다. 배당 확대가 25건으로 뒤를 이었고, 그밖에 정관변경 및 자사주 소각 등이 안건으로 상정됐다.
주주제안이 확대된 배경에는 달라진 제도와 주주들의 인식이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 증권사 연구원은 “최근 국민연금을 비롯한 자산운용사들의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지난해 금융당국의 행동주의펀드에 대한 기업 경영참여 규제 완화 등으로 주주제안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며 “특히 올해는 행동주의펀드와 소액주주들의 제안이 눈에 띄게 늘었다”고 설명했다.
실제 공개된 주주제안을 종합하면, 국민연금을 비롯한 기관과 행동주의펀드는 물론, 소액주주 연대까지 다양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 때문에 최근 주총 시즌에 접어들면서 주주제안을 주총 안건으로 올린 회사는 안팎으로 분위기가 고조됐다. 회사와 주주간의 힘겨루기가 불가피해서다.
주총 시즌이 중반부를 향해가는 가운데 주주제안이 별다른 힘을 내지 못하고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21일까지 열린 주주총회 결과를 보면, 기관이나 소액주주가 낸 주주제안 대부분이 부결됐기 때문이다. 주총 시즌이 임박할 때까지 보였던 기세와는 크게 다른 모습이다.
올해 초부터 일찌감치 소액주주들이 뭉쳐 목소리를 냈던 포스코강판은 이번 정기 주총에서 주주제안을 부결했다. 소액주주들은 “액면분할로 거래량을 늘려야 한다”며 현재 1600만 주인 발행주식 총수를 10대 1의 액면분할을 통해 1억 6000만 주로 늘리는 내용의 정관 일부 변경을 제안했다. 하지만 최대주주인 포스코는 물론 ‘키’를 쥐고 있던 국민연금과 자산운용사의 지지를 받지 못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성도이엔지는 이사회가 제안한 ‘1주당 100원 현금배당’을 승인했다. 주주제안으로 제시된 ‘1주당 150원 현금배당’ 안건은 자동 부결됐다. 이 회사는 지난해 매출이 2017년과 비교해 34% 가량 올랐다. 개인투자자들이 연대해 배당확대를 요구했다.
그러나 이 회사는 2013년 SK하이닉스 중국공장 화재와 관련, 현지 자회사 과실이 지난해 중국 법원으로부터 일부 인정되면서 130억 원대 손해배상을 물어줄 처지에 놓였다. 지난해 당기순이익이 2017년보다 30% 가까이 쪼그라들었고, 이 때문에 주총 당일엔 배당 확대보다는 경영진에 힘을 싣자는 목소리가 더 높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밖에 사외 이사나 경영진을 교체하는 내용의 주주제안이 올라와 관심을 끌었던 아스트, 팬스타엔터프라이즈, 피씨디렉트 등도 각각 부결했다.
그렇다고 주주제안이 실패했다고 단정하기는 아직 이르다. 올해도 어김없이 상장사들의 주총이 3월 마지막주 특정 날짜에 몰리는 ‘슈퍼 주총데이’ 현상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행동주의 펀드들이 회사와 신경전까지 불사하면서 분위기를 끌어올리고 있는 만큼 치열한 표 대결이 예고되고 있다.
올해 슈퍼 주총데이의 최대 관심사는 ‘총수 일가 논란’의 중심인 한진그룹 지주사 한진칼이다. 행동주의펀드 KCGI는 오는 29일 열릴 주총에서 조양호 회장 측근인 석태수 대표 재선임이 부적합하다며 다른 사람을 선임할 것을 제안했다. 또 감사 1인과 사외이사 2인을 자신들이 추천한 인물로 새로 선임하는 내용의 주주제안도 했는데, 한진칼이 이 제안들을 거부하면서 양 측의 소송전까지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한진칼과 KCGI는 공개 입장문 등을 내면서 주주들의 표를 모으고 있다.
현대차와 현대홈쇼핑도 외국계 투자사들과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앞서 미국계 행동주의 펀드 엘리엇은 현대차에 주주제안으로 총 5조 8000억 원, 현대모비스에 총 2조 5000억 원 규모의 배당을 제안했다. 또 현대차와 현대모비스에 각각 사외이사 후보 3명과 2명을 추천했다. 현대차는 이 요구들이 “과하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현대홈쇼핑은 밸류파트너스자산운용과 미국 투자회사인 돌턴인베스트먼트 연대와 힘겨루기 중이다. 이 투자회사들은 현대홈쇼핑 측이 제안한 배당안 등 주총 안건 대부분을 반대하기로 했다. 돌턴인베스트먼트는 “현대홈쇼핑은 코리아 디스카운트(증시 저평가)의 대표적인 사례”라며 “2010년 상장 이후 순이익과 유휴 순현금 자산을 모두 배당했다면 배당수익률이 100%를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주주수익률은 마이너스 17%”라고 밝혔다.
소액주주연대와 경영진의 표 대결이 예고된 곳도 있다. 재계 순위 60위 한솔그룹의 지주사 한솔홀딩스다. 소액 주주들은 회사에 현재 주가 4760원 보다 비싼 1만 1000원에 주식을 사주고, 자신들이 추천한 인물을 임원으로 뽑으라는 제안을 했다. 회사 측은 “제안은 환영하지만 유상감자는 과도한 자본유출로 이어지고, 추천된 후보는 전문성과 경험이 부족하다”며 반대 입장을 냈다.
한국철강 등을 자회사로 거느린 KISCO홀딩스는 앞서의 현대홈쇼핑과 힘겨루기 중인 밸류파트너스와 표 대결을 예고하고 있다. 밸류파트너스는 “키스코의 경영진은 비합리적인 자본 배분을 장기간 지속해 주주가치가 훼손됐다”며 압박의 수위를 높이고 있다. 정관을 바꿔 중간 배당을 신설하고 자신들이 추천하는 인물을 사외이사와 감사위원으로 선임하라고 제안했다.
그밖에 미국 펀드 홀드코자산운용은 세이브존I&C에 주당 400원의 현금배당을 제안했다. 회사 안인 50원을 크게 웃돈다. 홀드코자산운용은 이번에 처음으로 국내 자본시장에 진출한 회사다.
다른 증권사 연구원은 “주주제안 확대 자체는 긍정적인 평가가 많다. 주주들이 합리적인 제안을 내고, 기업이 경영에 반영하는 그림이 현실화되는 건 국내 자본시장이 한 단계 더 발전하는 걸 뜻한다”며 “다만 과도한 배당확대 요구나 단기 투자를 위한 제안은 오히려 기업 신용도를 깎아 내릴 수 있다”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