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삼성 계열분리 통해 문화·유통산업 강자로 등극…카카오·네이버 등 공룡 ICT 기업 등장
공정위가 지정하는 대기업집단은 보통 ‘재계 순위’로 통한다. 우리나라를 이끌어가는 대기업들의 자존심 싸움이라는 점에서 화제가 되기도 하지만 재계 순위는 우리 사회의 현재 모습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일요신문’은 창간 27주년을 맞아 창간호가 나온 1992년 4월 15일과 현재의 재계 순위를 비교, 그간의 사회 변화상을 짚어봤다.
지난해 9월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방북한 재계 인사들이 백두산 천지를 배경으로 기념 사진을 찍었다. 오른쪽부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이재웅 쏘카 대표, 구광모 LG 회장, 최태원 SK 회장,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 김용환 현대자동차 부회장. 사진=평양사진공동취재단
# 굴뚝산업에서 문화·유통산업으로 중심 이동
1992년 재계 서열 2위였던 삼성은 현재 재계 1위로 우뚝 섰다. 삼성은 형제간 계열분리를 통해 삼성그룹과 한솔그룹, CJ그룹, 신세계그룹으로 분리됐다. 과거 삼성물산 위주로 사업을 영위했던 삼성그룹의 현재 주력 계열사는 삼성전자와 삼성바이오로직스다. 삼성그룹은 반도체 중심 전장부품과 인공지능(AI), 5세대 이동통신(5G), 바이오 등을 ‘4대 미래성장사업’으로 꼽은 바 있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제약·바이오업계 선두주자로 ‘K-바이오’사업을 이끌어나가고 있다. 상장폐지 위기까지 몰렸던 ‘삼바 사태’가 불거지기 전 지난해 2월에는 현대차를 제치고 시총 5위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1993년 삼성그룹에서 계열분리된 제일제당은 CJ그룹으로 성장했다. 현재 재계 15위에 자리매김하고 있는 CJ그룹은 과거 설탕과 밀가루 위주의 제일제당 이미지보다 문화사업의 이미지가 강하다. CJ그룹은 1995년 미국 영화제작사 드림웍스에 3억 달러(당시 3000억 원 규모)를 투자하며 미디어사업에 뛰어들었고, 이후 1997년 케이블TV 엠넷 인수와 2009년 온미디어 인수 등을 통해 엔터테인먼트와 미디어 부문의 강자로 떠올랐다.
미국 신생 영화사인 드림웍스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할 당시만 해도 임원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으나 최근 상황을 보면 CJ그룹의 미디어사업 진출은 성공적이라고 평가받는다. CJ그룹의 주력 계열사 CJ ENM은 방탄소년단(BTS)으로 유명한 소속사 빅히트와 합작 엔터테인먼트사를 설립해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영위하고 있으며, Mnet과 tvN, OCN을 포함해 16개 방송국을 보유한 초대형 미디어그룹으로 자리매김했다.
1997년 신세계백화점 점포 2곳과 조선호텔로 시작한 신세계그룹은 최근 유통 분야의 신강자로 떠올랐다. 지난해 기준 재계 11위인 신세계그룹은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과 정유경 신세계 총괄사장이 남매경영을 통해 각각 백화점 사업 부문과 대형마트 사업 부문을 경영 중이다.
현재 범삼성그룹의 주력 계열사들을 보면 1992년에는 건설과 중공업 등이 우리나라의 주력산업이었으나 최근에는 바이오와 문화산업, 유통업이 대세인 것을 알 수 있다. 과거에는 없던 새로운 고부가가치 산업이 우리 경제와 사회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외환위기 전인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건설·철강·조선 등 제조업과 전통적인 굴뚝산업에 치중해 있던 우리나라 산업의 중심이 27년이 지난 지금은 바이오와 엔터테인먼트, 유통 등으로 옮겨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케이팝, 케이뷰티 등이 세계적으로 우수한 평가를 받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2014년 5월 26일 오후 서울 프라자호텔 그랜드볼륨에서 열린 다음(daum)과 카카오(kakao)의 합병 기자회견에 최세훈 다음커뮤니케이션 대표(왼쪽), 이석우 카카오 대표가 합병 발표 후 포옹하고 있다. 이종현 기자.
# 공룡 ICT기업 출현, 금융업 강세
준대기업집단으로 지정된 60개 기업으로 시야를 넓혀보면 과거에는 전혀 볼 수 없던 기업들이 눈에 띈다. 자산총액 8조 5000억 원 규모에 72개 계열사를 보유한 카카오는 2018년 재계 순위 39위에 이름을 올렸다. 네이버는 재계 49위다.
카카오는 인터넷포털 ‘다음’에서 시작됐다. 1995년 설립된 IT벤처 1세대 다음커뮤니케이션은 2015년 카카오와 합병한 이후 공격적인 인수합병(M&A)을 통해 몸집을 불렸다. 통합법인 ‘다음카카오’의 출범 전인 2014년 9월 기준 20개 계열사를 보유하고 있던 카카오는 지난해 6월 30일 기준 계열사가 84개에 달하기도 했다. 카카오는 2016년 자산 5조 원을 넘어서며 국내 IT기업 최초로 대기업집단에 포함됐다.
카카오는 최근 정보통신기술 부문을 넘어 증권업 진출에도 나섰다. 지난해 10월 자회사 카카오페이를 통해 바로투자증권 지분 60%를 인수한 것. 이밖에도 부동산업, 주차 서비스, 승차공유 서비스 등 다양한 사업 분야로 진출하며 ‘카카오공화국’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다른 ICT기업 네이버, 넥슨, 넷마블도 재계 60위권에 진출하며 준대기업집단에 포함됐다. 인터넷 검색 포털로 시작한 네이버는 2018년 기준 45개 계열사를 보유한 자산총액 7조 1000억 원 규모의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게임업체 넥슨과 넷마블도 각각 자산총액 6억 9000억 원과 5조 7000억 원 규모로 재계 52위와 57위에 올랐다.
1992년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이들 ICT기업들의 강세는 지난 27년간 우리 사회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인터넷과 스마트폰, 각양각색의 애플리케이션의 활용과 사물인터넷(loT)이 우리 생활 전반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방증으로 해석된다. 앞으로 이들 ICT기업들의 성장은 더 잦아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미래에셋(20위), 한국투자금융(24위), 교보생명보험(30위) 등 오너가 있는 금융회사들이 재계 순위 상위권에 오른 것도 27년 전과 달라진 점이다. 비록 오너가 없어 대기업집단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신한금융그룹, KB금융그룹 등 자산 규모가 수백조 원이 넘는 거대 금융사가 탄생한 것도 27년 전과 확연히 다른 부분이다. 그만큼 우리나라 경제와 사회에서 금융의 비중과 중요성이 어마어마하다는 증거다.
한편, 주요 대기업들의 ‘얼굴’이 바뀐 점도 눈에 띈다. 1992년 재계 4위였던 ‘럭키금성’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이름은 LG로 바뀌었다. 1992년 선경은 현재 SK란 이름을 갖고 있다. 이들 기업이 상호를 영문으로 바꾼 까닭은 우리 기업이 세계로 진출하면서 더 이상 ‘내수기업’이 아니라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총수의 변화도 눈에 띈다. 창업주를 비롯해 1, 2세대가 물러나고 3, 4세대가 경영 전면에 나서고 있다. 이재용, 정의선, 신동빈, 정용진 등 ‘젊은 후계자’로 불렸던 재계 3세(신동빈 회장은 2세)는 각자 그룹 내에서 완전히 자리매김하며 재계 3세 시대를 열었다. LG의 경우 지난해 5월 구본무 회장 타계 이후 구광모 회장이 취임하면서 4세대 경영체제를 열었다.
여다정 기자 yrosad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