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상태로 2차대전 위문공연…팬인 여군에 풍진 옮아 기형아 출산, 평생 우울증 시달려
1920년 뉴욕에서 태어난 진 티어니는 귀족적인 배경에서 성장했다. 학창 시절엔 시를 쓰는 소녀였고 스위스에서 2년 동안 학교를 다니며 프랑스어를 배웠다. 그녀는 이후 자서전에서 이 시기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다고 회고하는데, 이후 17세가 되었을 땐 학교를 졸업하고 사교계에 입문한다.
하지만 그 생활은 따분했고, 우연한 계기로 배우 제안을 받아 18세 때 진 티어니는 브로드웨이로 갔으며 1939년, 19세가 되었을 땐 할리우드에 진출한다. 전성기는 곧 다가왔다. 1943년에 진 티어니는 톱클래스에 해당하는 출연료를 받았고, 특히 필름 누아르 장르에서 그녀를 선호했다. 강하고 독특한 외모 덕분이었고, 1946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선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그녀는 20대에 모든 것을 이룬 배우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그녀는 급격히 내리막길을 걸었고 결혼 생활도 파국으로 치달아 결국 1952년에 이혼했다. 스펜서 트레이시, 클라크 게이블, 타이론 파워 등 상대 배우와 잦은 염문이 있었고 파키스탄의 알리 칸 왕자와 약혼했지만 파혼했다. 가장 심각한 건 정신 질환이었다. 우울증과 함께 급격히 집중력이 저하하면서 그녀는 영화를 찍기 힘든 정도가 되었다. ‘모감보’(1953) 촬영 땐 결국 중도 하차했고 그 자리를 그레이스 켈리가 대체하기도. 1955년엔 험프리 보가트와 ‘신의 왼손’을 찍었는데, 이때 보가트는 티어니의 멘탈이 거의 바닥상태라는 걸 알고 현장에서 마치 친동생처럼 돌봐줄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계속 연기를 할 수밖에 없었던 건, 그나마 다른 사람이 되어 캐릭터를 연기할 때 정신적으로 편안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당시 진 티어니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대면하지 못 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고, 오랜 친구조차 기억하지 못 했으며,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어도 이야기가 끝나면 그 내용을 모두 잊어버렸다.
이후 진 티어니는 정신병원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 결정은 결국 평생 후회할 행동이 되었다. 당시 주로 행해졌던 정신 치료는 전기 충격 요법. 그녀는 손발이 묶인 채 총 27차례의 전기 치료를 받았는데, 그 후유증으로 기억 상실 증세를 보이게 된다. 퇴원 후 어머니 집에 머물 땐 14층 아파트 난간 위에서 자살을 시도하다 가까스로 구출되었다. 다행히 병세가 호전되어 캔자스의 어느 작은 옷 가게에서 주급 40달러를 받고 점원으로 일했는데, 사람들이 그녀를 알아보면서 이 일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왜 그녀는 스타덤의 정점에서 이토록 갑작스레 추락한 것일까? 그 원인을 알기 위해선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6월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할리우드는 스타들을 동원해 미군들이 포진한 유럽 전선을 돌며 위문 공연을 하곤 했다. 진 티어니는 동료 배우들과 함께 독일 전선에 갔는데, 이때 어떤 여군 병사와 접촉한다. 잠깐 스치듯 만났지만 진 티어니는 그 여군에게서 풍진이 전염된다. 사실 풍진은 그렇게 심각한 병은 아니었지만 안타깝게도 당시 진 티어니는 임신 중이었던 것. 임산부에게 풍진은 치명적인 병이었다.
1943년 10월, 진 티어니는 딸 다리아를 낳았다. 겨우 1.42킬로그램이었던 다리아는 태어나자마자 수혈을 받아야 할 정도였다. 더욱 비극적인 건 선천적인 장애들. 다리아는 귀가 들리지 않았고, 백내장으로 인해 부분적으로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정신 지체 증상이 있었다. 다리아의 그런 모습을 보며 진 티어니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매일처럼 울었고 서서히 우울증에 빠져 들었다. 이후 다리아는 네 살 때 보호 시설로 옮겨졌고, 2010년 67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거의 평생을 그곳에서 살아야 했다.
더욱 큰 충격은 전쟁이 끝나고 왔다. 1945년 말, 진 티어니는 어느 파티에 있었다. 이때 한 여성이 반갑게 다가와 자신을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기억나지 않는 티어니에게 그 여성은 말했다. 독일에 진 티어니가 위문 공연을 왔을 때, 해군으로 참전 중이던 그녀는 풍진에 걸려 병원에 격리되어 있었다는 거다. 하지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배우인 진 티어니를 너무나 만나고 싶었고, 그래서 몰래 병원을 빠져나가 티어니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마치 무용담처럼 늘어놓았다. 자신의 아이에게 장애를 안겨 준 장본인을 눈앞에서 만난 진 티어니는 거의 멘탈 붕괴 상태였고, 이때 그 전직 해군 여성은 너무나 순진한 미소를 지으며 “여전히 당신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배우예요”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진 티어니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 자리에 굳은 것처럼 서 있었다.
이 일이 있은 후 진 티어니의 우울증과 정신 질환은 더욱 극심해졌고, 결국 그녀는 20대 중반부터 30대에 이르는, 인생의 황금기를 고통과 슬픔 속에서 지내야 했다. 다행히 1960년에 좋은 남자를 만나 재혼하며 40대 이후의 삶은 이전에 비해 평안해졌고 다시 연기를 시작할 수 있었지만, 여전히 트라우마는 남아 그녀를 종종 괴롭혔다. 낯선 사람과 잠깐의 접촉을 한 후 완전히 바뀌어 버린 삶. 아마도 진 티어니만큼 기구한 삶을 살았던 여배우는 할리우드에 없었을 것이다. 한편 애거서 크리스티의 1962년 소설 ‘깨어진 거울’은 진 티어니의 실화를 모티브로 한 것. 이 소설이 나오자 진 티어니는 적잖이 불쾌감을 표현했다고 한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