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굵직한 족적, 파란만장했던 일생 마감
남기남 감독의 대표작은 단연 ‘영구와 땡칠이’(1989)다. 이 영화는 비공식적이지만 전국 270만~300만 명 이상 관객을 동원해 한국형 블록버스터 ‘쉬리’(1999) 이전 국내에서 최대 관객을 동원한 영화였다.
남기남 감독 작품 ‘영구와 땡칠이’(왼쪽)과 ‘갈갈이 패밀리와 드라큐라’ 영화 포스터.
천재적인 바보 연기로 당대 최고 인기를 끌었던 개그맨 심형래는 1980년대 후반 KBS 2TV 토요일 저녁 안방극장을 강타했던 인기 프로그램 ‘유머 1번지’에서 1970년대 인기 연속극 ‘여로’(1972)를 코믹하게 패러디한 ‘영구야, 영구야‘’로 최전성기를 구가했다.
남기남과 심형래의 의기 투합으로 그렇게 희대의 히트작 ‘영구와 땡칠이’가 탄생했다.
남기남 감독은 빨리 찍기와 몰아 찍기의 달인이었다. 이런 그의 영화 스타일을 한 마디로 표현하는 말이 있다. 바로 “그럼 찍지, 남기남”이다. 그가 영화촬영 현장에서 스태프로부터 “감독님, 필름이 좀 남았는데 어떻게 하죠”라는 질문을 듣고선 “그럼 (필름을) 찍지, 남기남”이라며 조크를 날린 데서 유래한 말이다.
남 감독은 ‘내 딸아 울지 마라’(1972)로 데뷔한 후 최소 100편이 넘는 영화를 감독한 것으로 전해질만큼 다작으로 유명했다. 그가 감독한 정확한 작품 수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한데 그 자신도 정확한 작품 수를 혼란스러워했단다.
그의 영화 특성은 ‘질보다는 양’이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 초저예산에, 한창 때는 1년에 9편까지 뚝딱 만들다 보니 ‘저질’이라는 꼬리표도 따라다녔다. 영화감독이라면 누군들 시대의 걸작을 만들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남 감독이 이토록 영화를 만들어 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안타깝게도 당시 영화산업을 둘러싼 열악한 환경 때문이었다.
고 남기남 감독. 출처=네이버 인물DB
그가 얼마나 영화를 빨리 찍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심형래와 임하룡 주연의 ‘철부지’(1984)를 촬영한지 단 엿새만에 벌어진 일이었단다. 촬영 6일째 점심시간 무렵 스탭들이 “밥먹고 찍읍시다”라고 하자 남기남 감독이 “찍긴 뭘 찍어, 기계 치워” 라고 했다고. 감독을 제외하고 그 누구도 영화 촬영이 완료됐는지 몰랐던 것이다.
‘갈갈이 패밀리와 드라큐라’(2003)를 찍을 당시에는 갈갈이 삼형제가 산에서 내려오는 도입부를 찍은 후 남 감독은 삼형제에게 힘차게 제자리 점프를 할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게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영화와 시작과 끝을 한 장소에서 동시에 찍은 셈이다. 이 영화에서 피 분장을 할 소품이 없자 때마침 현장에 있던 빨간색 포스터 컬러로 급히 배우들의 얼굴에 바르며 분장을 대체했다는 일화는 전설이다.
그러나 남 감독은 1990년대 중반 이후 예전같지 않은 상황에 고통을 겪어야 했다. 미국의 압력으로 1988년부터 할리우드 직배 영화가 한국 극장에 쏟아졌다. 이에 맞서기 위해 국내 영화도 물량공세에 주력하면서 저예산 영화의 대명사인 그의 입지는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작품 수도 눈에 띄게 줄었고, 극장에서 개봉하지 못하거나 개봉해도 조기 종영되는 사례가 빈번했다.
남 감독을 명감독 반열에 올리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그가 당시 척박했던 한국 영화시장에서 ‘저비용, 고효율’이란 공식으로,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즐거움을 준 한국 영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거목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장익창 기자 sanbad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