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 참가자들이 “골드만삭스는 진로의 구조조정과 외자유치를 방해하고 엄청난 피해를 준 것에 대해 사과하라”고 주장한 까닭에 골드만삭스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 지난 9일 (주)진로 노조원 수백 명이 서울 광화문 경희궁 공원에서 시위를 벌였다. | ||
실제 골드만삭스는 법정관리를 신청하면서 기존 대주주(장진호 회장, 지분율 8%)의 배제를 표명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진로는 “제3자 매각을 위한 사전포석”이라며 맞서고 있다. 진로 직원들은 이미 2년 이상 연 11%의 고리로 원금까지 찾아간 골드만삭스가 회사 정상화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 큰 이득을 노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지난 97년 부도가 난 이후 화의 상태에 있는 진로는 지난달 말부터 1조6백억원의 외자유치를 위한 기본계약을 맺고 이달 초부터 본격적인 채권단 협의에 들어간 상태이다. 그러던 차에 채권단에 소속된 골드만삭스가 법정관리를 신청하는 바람에 외자유치를 통한 ‘회사 정상화’가 물건너 갈 처지에 놓인 것. 당연히 진로에선 골드만삭스의 조치에 비난하고 나섰고, 결국 노조원들의 시위까지 이어진 것이다.
진로 임직원들은 “골드만삭스가 진로의 기업내부비밀을 이용해 진로 채권을 헐값으로 매집한 뒤 비싼 값에 되팔기 위해 진로의 외자 유치와 구조조정을 방해하고 있다”고 비난 하고 있다.
진로측의 주장은 골드만삭스가 지난 97년 부도 이후 회사 재건 프로그램을 짜주겠다고 접근한 뒤 3개월간 진로와의 미팅을 통해 회사 기밀을 포함한 회사 내용을 빼낸 뒤 채권 매집에 활용했는 것.
진로 관계자는 “골드만삭스는 컨설팅 회사의 기본인 ‘비밀유지 계약’을 어겼으며, 특히 골드만삭스는 컨설팅 본계약을 맺지도 않은 채 3개월간 회사 기밀만 빼내갔다”고 주장했다.
진로는 골드만삭스가 회사의 기밀을 빼낸 사례로 진로홍콩 법인과 진로재팬에 대한 접근 사실을 들었다. 진로에선 골드만삭스가 진로재팬이 진로홍콩에서 100% 투자해 만든 회사임이 알려져 있지 않음에도 컨설팅을 하면서 이를 알아낸 뒤 자회사로 하여금 진로홍콩의 채권을 매집해 진로재팬의 외자유치를 방해했다고 주장했다. 진로재팬은 일본 시장에서 일본 소주 업체를 제치고 시장점유율 1위를 기록하는 등 수익성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진로는 또 골드만삭스가 컨설팅 내용을 불법 이용한 두 번째 사례로 골드만삭스의 자회사가 진로의 채권을 매집할 때 진로의 재무상태를 실사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었다. 일반적인 경우 거액의 채권을 사들일 때는 재무상황을 실사하는 것이 기본이지만 골드만삭스는 이 과정 없이 채권을 사들였다는 것. 때문에 골드만삭스는 컨설팅을 하면서 기업정보를 파악한 뒤 이를 채권 매집을 위해 활용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골드만삭스는 “진로의 주장은 명예훼손에 해당한다”며 강력 반박하는 한편 “진로는 증권거래소에 등록된 기업이어서 그 같은 수준의 정보는 이미 공시사항으로 나와 있어 채권을 확보하는데 별도의 실사가 필요치 않았다”고 주장했다.
골드만삭스는 또 “우리가 컨설팅 내용을 불법적으로 활용했다면 진로가 법원에 냈던 회사기밀 불법 유출과 관련된 소송을 스스로 취하할 이유가 없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이에 대해 진로에선 채권을 사들인 회사가 국내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조세회피지역에 세워진 법인이기 때문에 자칫 골드만삭스에게 면제부를 주는 재판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커 소송을 자진 취하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현재 진로와 골드만삭스가 첨예하게 맞서고 있는 사안은 진로재팬의 가치 산정 문제. 진로재팬에 대해 골드만삭스는 “진로는 1조6백억원이라고 주장하지만 최소 1조9천억∼2조4천억원에 달할 것으로 평가한다”고 밝혔다.
현재 진로의 부채는 1조8천억원 정도인 점을 감안하면 골드만삭스는 (주)진로에 대해 청산가치보다 자산가치가 더 높은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골드만삭스가 청산가치보다 자산가치가 높다고 주장하는 배경은 현재 확보한 채권을 (주)진로 채권단에 최대한 많은 돈을 받고 되팔겠다는 저의가 깔려 있다는 게 진로 측의 반박이다.
진로 관계자는 “골드만삭스는 그동안 (주)진로의 기업가치에 대해 청산가치보다 부채가 더 높다고 주장하며 법정관리를 신청했는데, 말을 바꾸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골드만삭스는 진로가 진로재팬의 재무 자료를 공개하지 않은 데서 비롯한 차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진로의 숨겨진 자산인 진로재팬의 기업 자료를 완전 공개하면 정확한 자산가치를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골드만삭스의 요구에 대해 진로는 “골드만삭스가 자신의 채권 회수액을 올리기 위한 술수”라고 말했다. 실제 골드만삭스는 법정관리 신청서에서 ‘3자 매각’을 주장, 사실상 경영권 탈취를 통한 금전적인 이득을 노리고 있다는 게 진로의 주장이다.
그러나 골드만삭스는 “진로의 경영권을 빼앗을 의도가 없다. 법정관리 신청은 회사의 재무상태와 주주구성에 대한 구조조정을 위한 것에 불과하다”고 밝히고 있다. 진로의 해외 자본유치 역시 성사 가능성이 없다는 것.
골드만삭스는 “진로가 외자유치에 나선 것은 채권단의 이익보다는 경영권 보호를 위한 목적이기 때문에 법정관리를 신청한 뒤 제3자 매각의 방법을 택하는 것이 채권단으로선 최선의 방안”이라고 밝혔다.
진로와 골드만삭스는 자신들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다른 채권단을 상대로 설득작업에 나섰다. 골드만삭스는 채권단의 30%를 우호지분으로 확보했다는 주장이고, 진로는 외자유치를 전제로 채권단을 설득하고 있다.
시비는 법정에서 가려지게 됐다. 법원이 골드만삭스의 주장을 받아들여 법정관리 신청을 받아줄지, 아니면 진로의 해외자본 유치를 통한 자구계획을 승인할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