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주 국민연금 이사장 인터뷰로 논란 불붙어...“책임투자 원칙에서 검토해야”
국민연금과 보건복지부가 집계한 자료를 종합하면, 현재 국민연금은 미쓰비시 계열사에 총 870억여 원을 투자하고 있다. 미쓰비시는 일제강점기 한국인 10만 명을 강제 동원한 대표적인 전범기업이다. 이번 일본 수출 제한 조치의 발단이 된 대법원의 강제동원 배상판결의 당사자도 이 기업이다.
미쓰비시뿐만이 아니다. 지난해 국민연금은 일본 전범기업 75곳에 1조 2300억 원을 투자했다. 2014년 7600억 원에서 매년 꾸준히 투자금액이 늘고 있다. 지난 5년간 전범기업 투자 평가액은 총 5조 6600억 원. 전범기업 299개 가운데 현재까지 영업을 하고 있는 284곳의 26.4%에 국민연금의 자금이 들어갔다. 수익률은 마이너스다. 지난해말 기준 75개 전범기업 투자 가운데 미쓰비시 계열사 4곳을 포함한 총 65개 기업 투자에서 손실을 봤다.
일본 수출 제한 조치에 맞서 꺼낼 수 있는 카드 중 하나로 국민연금이 떠올랐다. 그래픽=백소연 디자이너
국민연금의 일본 전범기업 투자는 매년 국회 국정감사 때마다 등장하는 단골 안건이다. 국민 노후 자금을 왜 수익도 나지 않는 전범기업에 투자하느냐는 지적이다. 그런데 이 논의에 최근 본격적으로 불이 붙었다. 지난 8월 12일 김성주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이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일본의 전범기업을 투자 리스트에서 배제할지 여부에 대해 검토 중”이라고 밝히면서부터다.
김 이사장은 이날 ‘전범기업 투자 배제 검토’에 대해 국민연금이 책임투자라는 큰틀에서 새로운 투자 가이드라인을 검토하고 있다는 점과 연결해 설명했다. 인터뷰 이틀 뒤인 지난 14일엔 본인의 SNS를 통해 “달라진 한일관계와 국민 정서에 따라 전범기업 투자에 대해 다시 들여다봐야 할 필요성은 있지만 곧바로 투자배제로 이어질 순 없다”, “국민연금은 국민의 노후를 책임지는 장기 투자자로서 나라와 국민, 그리고 기업이익 관점에서 감정적 대응을 자제하고 차분하게 접근하겠다”며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도 파급력은 적지 않았다.
그동안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은 그동안 ‘국가 간 분쟁이 생길 우려가 있다’는 입장에서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었다. 기존과 다른 입장이 나온 셈이다. 정치권에선 법안도 발의됐다. 최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민주평화당 김광수 의원은 전범기업에 대한 투자를 제한할 수 있도록 하는 국민연금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다. 투자 시 환경·사회·지배구조 등을 고려토록 한 법 102조 제4항에 공식사과 및 피해배상을 하지 않은 전범기업 등을 투자 제한 대상으로 정하는 게 골자다.
그러나 전범기업 투자와 관련해 복지부와 국민연금이 당장 결정을 내리기는 어려운 것으로 확인됐다.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투자를 제한하는 방식과 절차에 대한 문제라는 게 복지부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국민연금은 해외주식에 투자할 때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의 수익률 평가 기준(벤치마크 지수)에 따라 투자한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투자 금액이 늘어난 건 전체 기금의 해외주식 투자 규모와 비례해 늘었다. 특히 국민연금의 수익성과 안정성 등을 고려해 결정하는 투자 대상을 법으로 제한한 사례는 국내는 물론 해외 연기금에서도 없었다. 특정 산업이나 기업을 투자 대상에서 제외(네거티브 스크리닝)하는 네덜란드, 미국, 캐나다, 노르웨이 등 연기금은 지침으로 제한 대상을 정하고 있다.
한 국민연금 관계자는 “그동안 전범기업 투자 제한은 어렵다는 입장에 변함이 없었는데, 한 가지 변수가 생겼다”며 “지난해 7월 스튜어드십 코드(기관투자자 수탁자 책임 원칙)가 도입되면서 전범기업 투자 제한 검토 필요성이 나왔다. 책임투자 측면에서 포괄적으로 보면, 전범기업 투자 제한이 가능하지 않겠냐는 의견이 나왔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복지부 관계자도 “국민연금 책임투자 원칙과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요소에 어긋나는 게 있는지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는 뜻”이라며 “일본 수출 제한에 대한 맞대응이라기보다는 원칙에 관련한 문제다. 심도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라고 설명했다.
현행 국민연금법은 국민의 노후자금인 국민연금기금을 관리, 운용하면서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수익 증대를 위해 투자대상과 관련한 비재무적 요소인 ESG 등을 고려할 수 있도록 명시하는 등 사회책임투자를 규정하고 있다. 다만 구체적인 투자방법과 원칙, 대상기업은 명시하고 있지 않다. 현재 국민연금이 책임투자 활성화 방안을 논의하고 있는 만큼 투자배제 대상에 일본 전범기업이 포함될 수 있는지 판단을 새롭게 해보겠다는 취지였던 셈이다.
전범기업 투자를 제한과 관련한 논의를 시작하더라도, 우리나라가 오히려 더 큰 타격을 받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본 역시 세계 최대 규모의 연기금을 굴리고 있다. 투자 금액은 1600조 원 정도로, 우리나라의 3배에 가깝다. 만약 일본과 투자 제한 대결이 벌어지면 한국 투자자들에 미치는 영향이 더 클 수 있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정춘숙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지난 8월 18일 ‘국민연금의 일본 증시 투자 내역·일본 공적연금(GPIF) 국내 증시 투자 내역’ 자료를 공개하면서 “일본과 한국 서로의 투자금액은 6조~7조 원으로 비슷하지만 우리나라의 주식시장 규모가 일본의 3분의 1 수준이라 일본보다 우리 증시에 미치는 영향이 더욱 클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일각에선 연기금 운용의 중립성 훼손도 크게 우려하고 있다. 이번 사태는 외교 정치적 문제로 촉발된 셈인데, 여기에 기금 운용이 영향을 받아 투자처를 바꾸면 앞으로도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하기 어려워질 것이라는 얘기다.
이에 대해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은 오는 9월까지 책임투자에 대한 세부 규정을 마련할 방침이다. 다른 복지부 관계자는 “전범기업과 같이 특정 영역을 지정하기보다 책임투자라는 큰 카테고리 안에서 검토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