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수사 초기 사고사에 무게…타살 정황 많지만 증명할 길 없어
성남시 분당메모리얼파크 내에 마련된 고 김성재 추모비. 팬들이 사진과 꽃다발을 남겨뒀다. 최준필 기자
김성재는 1995년 11월 20일 오전 23세 나이로 유명을 달리했다. 그의 오른팔엔 28개의 주사자국이 있었다. 사건 초기 경찰은 약물과다 복용으로 인한 사고사에 중점을 뒀다. 이튿날 경찰은 ‘청장년급사증후군’으로 김성재 사망 원인을 발표한다. 즉 원인을 알 수 없는 돌연사라는 것. 현재까지도 정확한 사인을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사건 발생 16일 뒤인 12월 6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김성재 몸에서 ‘틸레타민’이 나왔다는 부검 결과를 발표한다. 이어 다음날 경찰은 서울 반포 동물병원 원장 배 아무개 씨의 제보 전화를 받는다. 배 씨는, 김성재와 사건 당일 새벽까지 함께 호텔에 머물던 자신의 여자친구 A 씨(당시 25세)가 자신이 운영하는 동물병원에서 5cc 졸레틸 1병과 황산마그네슘 3.5g을 사갔다고 했다. 졸레틸 주요 성분이 김성재 몸에서 나온 틸레타민이다. 치과대학 학생이라 약품과 주사기를 다룰 줄 알던 A 씨는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돼 12월 9일 구속된다.
1심 재판부는 1996년 6월 5일 A 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한다. A 씨가 김성재에게 졸레틸과 황산마그네슘을 주입해 사망에 이르게 했다고 판단했다. 1심 재판부는 김성재와 A 씨 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맞췄다. 김성재 측근들 진술에 따르면 A 씨는 평소 편집증적인 성향을 보이며 김성재에게 집착했다. 가스총을 쏜 적도 있고 밧줄로 김성재를 결박해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한 적도 있다는 사례가 제시됐다.
김성재 측근들에 따르면 1995년 11월 15일 김성재가 미국에서 귀국했을 땐 김성재와 A 씨는 이미 헤어진 상태였지만 A 씨가 김성재에게 ‘일본 유학 가기 전 딱 일주일만 만나 달라’고 매달렸다고 했다. 수사 과정에서 A 씨가 1995년 11월 28일 동물병원 원장 배 아무개 씨를 찾아가 졸레틸과 황산마그네슘을 사간 걸 비밀로 해달라고 말한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1심 재판부는 앙심을 품은 A 씨가 범행을 저질렀다고 판단했다. A 씨가 자신이 기르던 “강아지를 안락사하기 위해 약품을 구입했다”고 항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지난해 4월 서울 지하철 여의도역사 안에 게시된 고 김성재 생일 축하 지하철 광고. 박정훈 기자
하지만 1심 판결 이후 김성재와 A 씨의 관계가 좋았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내용의 기사가 보도된다. 당시 ‘일요신문’은 김성재는 A 씨를 ‘내 애인’ 또는 ‘결혼할 사이’라고 주변에 소개할 정도로 돈독했다고 보도했다. 또 김성재가 1995년 11월 15일 미국에서 한국으로 귀국한 뒤 부모님보다 먼저 A 씨를 만났고, 사망하기 전까지 5일 가운데 4일 동안 A 씨와 함께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김성재 엄마 육영애 씨와도 가깝게 지냈던 정황도 나왔다. 육 씨는 1995년 7월 A 씨 명의로 된 통장에 김성재가 미국 유학에서 쓸 용돈 명목으로 500만 원을 입금하기도 했다. 사건 당일 김성재와 함께 호텔에 머물렀던 로드매니저는 항소심 결심 공판 때 “김성재와 A 씨가 싸우는 걸 보지 못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주요 살해 동기를 판단할 근거가 부족해진 셈이다.
당시 ‘일요신문’은 졸레틸 5cc와 황산마그네슘 3.5g은 75kg 성인 남자를 사망에 이르게 하기엔 부족하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졸레틸과 황산마그네슘은 동물용 약품이기 때문에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추정할 수밖에 없었는데, 국과수 검시관 한 명을 제외한 대부분 전문가는 졸레틸 5cc에 사망하긴 어렵다고 봤다. 졸레틸 5cc는 5~6.25kg 침팬지를 마취시킬 때 쓰는 분량이다.
1심 재판부가 판단한 사망 시각에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1심 재판부는 양측성 시반(중력 방향으로 피가 쏠려 시체에 나타나는 얼룩)을 근거로 사망 시각을 새벽 1시에서 새벽 2시 50분 사이로 추정했다. 하지만 김성재를 가장 먼저 검안한 의사는 양측성 시반을 확인하지 못했다. 국과수 부검의도 마찬가지였다.
또 항소심 4차 공판에서 김성재를 병원으로 후송한 119 구급대원은 “(김성재의) 몸이 뻣뻣한 걸 느끼지 못했다. 완전히 죽은 상태였다면 변사사건 처리 지침에 따라 119에서 처리하지 않고 경찰에 맡겼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성재가 처음 이송된 병원의 의사 또한 “죽은 지 얼마 안 된 것 같았다”고 증언했다. 당시 해당 병원 진료차트에 기록된 시체의 직장온도도 36도였다. 의사는 “확실히 죽었다고 판단될 경우엔 체온을 재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성재가 새벽 2시 50분 이후에 사망했을 가능성이 제기된 대목이다.
2심 재판부는 새벽 6시에 최대 작동시간이 135분인 세탁 건조기가 작동하고 있었다는 로드매니저의 진술을 바탕으로 김성재가 새벽 3시 45분 이후에 사망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다. 여자친구 A 씨는 사건 초기부터 일관되게 새벽 3시 40분에 호텔 방을 빠져나갔다고 진술했다. 이를 미뤄 2심 재판부는 A 씨가 범행 시각에 현장에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결국 2심 재판부는 A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도 2심 판결을 받아들였다.
지난해 4월 일요신문 인터뷰에 응한 고 김성재 모친 육영애 씨. 최준필 기자
여러 의문점이 남는다. 외부인이 들어왔을 확률을 배제할 수도 없다. 호텔 방은 열쇠가 있어야 들어올 수 있었다. 1995년 11월 25일 김성재 일행이 퇴실할 때 현관문 열쇠 2개 중 1개가 회수되지 못했다. 일행은 호텔에 6만 6000원을 보상하기도 했다.
결국 초동수사에 아쉬움이 남는다. 경찰은 CCTV 확보를 하지 않다가 사건 보름이 지났을 때 호텔 측에 CCTV 기록을 요구했지만 이미 필름 저장 기간이 지난 뒤였다. 외국인 백댄서 2명이 사건 다음날 미국으로 출국했지만 경찰은 이들을 수사하지 못했다. 사람은 죽었지만, 원인도, 범인도 밝혀지지 않았다. 이 사건이 두고두고 회자되는 이유다.
김성재 엄마 육영애 씨는 지난 22일 “지금 이 사건이 발생했으면 벌써 해결됐을 거다. 당시엔 CCTV 확보도 못했다. 경찰이 돌연사로 판정했다. 초기수사만 잘 이뤄졌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박현광 기자 mua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