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체대 총장, ‘전명규 교수 파면’ 전격 승인… “성적만큼 과정 또한 중요하다” 시대 목소리 반영
‘2002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 당시 전명규 한국 쇼트트랙 국가대표팀 감독과 ‘불사조 유니폼’을 입고 있는 김동성. ‘불사조’ 전명규의 이야기는 같은 해인 2002년 시작됐다. 사진=연합뉴스
[일요신문] ‘철의 제국’처럼 견고했던 빙상캐슬이 무너졌다. 한국체육대학교가 ‘빙상 대통령’ 전명규 교수를 파면하면서 한국 빙상 ‘전명규 시대’는 종국을 맞이했다.
8월 28일 한국체육대학교 안용규 총장은 ‘전명규 교수 파면’을 전격 승인했다. 22일 한국체대 교수진이 전 교수 파면을 결의한지 6일 만에 이뤄진 결정이다. 이렇게 전 교수는 18년 만에 한국체대 교수직을 내려놓게 됐다.
전명규. 21세기 한국 빙상의 역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한국 빙상 전성기를 열어젖힌 장본인이자, 수많은 빙상 관련 논란의 중심에 서온 인물인 까닭이다.
2002년 한국체대 교수로 임용된 전명규 교수는 안현수(현 빅토르 안), 심석희, 이상화, 이승훈, 모태범, 김보름 등 기라성 같은 스타 군단을 육성해 한국 빙상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2000년대 중반 ‘한체대 파벌’로 불리는 전명규 사단은 ‘비한체대 파벌’과의 힘 싸움에서 우위를 점했다. 그리고 2010년대 들어 전명규 교수를 필두로 한 ‘한체대 파벌’은 빙상계 절대권력 위치를 공고히 다졌다. 이른바 ‘빙상캐슬’의 탄생이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둔 시점에서 전명규 교수는 대한빙상경기연맹 부회장, 한국체대 교수 직을 겸임하고 있었다. 국가대표 선발권과 진학권이라는 빙상계 유이한 블루칩을 통제할 만한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던 2018년 1월. 생각지도 못한 사건이 ‘빙상캐슬 붕괴’ 서막을 알리는 도화선에 불을 지폈다.
심석희. 사진=이오이미지
바로 ‘심석희 진천선수촌 이탈 사건’이다. 1월 18일 국내 언론은 “여자 쇼트트랙 국가대표 선수 심석희가 코치의 누적된 폭행으로 진천 선수촌을 이탈했다”는 소식을 일제히 보도했다. 심석희를 폭행한 코치는 조재범 전 여자 쇼트트랙 국가대표 코치였다. 대중은 큰 충격에 빠졌다. 빙상계 간판스타가 지도자로부터 폭행을 당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해하기 어려웠던 까닭이었다.
여기에 더욱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졌다. 대한빙상경기연맹이 심석희의 선수촌 이탈 사실을 은폐하려 했다는 것. 1월 17일 문재인 대통령은 평창 올림픽에 출전하는 쇼트트랙 선수들을 격려하려 진천 선수촌을 찾았다. 문 대통령 방문 전날인 16일 빙상연맹은 청와대 측에 “심석희가 독감에 걸려 행사에 참여할 수 없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빙상연맹의 보고는 얼마 되지않아 거짓으로 판명 났다.
‘심석희 선수촌 이탈 사건’은 일약 국민적 이슈로 부상했다. 그리고 적지 않은 빙상인이 이 사건의 근본적 원인 제공자로 한 인물을 지목했다. 바로 한국체대 전명규 교수였다.
사건 당시 빙상계 복수 관계자들은 “한국체대 재학생인 심석희의 실적은 곧 전명규 교수의 실적이 된다. 여기다 조재범 코치는 ‘전명규 사단’의 떠오르는 젊은 피였다. 조 코치가 선수를 폭행하면서까지 훈련시킨 데엔 분명 배후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스포츠공정위원회가 조 코치에 영구제명 징계를 부여한 것을 두고도 “전형적인 꼬리자르기”란 의견을 표출했다.
이 사건 이후 빙상계를 둘러싼 의혹은 봇물 터지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스피드스케이팅 국가대표 나이 제한 논란’, ‘노선영 올림픽 불참 논란’, ‘평창 동계올림픽 팀추월 왕따 논란’, ‘매스스타트 탱크 논란’ 등 각종 빙상계 논란의 배후로 전 교수가 지목됐다.
여기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이 막을 내린 뒤엔 전명규 교수가 직접적으로 엮여 있는 각종 의혹·논란이 언론 보도를 통해 알려졌다. ‘대한항공 취업청탁 의혹’, ‘대표팀 코치를 향한 욕설 논란’, ‘대표팀 유니폼 교체 부당 개입 논란’, ‘상벌위원 동원 특정인 징계 논란’, ‘파벌싸움 프레임 조작 의혹’, ‘강의시간 골프장 출입 논란’, ‘조교에 스카우트비 지불 강요 의혹’ 등 의혹과 논란이 전 교수를 중심으로 불거졌다.
2018년 4월 7일엔 SBS 시사프로그램 ‘그것이 알고싶다’가 전 교수와 관련한 의혹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당시 방송에선 2016년 사망한 전 남자 쇼트트랙 국가대표 노진규의 비극을 설명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특히 “전 교수의 출전 지시가 ‘악성 골육종’을 앓던 노진규의 치료 골든타임을 놓치게 만든 결정적인 원인일 수 있다”는 의혹도 제기했다.
2018년 5월 23일 문화체육관광부 노태강 차관이 ‘대한빙상경기연맹 특정감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사진=이오이미지
며칠 후인 2018년 4월 11일. 숱한 의혹에 휩싸인 전명규 교수는 “앞으론 연맹에선 어떤 업무도 맞지 않겠다”는 말과 함께 빙상연맹 부회장직을 내려 놓았다. 전 교수의 막강한 권력을 이루던 두 날개 중 한쪽 날개가 꺾인 셈이었다. 하지만 당시 빙상인들은 “전명규 교수가 교수직을 내려놓지 않는 이상, 크게 달라질 것은 없을 것”이라면서 “빙상계엔 ‘언제든 전 교수가 살아 돌아올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팽배해 있다”는 우려의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러던 2018년 5월 23일. 문화체육관광부의 ‘빙상연맹 특정감사 결과 발표’는 다시 한번 전 교수를 궁지로 몰았다. 문화체육관광부 노태강 차관은 ‘빙상연맹 특정감사 결과 발표’ 브리핑을 통해 “아무개 전(前) 부회장이 빙상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권한 없이 빙상연맹 업무에 개입했다”고 밝혔다. 아무개 부회장은 다름아닌 전명규 전 빙상연맹 부회장이었다.
여기에 문체부는 “특정 선수의 한국체육대학교 빙상장 별도 훈련 관련 사실을 교육부에 통보하겠다”고 밝혔다. 문체부의 통보는 교육부가 한국체대 조사에 돌입하는 계기가 됐다.
교육부는 2018년 4월 23일부터 5월 31일까지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전 교수에 대한 조사에 돌입했다. 교육부는 조사를 통해 ‘골프장 출입에 따른 수업 결손’, ‘빙상장 부당 사용’, ‘조교에 대한 갑질 의혹’ 등의 사실관계를 파악했다. 그리고 7월 5일 교육부는 한국체대에 ‘전 교수에 대한 중징계 처분’을 요구했다.
두 달 뒤인 9월, 한국체대 징계위원회는 전명규 교수에게 ‘정직 1개월’의 중징계를 내렸다. 중징계 가운데 가장 낮은 수위였다. ‘체육훈장 청룡장’을 보유한 전 교수는 교육공무원법 ‘포상 감경’ 항목에 따라 징계를 감경 받았다. 최종적으로 전 교수의 징계는 ‘감봉 3개월’이 됐다. 감봉은 경징계에 해당하는 수위다. 이를 두고 빙상계 내부에선 “‘불사조’란 별명은 허언이 아니다. 전 교수는 다시 돌아올 것”이란 불안 심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2018년 10월 23일 국정감사 청문회에 출석한 한국체대 전명규 교수. 사진=이오이미지
감봉 3개월 징계 처분을 받은 다음 달인 2018년 10월 23일. 전명규 교수는 국정감사 청문회에 출석했다. 이날 청문회에서 전 교수는 여러 의혹과 관련한 국회의원들의 질문에 “사실이 아니다”라는 입장으로 당당히 맞섰다. 하지만 손혜원 의원(무소속)이 ‘조재범 옥중편지’와 ‘전명규 녹취록’을 공개하자, 전 교수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심석희 폭행 사건’으로 구속 수감된 조재범 전 코치의 옥중편지에 담긴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전명규 교수가 한국체대의 선수가 무조건 더 잘나가야 한다면서 경기 때마다 나를 매우 압박했다. 심석희의 국제성적이 안 좋을 때면 귀국하자마자 전 교수의 교수실로 불려가 욕을 먹고 작전이 그게 뭐냐며 하루가 멀다 하고 날 괴롭혔다. 전명규 교수실로 호출됐을 때 나는 코치를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전 교수가 내게 욕을 하고 머릴 내리치며 뺨을 때렸다. 또 야구 방망이로 벽을 내리쳐 방망이가 부서졌다. 주변에 있던 유리 같은 것도 깨트리며 불같이 화를 냈다.”
‘전명규 녹취록’엔 “얘(또 다른 폭행 피해자 A 씨)는 지금 정신병원에 갈 정도로 힘들어져야 ‘나 이거 못하겠어, 석희야’라고 할 수 있을 때까지 그 압박은 가야 한다는 거야”라는 내용의 전 교수 육성이 담겨 있었다.
국정감사 청문회에서 공개된 ‘조재범 옥중편지’와 ‘전명규 녹취록’은 전명규 교수를 필두로 한 빙상캐슬의 실체를 가감 없이 들췄다. 스모킹 건(Smoking Gun)이었다.
1월 21일 긴급 기자회견을 연 전명규 교수. 사진=이오이미지
이후 잠잠하던 빙상계엔 다시 한번 폭풍이 불었다. 2019년 1월 심석희가 “조재범 전 코치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하는 대형 사건이 터진 까닭이었다.
1월 21일 ‘젊은빙상인연대’는 “빙상계엔 은폐된 성추문 사건이 최소 6건 더 있다. 그런데 빙상계 성폭력 가해자들이 불이익을 받지 않는 이유는 가해 코치들이 ‘전명규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라는 의혹을 제기했다.
같은 날 오후 전명규 교수는 이례적으로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전 교수는 자신을 둘러싼 여러 의혹에 대한 사실관계를 거듭 부인했다. 그러나 ‘심석희 폭로’로부터 불거진 일련의 의혹들은 이미 ‘불사조’의 회생 능력을 마비시킨 상태였다.
‘체육계 미투’가 국민적 이슈로 떠오른 가운데, 교육부는 다시 한번 한국체대를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2월 11일부터 17일까지 교육부는 한국체대에 대한 종합감사에 착수했다. 그리고 교육부는 6월 24일 한국체대 종합감사 결과를 발표했다. 결과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전명규 교수가 폭행 피해 학생에게 합의를 종용하면서 격리조치 중인 피해 학생과 접촉한 사실을 확인했다. 피해학생과 격리조치를 통보받았지만 제3자를 거쳐 피해학생과 소통해 졸업 뒤 거취를 거론하는 등 세 차례에 걸쳐 접촉했다. 2018년 문체부 특정감사 직전 폭행 피해 학생의 아버지를 만나 감사장에 출석하지 말도록 회유하기도 했다.”
한국체육대학교. 사진=이동섭 기자
이번에도 교육부는 한국체대에 전명규 교수 관련 중징계를 요구했다. 교육부 1차 조사에서 중징계를 요구한 지 354일 만이었다. 한국체대 징계위원회는 ‘교육부의 전명규 교수 관련 두 번째 징계 요구’를 좌시하지 않았다.
8월 22일 한국체대 징계위원회는 전명규 교수에 대한 파면 징계를 전격 의결했다. 최고 수위 징계였다. 8월 28일엔 한국체대 안용규 총장이 징계위원회의 의결사항을 재가했다. 전 교수의 파면 징계가 확정된 것이다. 파면 징계를 받은 전 교수는 앞으로 5년 동안 공무원으로 임용될 수 없다. 퇴직 급여 역시 2분의 1로 감액된다.
전명규 교수가 18년 세월을 공들여 쌓아온 ‘빙상캐슬’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동시에 한국 빙상의 한 시대가 저물었다. ‘성적 제일주의’로 대변되던 전명규 시대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이제는 ‘포스트 전명규’ 시대다. 새로운 시대에 한국 빙상이 세계 정상급 실력을 굳건히 유지할 수 있을지 여부는 섣불리 예측하기 힘들다. 하지만 분명한 건 빙상을 비롯한 체육계 전반에 걸쳐 “성적만큼 과정 또한 중요하다”는 시대의 목소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시대의 목소리를 향한 응답. 그것은 현장에 남아 있는 한국 빙상인들이 풀어야 할 숙제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
한국 빙상, ‘전명규 시대’가 저물었다. 사진=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