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걸 연구하고 창조하는 연기가 너무 좋아…내 안의 보물상자에서 하나씩 꺼내 보여드릴게요”
정인선은 현재 SBS ‘골목식당’을 밝혀주는 중심에 서있다. 최근 떠오른 스타로 보인다. 그는 2018년 방영된 드라마 ‘내 뒤에 테리우스’를 찍으며 소지섭에게 깍듯이 ‘선배’라고 부르기도 했다. 사실 정인선이 방송 데뷔 1년 선배다. 소지섭 방송 데뷔는 1997년이었다. 정인선은 다섯 살이던 1996년 드라마 ‘당신’으로 데뷔했다. ‘일요신문’은 될성부른 떡잎을 만나 소개하는 ‘느낌이 좋아’ 코너를 오래 전 마련했다. 정인선과 ‘일요신문’이 처음 만난 건 아역배우에서 배우로 성장을 시작한 6년 전 2013년이었다. 추석을 맞아 다시 만났다.
‘일요신문’과 처음 인터뷰한 지 6년이 지났다. 세월의 흔적은 없었다. 마냥 밝았다. 사진=씨제스엔터테인먼트 제공
정인선은 끊임 없이 웃었다. 그러면서 “일단 풍성한 한가위 보내세요. 푹 쉬시고 좋은 기운 충전하셔서 나머지 하반기 우리 모두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는 2013년 인터뷰 상황을 또렷이 기억하며 물개 박수를 쳤다.
“너무 신기해요. 다시 ‘일요신문’ 독자를 만나게 돼서 반갑습니다. 그때 인터뷰를 하고 시간이 흘러 다시 이렇게 인터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놀랍고 신기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제 스스로가 매우 기특해 칭찬해주고 싶습니다. 그때 당시의 저와 지금의 저를 놓고 봤을 때도 조금은 잘 큰 것 같아 안심이 듭니다. 제가 생각한 것보다 너무 잘 풀렸어요. 제가 생각한 것보다 너무 저를 좋게 봐주시는 분도 많아졌고 관심 가져주는 분들도 많아져서 늘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1996년 데뷔부터 휴식기가 시작된 2004년 사이는 ‘살인의 추억’으로 방점 찍힌 아역배우 정인선의 인생 1부였다. 2013년 인터뷰 때 정인선은 “연기하는 게 힘들지는 않았지만 그냥 시키는 대로 한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왜 울고 웃어야 하는지 몰랐죠.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생각이 들었고 그런 모습이 싫어서 제가 나오는 TV는 안 봤어요. ‘매직키드 마수리’ 때도 그랬죠”라고 말했다.
이제는 자신을 좀 더 알게 됐다. 조금 더 실험이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어엿해졌다. 정인선은 “그때에 비하면 이젠 연기가 정말 정말 좋아요. 하고 싶은 걸 연구하고 창조하고 관찰하게 됐다는 게 어릴 때와 완전 달라진 점이에요. 갈 길이 아주 멀다고 생각하지만 이 정도만 해도 잘 풀렸다는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아직 연구 중이다. “제 자신에 대한 더 많은 실험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연구도 더 해 봐야 할 것 같고요. 정인선이라는 결과물을 도출했다는 생각보다 여러 가지 시도를 더 해보고 싶어요!” 요즘은 자신이 나오는 TV를 보긴 본단다. 다만 초반에 잘 녹아들었는가만 확인한다. 계속 보면 갇히는 까닭이다.
정인선의 보물상자에 들어있던 건 실험도구였던 셈이었다. 2013년 인터뷰 때 정인선은 “어릴 때 전 ‘아역’이라는 것 외엔 가진 게 없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저를 ‘완성’시키는 게 연기인 것 같아요. 살아오면서 만났던 사람들과 경험, 감정들을 모두 제 안의 보물상자 안에 넣어놨어요. 이제 하나씩 꺼내서 보여드릴게요”라고 했다.
영화 ‘한공주’에서 정인선은 ‘밝다’는 게 뭔지 보여줬다. 사진=스틸컷
정인선의 보물상자 속엔 여러 실험도구가 담겼다. 2014년에 개봉한 ‘한공주’에선 실험도구 ‘싱그러움’이 사용됐다. 20대 정인선은 관객 뇌리에 콕 박혔다. 밀양에서 벌어진 비극적 사건 영화 ‘한공주’에서 정인선은 피해자 역을 맡은 천우희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역을 맡았다. 맑고 밝았다. 조명뿐만 아니라 대사, 목소리까지 싱그러운 고등학생 캐릭터로 러닝타임 112분을 채웠다. 아역배우가 아니라 진짜 배우가 됐다.
2016년 드라마 ‘마녀보감’에서 강력한 신기(神技)를 가진 종무녀가 됐다. 제물이 된 비참한 인물로 그려졌다. 이 작품은 드라마 관계자의 눈을 사로잡았다. 한 프로듀서는 “정인선 연기 보고 놀랐다. 그 전에는 그저 밝은 캐릭터라고 생각했는데 다양한 역에도 잘 어울리는 연기력이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평가했다. 2017년 단막극 ‘맨몸의 소방관’에서 차갑고 폐쇄적인 미대생역도 잘 소화했다. 방화사건으로 부모를 잃은 뒤 큰 상처를 받은 사람이었다.
정인선의 보물상자에는 미혼 여성만 들어있는 게 아니었다. 2018년 방영된 드라마 ‘으라차차 와이키키’에선 싱글맘이 됐다. 차갑고 외로운 캐릭터에서 뭐든 열심히 하겠다는 의욕 가득 허당으로 돌아왔다. 2018년 드라마 ‘내 뒤에 테리우스’에선 남편 잃은 6세 남녀쌍둥이 엄마가 됐다. 거대 음모를 파헤치는 역할까지 맡았다.
2013년 ‘일요신문’과 인터뷰 당시 정인선. 일요신문DB
드라마와 영화에만 갇혀있기엔 정인선의 보물상자엔 담긴 게 너무 많다. 그는 올해 들어 ‘골목식당’에 출연하며 예능까지 발을 넓혔다. 골목식당에 합류하기 앞서서도 정인선은 두려움에 싸여 있었다. “예능은 뭔가 무서웠어요. 날것 그대로가 나가니까 부담스러웠죠. 그래서 참 힘들겠다 싶었어요. 정말 고민이 많았죠.”
그는 자신이 했던 말을 지켰다. 보물상자 안에 넣은 ‘씩씩이’와 ‘싹싹이’를 꺼내놨다. 코미디언 김민교와 작은 트럭에서 태국 음식을 만들어 지나는 고객에게 맛난 음식을 대접했다. 허술해 보이지만 촘촘한 요리 실력과 특유의 털털함이 하나씩 묻어나기 시작했다. 김민교의 큰 눈 앞에 놀란 고객에게 싱그러운 웃음을 줬다.
2013년 인터뷰에서 그의 세종대 영화예술학과 진학이 알려졌다. 정인선은 “연기를 쉬고 학교 공부를 하면서 심리학과 영화학에 관심이 갔어요. 그쪽으로 갈까 고민도 했어요. 하지만 연기보다는 부수적인 부분이었죠”라고 말했다. 꿈은 오롯이 연기였다.
지금은 다를까. 유명세가 따르면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다. 정인선은 지금도 종종걸음으로 충정로 골목의 작은 술집에서 친구와 술을 마신다. 긴 촬영이 끝나고 산 핑크색 조립식 컴퓨터와 함께 방에 콕 박혀 게임을 즐기기도 한다. 곧 들어갈 tvN 드라마 ‘싸이코패스 다이어리’를 함께하는 데뷔 11년차 후배 윤시윤를 가리켜 여전히 선배라고 한다. 꿈이 뭐냐고 물으니 말한다. “그냥 변치 않고 오래 오래 다양한 모습 연기하며 사는 거요.”
최훈민 기자 jipcha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