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은 물론 뉴스에서도 신조어 사용…“한글 파괴 심각” vs “트렌드 반영” 갑론을박
지난 10월 9일 한글날을 지내며 각종 인터넷 게시판에는 예능 자막 사용을 둘러싼 네티즌들의 다양한 의견이 오갔다. 한쪽은 예능 자막의 한글 파괴현상이 너무 심각하다는 지적이었고, 다른 한쪽은 하나의 유행일 뿐 한글을 근본적으로 훼손하지 않는다는 반박이었다. 과연 어느 쪽 손을 들어줘야 할까.
#뉴스에서도 ‘역대급’? 명백한 방송법 위반!
요즘 젊은 층이 가장 많이 쓰는 표현 하나는 ‘역대급’이다. ‘역대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대단하다’는 의미의 이 단어는 어법에 맞지 않는 신조어다. 하지만 예능에 출연하는 연예인들은 스스럼없이 “역대급이다”라고 외치고 이 표현은 여과 없이 자막으로 붙는다.
심지어 뉴스에서도 쓰인다. 올해 여름 태풍이 한반도를 덮쳤을 때 지상파 뉴스에서 ‘역대급 태풍’ ‘역대급 피해’ 등의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적잖이 볼 수 있었다. MBC ‘뉴스데스크’도 날씨를 소개하며 “역대급 7월 더위가 기승을 부렸습니다”라고 리포팅한 바 있다.
MBC ‘뉴스데스크’에서 날씨를 소개하며 등장한 ‘역대급’이라는 자막. 사진=MBC 방송 화면 캡처
이런 한글 파괴는 예능으로 가면 더 심각해진다. 학교에서 급식을 먹는 10대들이 사용한다는 소위 ‘급식체’는 예능 자막의 단골손님이다. ‘띵곡’, ‘커엽’은 각각 ‘명곡’과 ‘귀엽’이라는 의미다. 두 글자의 모양이 비슷하다는 측면에서 만들어진 급식체다.
급식체의 또 다른 형태는 줄임말이다. ‘마상’, ‘아아’, ‘세젤예’, ‘할많하않’은 무슨 뜻일까? 각각 ‘마음의 상처’, ‘아이스 아메리카노’, ‘세상에서 제일 예쁜’,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를 줄여서 쓴 표현이다. 실제로 10대를 포함한 젊은 세대들이 이런 표현을 많이 쓰고 있으며, 이해하지 못하면 시대에 뒤처졌다는 평을 받는다. 포털 사이트에서 급식체를 검색하면 급식체의 뜻을 맞히는 퀴즈를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학부모나 교사들이 10대들의 대화법을 이해하기 위해 급식체를 ‘공부’하는 지경이다.
또 다른 형태는 한글 영어 숫자 등을 섞어서 만든 외계어다. ‘Aㅏ 그렇구나’, ‘ㅅrㄴr이는 울ㅈㅣ않ㅇr’, ‘자신있G1’ 등은 따로 공부하지 않아도 직관적으로 읽을 수 있다. 각각 ‘아 그렇구나’, ‘사나이는 울지 않아’, ‘자신 있지’로 읽힌다.
모든 세대에게는 그들만의 문법이 존재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언어 습관이 한글 파괴로 직결되지는 않는다는 반응도 있다. 하지만 이를 방송사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다. 방송법 제6조 8항은 ‘방송은 표준말의 보급에 이바지하여야 하며 언어순화에 힘써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또한 방송통신심의위원회 규칙인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 제51조 3항에는 ‘방송은 바른 언어생활을 해치는 억양, 어조 및 비속어, 은어, 유행어, 조어, 반말 등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적혀 있다. 결국 방송사들이 대중의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재미를 유발한다는 미명 아래 법을 어기고 있는 셈이다.
공영방송 KBS도 예능 자막의 한글 파괴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할많하않’이라는 자막이 나오는 KBS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 방송 화면.
한 방송 관계자는 “과거에는 방송이 정도를 지켰다. 아무리 시청자의 흥미를 끌겠다는 목적이 있어도 표준어 사용을 절대적으로 준수했다”며 “시대가 바뀌고 재미를 더 앞선 가치로 삼는 분위기가 조성됐다고 하더라도, 최근 예능 자막의 한글 파괴는 그 정도가 너무 심한 것 같다”고 꼬집었다.
#“이 또한 유행일 뿐” 트렌드를 이해하자!
인터넷의 발달, 스마트폰의 보급, 다채널 등의 영향으로 느긋이 기다리는 문화가 사라져 간다. 예능 프로그램도 조금이라도 재미가 없으면 곧바로 채널이 돌아간다. 쉽게 싫증을 느끼는 시청자들을 사로잡기 위해 예능 PD가 꺼낸 무기가 바로 자막이다. 화면 속 등장인물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자막은 끊임없이 붙는다. 마치 만화책처럼 자막이 출연진의 얼굴을 덮어버리기도 한다.
외계어나 급식체의 줄임말은 좁은 화면 안에 많은 의미를 담아야 하는 예능 자막에 적합한 형태라 할 수 있다. 한 지상파 예능국 PD는 “한 명의 출연자가 다른 한 명을 나무라서 토라졌을 때 ‘마상’이라는 딱 두 글자만 붙여주면 의미가 통한다”며 “줄임말은 경제적인 표현인 동시에 예능을 즐기는 10∼20대들이 ‘그들만의 재미’를 추구하는 방식이라 그에 발맞춰 자막을 붙인다”고 말했다.
이러한 예능 자막을 너무 심각하게 바라볼 필요는 없다는 입장도 있다. 과거에도 유행어는 많았다. ‘캡’, ‘따봉’, ‘웬열’ 등은 1990년대 전후 신세대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표현이었다. 당시 기성세대들도 이런 표현을 쓰는 젊은 층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하지만 이런 현상이 한글 파괴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결국 한때의 재미로 사용하는 표현일 뿐, 한글 자체를 훼손시키지는 않는다는 주장이다.
시대의 흐름을 이해해달라는 주문도 있다. 다채널 다매체 시대가 되면서 예능의 종류도 다양해졌다. ‘미스트롯’ ‘불후의명곡’처럼 중장년층이 선호하는 프로그램이 있고, ‘워크맨’ ‘플레이어’처럼 10∼20대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예능이 있다. 그리고 급식체, 외계어를 사용한 자막은 주로 후자에 달린다.
또 다른 예능국 PD는 “모든 예능 프로그램 속 자막이 변형된 한글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각 프로그램의 성격에 맞춰 제작진이 유연하게 이를 붙인다”며 “각 예능을 찾는 시청자들의 니즈에 맞춰 트렌디한 자막을 붙여 재미를 부여하는 것 또한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말했다.
김소리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