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천사’ 한국어판 OST 발매 소식에 26억 모여…독립만화, 웹툰 단행본 등 담아내는 창구 정착
#‘달빛천사’ OST, 어른이 팬들이 쌓아올린 돈다발
후원 약정자 수 7만 2513명에 최종 결제자 7만 714명, 97% 결제 성공이라는 놀라운 성적으로 제작 진행이 확정된 ‘달빛천사’ 국내 정식 OST 발매는 주인공 루나를 연기한 성우이자 수록곡 대부분을 불렀던 이용신 씨가 2019년 방영 15주년을 맞아 직접 추진한 기획이다. 목에 병을 앓고 있어 오래 못 살 것으로 진단 받았던 12세 소녀 루나가 자신의 혼을 맞이하러 온 두 사신의 도움을 받아 건강한 모습으로 변신해 ‘풀문’이란 이름으로 가수의 꿈을 이룬다는 ‘달빛천사’ 내용에 따라 루나의 노래 솜씨가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였다.
일각의 우려를 비웃듯, 전속 성우 데뷔 전 이미 광고 음악 가수로 두각을 드러내고 있던 이용신 씨(대표곡 초O파이 광고 노래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를 기용한 한국어 더빙판은 아예 가수가 작중 미츠키(루나의 원래 일본 이름)를 연기했던 일본 쪽 방영판을 연기와 노래의 조화 면에서 아득히 추월하며 많은 이들에게 매우 진한 인상을 남겼다. 하지만 그만큼 노래가 중요한 작품임에도 한국어판 OST가 발매되지 않아 아쉬움을 토로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래서일까, 여는 노래와 마무리 노래를 비롯해 주요 삽입곡의 한국어판은 방영 당시 녹화된 영상과 음악 파일 등으로 알음알음 공유되며 어느 사이엔가 전설 속 불후의 명곡처럼 흘러 다니고 있었다. 그러니 무려 15년 만에 성우가 OST를 정식으로 만들어 보겠다고 나선 일에 귀가 솔깃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할 상황이었다.
당시에 작품의 대상 연령대라 했을 법한 10대 중반 아이들은 어느덧 자기 지갑을 자기가 채울 수 있을 만한 ‘어른이’들이 되었다. 일본의 어처구니없는 혐한 정책으로 말미암아 한국 내에서도 일제 불매가 이어지고 있는 와중이지만, 성장기를 장식한 노래의 제대로 된 복원을 마음속 깊이 기다려온 이들의 열망에 불씨가 붙자 반응은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게 됐다.
#크라우드 펀딩이 있기에 가능한 시도들
‘달빛천사’ 정식 한국어판 OST의 모금 성공은 오히려 국내 방영 직후였으면 이만큼이나 가능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극적이다. 당연히 추억 보정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고 설명할 수 있겠지만, 그와 더불어 이 모금을 가능하게 한 시스템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설령 업체 단위가 아니어도 아이디어를 실체화할 비용을 불특정 다수에게서 모아 밑천으로 삼을 수 있게 해 주는 크라우드 펀딩(Crowd Funding)이 바로 그것이다. ‘달빛천사’ 정식 한국어판 OST가 모은 26억여 원은 2011년 첫 선을 보인 국내 크라우드 펀딩 역사상 가장 큰 액수다.
26억이라는 성과는 분명 아이템의 힘과 성우의 실력, 그리고 15년이라는 오랜 기다림이 쌓은 갈망이 빚어낸 결과다. 하지만 만약 이 음반을 일반적인 형태로 음반사가 출시하려 했다면 결과는 물론이거니와 출시도 장담할 수는 없었을 터다. 실제로 음반을 준비한 이용신 성우 측도 처음 회의할 때엔 ‘1000장은 팔리겠지’라는 심정이었다고 하니, 불확실성을 최소화해야 하는 보통 회사 입장에서는 반응을 얼마나 얻을지 알 수 없는 상품을 쉬 내어놓을 수 없다.
어찌 보면 시장이라는 정글 앞에서 당연하게 적용되는 적자생존의 법칙이지만, 적지만 확실하게 확보된 비용 안에서 세상에 내어놓는 데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기발한 아이디어를 실제로 구현하는 데에 목적을 두고자 하는 경우도 있게 마련이다. 크라우드 펀딩은 바로 이런 이들에게 ‘시작’할 수 있는 비용을 모아주는 시스템을 제공한다. 이 시스템은 창작자 또는 제작자가 정한 기간 동안 펀딩 약정을 받은 후 예정한 금액만큼 약정액을 달성하면 성공 표시와 함께 약정자들의 계좌에서 돈을 인출한다. 펀딩 사이트는 이렇게 모인 확정 금액 가운데 일부를 수수료로 받는다.
크라우드 펀딩은 흔히 기술을 지닌 스타트업 기업들의 기발한 시도들을 밀어주는 데에 많이 쓰이지만, 만화를 비롯해 음반, 소설, 시와 같은 문화 예술 창작자·제작자들에게도 숨구멍 역할을 해 주고 있다. 특히 만화 쪽에서는 크라우드 펀딩이 독립 만화, 웹툰의 단행본, 만화 리뷰 및 비평집 출간 등 책 형태로 만화와 담론을 담아내는 창구로서 정착하는 추세다.
기성 출판사가 쉬 내지 못할 소재나 장르를 작가나 집단이 직접 수요자를 모음으로써 세상에 내어놓는다는 점에서 웹툰 외의 형식을 띤 젊은 작가군의 신작이 나오기 어려운 한국 만화에 독립된 창구 역할을 해 주기 때문이다. 예전엔 아마추어 만화 회지(만화 동인지)가 했던 역할을 지금은 크라우드 펀딩이 하는 셈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기본 품질이다. 요즘 수요자들은 의미만으로는 절대로 움직이지 않고, 받아볼 책이 내용은 물론 장정 등 책으로서의 품질도 일정 이상 보장하기를 요구한다.
지난해에 이어 텀블벅에서 2호를 펀딩 중인 만화 비평·리뷰집 ‘만화 읽고 쓰다’. 만화 창작자 성인수 씨와 만화 평론가 이재민 씨를 중심으로 그해 연재·출간된 만화를 소개한다.
#다양성이라는 축을 담당하는 이들에게 시선을
크라우드 펀딩은 과정 자체가 일종의 수요량 측정이자 기세 싸움이기도 하다. 웹툰 업체인 레진코믹스는 ‘여자 제갈량’ 등의 만화를 출간하는 데에 크라우드 펀딩 서비스인 텀블벅을 이용했다. 레진코믹스 관계자는 ‘책의 실험 – 챕터 제로’(롤링다이스 간)에 실린 대담에서 직접 출간에 투자하는 대신 크라우드 펀딩을 이용하는 까닭을 “사전 붐업과 바이럴 효과”라 밝힌 바 있다. 말하자면 크라우드 펀딩이 업체의 마케팅으로 쓰인 셈이다.
만화는 물론 어떤 분야에서도 ‘달빛천사’ 정식 한국어판 OST만큼 큰 액수를 모으는 사례가 당분간 금방 또 나오기는 어려울 터다. 콘텐츠와 성격에 따라서는 모을 수 있는 액수가 이만큼이나 된다는 선례가 나온 이상, 한동안 이 시스템에 시선이 모이는 건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상업적 성공을 위한 방편과 규모를 고려하지 않을 순 없을지라도, 크라우드 펀딩이라도 써서 대중을 만나고자 하는 ‘아직 작지만 단단한’ 창작자·기획자들에게 대중들이 조금씩 더 시선을 건네어 주면 좋겠다. 이들이야말로 사실 만화, 그리고 나아가 우리나라의 문화 예술에서 다양성이라는 한 축을 지탱하는 보루기 때문이다.
만화칼럼니스트 iam@seochanhw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