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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정부와 현대의 관계는 지난 98년 DJ 정부가 출범한 이후 드러난 것만 나열해도 어느 정도 밀착도를 짐작할 수 있다.
현대의 대북사업과 남북 정상회담, DJ 노벨평화상 수상, 기아차 LG반도체 한남투신의 현대 인수, 전대미문의 회사채 신속인수제 실시, 한국관광공사의 현대아산 지원(8백12억원) 등. 현대는 DJ 정부에 정치적 지원을, DJ 정부는 현대에 경제적 지원을 했던 셈이다.
그러면 DJ 정부와 현대의 밀월은 어떻게 시작됐을까. 지난 97년 9월 눈길을 끈 한 사건이 있었다. 대선 직전 일본 도쿄에서 열린 프랑스월드컵 축구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한국과 일본의 B조 경기를 정주영 명예회장과 김대중 후보가 나란히 관람한 것.
김 후보와 정 명예회장은 대선을 코앞에 두고 현대 소유인 양양 동해관광호텔에서 또 ‘우연히’ 만나는 모습이 언론에 공개됐다. 이같은 일련의 사건은 당시 정재계에 많은 추측을 낳았다.
두 사람의 밀월은 92년 YS가 대통령에 당선, 동병상련의 처지가 되면서 시작됐다는 게 정설. 정 회장과 DJ가 정치적으로 함께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하지만 DJ는 “조용히 지내는 것이 낫다”며 정 회장을 돌려보냈다는 비화가 전해진다. 국민의 정부 들어 양측은 본격적인 ‘밀월관계’에 돌입했다. DJ의 ‘햇볕정책’과 정 명예회장의 금강산 관광사업 추진 시점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것도 밀월을 더해준 대목.
현대로선 대북사업을 본격화하기 위해 ‘공무원’이 된 DJ의 도장(인허가권)이 필요했고, DJ는 대북사업을 추진할 현대의 돈이 필요했던 것. 현대가 대북사업의 출발점으로 삼은 금강산 개발사업은, 현대가 YS에 묶여있던 시절 통일교그룹에서 김일성 주석의 친필 사인까지 받아놓은 상태였다.
문서상으로 보면 현대가 금강산에 새로 발을 들여놓을 틈도 없었다. 하지만 현대는 막대한 돈(투자)으로 북한을 설득하고, 우리쪽의 인허가권을 쥔 DJ정부가 금강산 관광 사업의 단일사업권자로 현대를 지정하게 하는 재주를 부렸다. 이 과정에서 북한에 준 뒷돈이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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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처음부터 현대가 국민의 정부에 ‘협조’했던 것은 아니다. 정부의 빅딜 정책에 처음엔 반대입장을 취했다. 그런데 98년 8월, DJ와 왕회장의 청와대 회동 이후 방향을 선회했다. 이후 현대는 정부의 고민을 풀어주는 ‘해결사’로 나선 것이다.
당시 정부의 골칫거리 가운데 하나였던 한남투신을 그 해 8월25일 인수했다. 호남에 기반을 둔 한남투신이 현대그룹 계열사인 국민투자신탁운용으로 넘어갔다. DJ 정부와 현대간 ‘밀월관계’의 하이라이트는 현대의 기아-아시아자동차 인수였다. 지난 98년 10월19일, 1년3개월 동안 진행된 기아차 입찰의 최종 낙찰자로 현대가 선정됐던 것.
DJ 정부의 고민거리를 해결해주면서 사업도 확장하던 현대는 ‘대북 사업권’을 따내기 위해 특유의 뚝심을 발휘했다. 북한측과 협상 끝에 98년 11월18일 금강산관광 유람선이 출항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정부는 이를 “‘햇볕정책의 옥동자’를 탄생시켰다”며 극찬했다.
지난 99년에도 현대의 밀월시대는 계속됐다. 현대정유는 99년 3월15일, 한화에너지의 정유사업부문을 인수해 업계 3위로 올라섰다. 이어 현대전자(현 하이닉스반도체)는 99년 7월8일, LG반도체 지분의 60% 정도를 인수했다. 당시 현대전자는 2조5천6백억원으로 LG반도체의 경영권을 확보했다.
당시 재계에서 현대를 가리켜 ‘안 되는 것이 없는 재벌’이라고 수군댄 것도 이 때문. 이 와중에 2000년 6월 김 대통령의 북한 방문이라는 또 하나의 빅이벤트가 터졌다. 이어 그해 12월 김대중 대통령이 남북화해와 교류협력에 대한 기여로 노벨평화상을 탔다. 하지만 DJ정부와 현대의 ‘밀월’은 남북정상회담 이후부터 금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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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북송금 특검 수사팀 김종훈 특검보(얼굴 보이는 이)가 기자들에 둘러싸여 질문에 답하고 있다. | ||
여기서 정부와 현대간의 불화설이 촉발됐다. 투자만 했지 수익도 제대로 못낸 대북사업의 기득권을 내놓을 수 없는 현대의 입장은 너무 달랐다.
게다가 그해 6월30일, 유동성 위기에 몰린 현대는 구조조정을 하겠다는 약속을 뒤집으면서 정부와 갈등이 깊어졌다. 결국 이 문제는 2000년 9월 정몽구 회장이 현대차 계열을 현대그룹에서 독립함으로써 마무리됐다.
하지만 이 사태는 근본적으로 대북사업과 관련해 현대의 자금이 바닥을 드러내면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2000년 5월 현대건설이 유동성 위기에 빠지면서 채권단이 2천억원을 긴급지원하는 등 현대그룹의 유동성 위기가 공론화된 것. 이에 현대는 주요 계열사의 계열분리 방침을 밝히는 등 구조조정을 약속했다.
현대는 왕자의 난으로 시끄러웠다. 언론은 현대그룹의 주요 계열사의 경영권을 정 명예회장의 2세인 정몽구 회장과 정몽헌 회장 중 누가 갖느냐를 두고 두 형제가 치열하게 싸운다고 봤다. 하지만 이 사건의 본질에 대해 당시 대북사업 자금 마련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은 나중에 다른 사정이 있었음을 털어놓았다. 그는 “대북사업을 계속하기 위해선 현대차가 꼭 필요했다”고 말했다.
재계에선 현대그룹 유동성 위기의 주요 원인으로 ‘대북사업에 거액을 빨렸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이와 관련해 눈길을 끄는 것은 바이코리아 펀드. 이익치 전 회장은 99년 3월 주식형 수익증권 ‘바이 코리아’를 처음 선보였다. 이 상품은 발매된 지 몇 달만에 10조원을 돌파하는 신기록을 세웠으며, 현대증권의 약정고는 업계 1위로 단박에 뛰어올랐다.
하지만 99년 9월 검찰은 이씨를 현대전자 주가조작 혐의로 구속했다. 바이코리아는 결과적으로 펀드에 조성된 돈으로 현대 계열사의 채권을 매입해주는 등 그룹의 유동성을 측면 지원해주는 면이 있었다.
2001년 3월 정 명예회장이 작고했다. 죽기 전 “내 재산의 10분의 1을 북한에 투자하겠다”며 마지막 승부를 걸었던 정 명예회장은 미완의 프로젝트를 남겼다. 그가 왜 재산의 10분의 1을 북한에 투자하고 싶어했는지는 아직 밝혀진 게 없다.
대북사업가 장석중씨는 그 이유에 대해 들었다고 주장하지만 “사나이 대 사나이의 약속”으로 비밀이라며 입을 다물고 있다. 일각에선 정 명예회장이 고향 통천 마을의 비디오를 보고 눈물을 흘린 점을 들어 가족사의 비밀을 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