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지켜야 할 우리 유산 [39] 신라 천년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거대한 노천 박물관
고려 후기의 학자 이곡이 자신의 시문집 ‘가정집’에서 경주를 방문하고 남긴 글이다. 이곡의 말마따나, 신라의 천년 고도였던 경주는 ‘노천 박물관’이라 불릴 만큼 많은 사적지와 유물이 산재해 있는 역사와 문화의 도시다. 거리를 나서면 신라시대의 빼어난 불교건축과 찬란한 문화의 자취를 도처에서 만날 수 있다. 2000년 유네스코가 ‘경주역사유적지구’를 세계유산 목록에 등재한 것도 경주 곳곳에 깃들어 있는 유적과 문화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경주역사유적지구는 2880㏊에 이르는 광활한 면적(유산 면적)에 52개의 지정문화재를 포함해 수많은 유적과 유물을 품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된 안압지(동궁과 월지)의 야경. 사진=연합뉴스
경주는 기원전 57년부터 서기 935년까지 신라와 통일신라의 도읍지였다. 이처럼 1000년 동안 한 나라의 수도로서 문화와 예술을 꽃피운 도시는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다. 신라시대에는 서라벌(계림)로 불렸고, 경주라는 지명은 고려시대부터 사용됐다. ‘경상도’(경주와 상주의 머리글자를 합성한 이름)라는 지명도 이때부터 유래됐다. 고려 충렬왕 때 경주를 계림(부)이라 칭하기도 했지만, 조선 태종 시절에 다시 ‘경주’로 고치도록 했다. 통일신라가 역사의 무대 너머로 사라진 뒤에도 경주는 신라 왕실의 흔적과 국가 종교였던 불교 문화의 특징을 깊이 간직하며 또 한 번의 천년을 보내왔다.
경주역사유적지구는 2880㏊에 이르는 광활한 면적(유산 면적)에 52개의 지정문화재를 포함해 수많은 유적과 유물을 품고 있다. 경주역사유적지구는 그 성격에 따라 다양한 불교 유적이 자리해 있는 남산지구, 옛 왕궁 터였던 월성지구, 많은 고분(고대에 만들어진 무덤)이 모여 있는 대릉원지구, 불교 사찰 유적지인 황룡사지구, 방어용 산성이 위치한 산성지구 등 다섯 구역으로 나뉜다.
불교문화의 보고인 남산지구는 신라의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한 유서 깊은 지역이다. 신라 건국설화에 나타나는 나정(시조 박혁거세가 나온 알이 그 곁에 있었다고 하는 전설상의 우물), 신라 왕조의 번영과 종말을 함께한 포석정이 이곳에 있다. 또한 미륵곡 석불좌상, 배리 석불입상, 칠불암 마애석불 등 수많은 불교유적이 산재해 있다.
월성지구에는 신라왕궁이 자리하고 있던 월성, 신라 김씨 왕조의 시조인 김알지가 태어났다는 숲인 계림,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된 연못 안압지(동궁과 월지), 그리고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시설인 첨성대 등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계림에는 조선 순조 때 세운 김알지 탄생 설화가 담긴 비석이 남아 있기도 하다.
대릉원지구는 신라시대의 왕과 왕비, 귀족들이 영면에 든 곳으로, 구획에 따라 황남리 고분군, 노동리 고분군, 노서리 고분군 등으로 부르고 있다. 대릉원이라는 이름은 13대 왕이자 신라 최초의 김씨 왕인 미추왕의 왕릉을 ‘대릉’이라 불렀던 데서 연유했다. 여러 고분을 발굴 조사하는 과정에서 신라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금관, 천마도, 유리잔 등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유물들이 다수 출토됐다. 천마총에서 발굴된 ‘말다래 천마도’의 경우 기마문화의 유입과 확산을 알려주는 사료로서도 가치가 높다. 말다래란 말 탄 사람의 옷에 진흙이 튀지 않도록 말의 배 양쪽에 늘어뜨린 네모난 판을 뜻한다.
분황사 모전석탑. 사진=문화재청
황룡사지구의 주요 유적으로는 신라 제일의 사찰이던 황룡사의 옛 터, 황룡사지와 ‘황제의 절’이라는 의미를 지닌 분황사가 있다. 황룡사는 진흥왕 때 본래 궁궐을 짓다가 ‘황룡’이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사찰로 고쳐 짓게 된 곳이라고 한다. 이른바 신라삼보(신라의 3가지 보물) 중 천사옥대(하늘의 사자가 진평왕에게 내려줬다는 옥대)를 제외한 2가지 보물을 보유했던 사찰이기도 하다.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세운 9층목탑, 금과 철로 만들어진 5m가 넘는 불상인 장육존상이 바로 그것이다. 신라 화가 솔거가 황룡사 벽에 그린 ‘노송도’에 새들이 앉으려다 부딪쳐 떨어졌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하지만 황룡사는 고려 고종 때 몽고의 침략으로 모두 불타 없어져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다. 1976년부터 시작된 발굴조사에서 금동불입상·풍경·금동귀걸이 등 4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됐으며, 높이 182㎝에 이르는 대형 치미(전통 건물의 양쪽 끝머리에 얹는 장식 기와)는 당시 황룡사가 얼마나 웅장한 건축물이었는가를 미루어 짐작케 해준다.
분황사의 경우엔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모전석탑으로 유명하다. 현재 남아 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걸작으로 꼽히는데, 원래 9층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은 3층만 남아 있다.
산성지구는 왕궁이 있는 경주를 지키는 핵심 방어시설인 산성이 자리 잡은 곳이다. 동쪽의 명활성(옛 명활산성), 서쪽의 서형산성, 북쪽의 북형산성 등이 있는데, 그 중 비교적 보존 상태가 나은 것은 명활성이다. 자연석을 이용해 쌓은 이 산성은 성벽의 둘레가 둘레 약 6㎞에 이른다. 선덕여왕 때 상대등 비담이 이곳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김유신이 평정한 바 있다.
경주역사유적지구는 이처럼 다양한 유적과 흥미로운 역사 콘텐츠를 품고 있다. 또한 이 지역의 유적에 대한 조사와 연구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천년 신라의 비밀의 문은 아직 다 열리지 않은 셈이다.
자료협조=유네스코한국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