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의 정원과는 달리 일반 시민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공원이라는 공간은 근대화 이후 본격적으로 생겨나기 시작했죠.
인천 자유공원
지금도 인천을 대표하는 공원 중의 하나인 자유공원은 인천 개항 초기인 1888년에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인천지역에는 인천항을 통해 들어온 외국인 거주자들이 꽤 있었는데 이들이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공원이 필요했죠. 그 결과 러시아 출신 토목기사 사바틴이 이 공원을 설계했고 꾸준한 확장 작업을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공원으로 잘못 알려진 서울의 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이 1897년에 세워졌으니, 인천 자유공원이 이보다 9년 앞선 최초의 서구식 공원이 맞는 것이죠.
응봉산에 자리잡은 이 공원은 처음 만들어질 당시에는 ‘각국공원’이라고 불렸습니다. 이는 인천 개항 이후 인천으로 몰려든 서양 사람들이 한데 모여 살던 각국조계 안에 공원이 있었기 때문이죠.
각국공원
각국조계는 462,000㎡(14만 평)이나 되는 넓은 면적에 독일, 영국, 러시아, 미국 등 여러 나라의 서양인들이 살았는데, 그 위치는 일본인이나 청국인들이 모여 살던 일본조계와 청국조계를 제외한 응봉산 일대 대부분을 포함하는 지역이었습니다.
일본조계가 23,100㎡(7천 평), 청국조계가 16,500㎡(5천 평) 정도였던 것에 비하면 각국조계는 무척 컸던 셈으로, 이곳을 여러 개의 구역으로 나눠 구획 정리 사업을 하면서 이 공원을 만든 것입니다.
그 뒤 일본은 지금의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자리에 자신들의 신사를 세워 그곳을 ‘동공원(東公園)’, 각국공원은 ‘서공원(西公園)’으로 바꿨습니다. 그러다가 1945년 광복이 되면서 서공원은 한동안 ‘만국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었습니다.
오늘날의 명칭인 ‘자유공원’으로 바뀐 것은 1957년부터죠.
1950년 9월 인천 상륙작전을 지휘한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공을 기리는 뜻에서 시민들이 성금을 모아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만들었고 공원 남동쪽 부지에 동상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당시 김정렬 인천시장에 의해 공원 명칭이 ‘자유공원’으로 명명됐죠.
공원 내에는 맥아더 장군 동상을 비롯해 1982년 한-미 수교 100주년 기념탑이 세워져 있고 석정루나 연오정 등 팔각지붕의 전통 형식의 건물도 있는데요, 특히 석정루나 자유공원 광장에서 인천항 전경을 한눈에 즐길 수 있는데 특히 석양이 아름다운 것으로 유명합니다.
인천 상륙 작전 당시 맥아더 장군
그래서 매년 12월 31일에 서구 정서진과 월미도 등과 함께 해넘이 행사가 자유공원 광장에서 진행되곤 하죠.
자유공원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도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닌 곳이기도 합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 축이자 한반도 유일의 임시정부였던 한성 임시정부의 수립을 의결한 곳이 바로 이 공원이기 때문이죠.
한성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2일 전국 13도 대표자들이 자유 공원에서 모여 결의를 하고 23일 서울 봉춘관에서 <국민대회 취지서>를 발표하고 <임시정부 선포문>을 선언함으로써 수립되었습니다. 자유공원 광장에는 임시정부 수립의 터전이었다는 것을 기념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죠.
현재의 제물포구락부
자유공원은 인천 중구에서 적극적으로 추천하는 관광코스로도 유명합니다. 자유공원 안쪽 산책로 주변에는 적잖은 규모로 벚꽃이 심어져 있는데 근처 월미공원과 더불어 매년 봄철이면 벚꽃 풍경을 보기 위한 인파로 붐비는 곳이 됐습니다.
자유공원에서 내려다보는 인천 전경과 바다의 풍경은 과거와 현재가 뒤섞인 감흥을 주는 곳입니다.
허순옥 여행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