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식은 중요 뉴스를 마감 30분을 남겨놓고 받았기 때문이었고, 탄성은 협상결과 때문이었다. 국내 채권단은 ‘인센티브 시스템에 의한 CBO(Cash Buy-Outㆍ채권현금매입비율)’라는 새로운 구조조정 모델을 제시하면서 해외채권단과의 협상에서 기존 입장인 ‘43%의 CBO’라는 원칙을 지켜냈다. 해외채권단은 이전까지 ‘100%+알파’를 요구할 만큼 강경했다.
양측의 밀고당기기를 간단히 풀이하면 1백원짜리 SK글로벌 채권에 대해 해외채권단은 1백원 이상을 요구한 데 반해 국내 채권단은 43원 이상은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국내채권단은 양측의 커다란 의견차이에도 마지노선을 지켜냈다. 해외채권단의 ‘하는 모양’을 봐가며 3원에서 5원까지 더 얹어주는 선에서 타결한 것.
▲ SK글로벌의 주채권은행인 하나은행 김승유 행장 은 해외채권단과의 협상에서 과감한 결단과 뚝심 으로 ‘국내외 채권단 동등 대우’라는 원칙을 지켜냈다. | ||
국내 채권단의 SK글로벌 CBO는 30%로 해외채권단과 별 차이가 없다. S증권의 한 금융담당 애널리스트는 “대우, 하이닉스 때를 생각하면 속이 다 시원하다”고 말했다.
한국 금융사에 새로운 획을 그은 이번 협상은 지난 3월12일 SK글로벌 사태 발발 이후 숨가쁘게 달려왔다.
검찰의 SK글로벌 분식회계 수사 발표 후 SK글로벌에 대한 채권단 공동관리 등의 조치를 지켜보던 해외 채권금융기관 48곳은 해외채무가 동결되자 강력 반발하며 3월 말 홍콩에서 처음 모임을 갖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해외채권단 1차회의는 사스(SARS)로 4월8일 도쿄에서 여는 것으로 조정됐다. 일정차질은 ‘중차대한 협상’에서 종종 불길함의 서곡이었다.
1차회의 당일 도쿄 ANA호텔 회의실에 모인 해외채권금융기관 24곳은 운영위원회를 꾸리고 스탠다드차터드 은행을 주간사, 페리어헉슨을 재정자문사, 클리어리를 법률자문사로 선정하는 것을 신호탄으로 국내채권단과의 접전에 들어갔다. 이날 회의에서 해외채권단은 “지속적인 이자지급과 정보제공 등에 있어서 동등한 대우”를 국내 채권단에 요구한 것으로 발표됐지만 실제 회의 내용과 분위기는 험악했다.
채권단 회의에 참석한 한 외국계 은행관계자는 “SK글로벌뿐 아니라 금융권 등 한국이 우리를 속였다”면서 “적절한 보상이 없으면 한국기업들의 여신한도를 줄이자는 의견이 곳곳에서 나왔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한국정부가 나서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도 상당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지난달 24일 열린 전체 채권금융기관협의회에서 해외채권단의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삼성, LG 등 국내 대기업의 대출과 보증을 재검토하겠다”는 협박은 이미 협상 전단계부터 준비돼 왔던 것이다.
6월26일 홍콩에서 국내채권단과 해외채권단이 공식적으론 처음 마주 앉았다. SK글로벌 회생 계획에 대한 잠정적인 방안 마련을 끝낸 국내 채권단은 해외채권단에 40%의 CBO를 제시했다. 이와 함께 삼일회계법인의 SK글로벌 실사결과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이에 대해 해외채권단은 실사결과에 이의를 제기하며 SK글로벌 부실발생의 원인, 발생시기, 책임규명 등을 요구하며 협상할 수 없다고 맞섰다. 본격적으로 양측이 힘겨루기에 들어간 것. 곧이어 7월2일 서울에서 회동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해외채권단은 다시 삼일의 실사결과에 이의를 제기하고는 사실상 100%의 CBO를 요구했다. 협상은 결렬.
그리고 얼마 뒤 홍콩에서 다시 만나자는 연락이 국내 채권단에 전달됐다. 7월9일과 10일 홍콩 스탠다드차터드 은행과 클리어리의 회의실에서 열린 회의에서 해외채권단은 한 술 더 떠 100%의 CBO에 SK글로벌 현지법인의 청산가치를 초과하는 자산에 대해 배당도 달라며 ‘+알파’까지 요구했다.
사실상 판을 깨자는 얘기였다. 협상에 참석한 한 국내채권단 관계자는 “해외채권단은 국내 채권단이 40%의 CBO에서 마지막 양보라며 물러난 43%에 대해서 국제 금융질서도 모르는 ‘촌놈’의 협상안이라고 비웃었다”고 말했다.‘막가파’식 해외채권단의 요구에 국내채권단의 반응은 단순했다. “즉시 귀국”과 “SK글로벌 법정관리”.
7월24일 서울 은행연합회관 국제회의실에서 SK글로벌 전체채권금융기관협의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 참석한 가이 이셔우드 해외채권단 수석대표는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고 SK글로벌에 대해 법정관리를 강행하면 한국 회사들의 대출비용이 높아지는 것은 물론 여신한도가 철회될 수도 있다”며 “삼성 현대 LG 등 한국계 대기업이 제공한 지급보증도 인정하지 않을 수 있다”고 그 ‘유명한’ 협박발언을 내뱉었다.
이에 김승유 하나은행장은 부하직원에게 “똑똑히 통역하라”고 지시한 뒤 “한국기업 차별 운운하는 것은 금융인으로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를 상식밖의 얘기”라며 “그런 말을 왜 했는지 분명히 해명하라”고 일침을 놓았다.
김 행장은 “SK글로벌의 법정관리 신청이 80%가 넘는 채권단의 지지로 찬성됐다”고 선언하며 의사봉을 두드리는 것으로 해외채권단의 협박을 무시했다.
채권단의 법정관리 결의가 하루쯤 지나자 해외채권단의 기세가 누그러졌던지 대타협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SK그룹의 한 최고위급 임원은 기자에게 “다음주쯤이면 잘 될 것 같다. 너무 그쪽(법정관리)과 관련해서 기사를 쓰지는 말라”면서 협상타결을 시사했다. 그리고 7월29일 홍콩 리츠칼튼호텔에서 양측의 CBO 비율을 둘러싼 사실상 마지막 협상이 진행됐다.
국내채권단은 해외채권단의 전향적인 양보결정이 없으면 곧바로 출국하기 위해 30일 새벽 0시40분 홍콩발 서울행 비행기까지 예약해 둔 상태였다. 결과를 기다리던 국내 채권단에 29일 밤 “해외채권단이 우리 제안을 수용했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수십년간 지속돼온 ‘해외채권단 우대관행’에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다.
유승창 하나증권 애널리스트는 “국내 은행들이 대형화를 통해 경쟁력을 갖추면서 충당금도 일찌감치 충분하게 쌓아놓아 해외 채권은행의 협박에 굴복하지 않을 수 있었다”면서 “초기부터 국내 채권단이 공동대응팀을 만들어 SK글로벌 처리를 치밀하게 조율한 것도 성과를 거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손철 서울경제신문 기자 runiron@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