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연기 괴물’들의 싸움, 그 누구도 옅어지지 않는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 스틸컷. 사진=쇼박스 제공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암살하기 전 40일 간을 추적하고 상상해 만든 영화 ‘남산의 부장들’은 52만 부가 판매된 동명의 논픽션 베스트셀러 원작(원작자 김충식)을 기반으로 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 암살 사건은 근현대사를 다루는 대부분의 정치 드라마나 영화가 한 번 쯤 다룬 이야기지만, 김재규의 시선을 따라가며 10․26 당일이 아닌 그 이전의 긴 행적을 추적하는 것은 관객들의 궁금증을 자극하기에 충분해 보인다.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살짝 달라지긴 했어도 실존 인물과 어디서 그렇게 똑같이 생긴 배우들만 데려왔는지 이름의 차이가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싱크로율을 자랑하고 있기도 하다.
‘거사’를 치르는 중앙정보부장 ‘김규평’ 역을 맡은 이병헌은 더욱 깊어진 눈빛과 내면 연기로 관객의 시선을 잡고 놓아주질 않는다. 극의 초반, 바늘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냉철하고 무미건조해 보이는 이미지가 경호실장 ‘곽상천’(이희준 분)과의 알력, ‘박통’(이성민 분)에 대한 신뢰와 배신이 교차하면서 겪게 되는 내적 갈등, 친구 ‘박용각’(곽도원 분) 전 중앙정보부장과의 만남과 처리를 통해 시시각각 변하면서 관객들은 역사적 사실 그 자체가 아닌 김규평의 감정선을 따라 근현대사 속 그 ‘40일’을 감상하게 된다.
한 인간이 ‘거사’를 치르기까지의 심경 변화가 문장 하나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가파른 곡선을 그리며 움직이고 있는 셈이다. 대사 없이 눈빛과 광대 바로 아래 근육의 아주 미세한 떨림 만으로도 관객들을 긴장시키는 이병헌의 모습은 대중들의 이 말을 다시 한 번 떠올리게 한다. “이병헌은 정말 지적할 게 없는 배우다. 연기로는.”
영화 ‘남산의 부장들’ 스틸컷. 사진=쇼박스 제공
15일 오후 서울 용산구 CGV 용산아이파크몰점에서 진행된 영화 ‘남산의 부장들’의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이병헌은 “개인적인 생각으로 감정을 더 키우거나, 줄이는 등 조금이라도 왜곡되지 않게 하려고 했다 시나리오에 입각해 이 인물이 보여주고자 하는 감정을 연기하려 애썼다”라고 설명했다. 그의 말대로 이병헌이 맡은 김규평은 가장 가파른 심경 변화의 곡선을 보이면서도 이를 직접적으로 폭발시키는 것은 경호실장과 정면으로 붙을 때와 마지막 거사를 치를 때, 단 두 신 뿐이다.
이름 석 자가 안 나와도 누구나 다 아는 ‘박통’으로는 이성민이 분해 이병헌과 정면으로 부딪친다. 말투와 걸음걸이, 흥분하면 말이 속사포처럼 빨라지는 버릇까지 완벽히 재연해 낸 이성민은 권력의 정점에 선 인간이 추락할 때만 보일 수 있는 불신과 불안, 광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모를 자신의 연기만으로 입증해 내고 있다.
이성민의 박통은 이 영화에 등장하는 ‘세 명의 부장들’ 사이에서 조화를 깨고, 변주를 지휘하는 또 다른 중심인물이기도 하다. 극의 시선은 김규평을 통해 옮겨지고 또 전개되지만 여기에 더 큰 생동감을 부여하는 것은 박통이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 스틸컷. 사진=쇼박스 제공
이에 대해 이성민은 “이 역할을 하면서 어떻게 이 세 부장과 밀당을 잘 해야 할까, 이들의 마음을 어떻게 움직이고 요동치게 만들고, 때로는 품어주게 만들고 하는 ‘변주’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신경 쓰고 연기했다”고 설명했다. 극중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그의 대사 “임자 옆에는 내가 있잖아. 임자 하고 싶은 대로 해.”는 이 같은 변주의 시작이자, 시한폭탄의 스위치이기도 하다.
오랜만에 스크린에 등장한 곽도원은 미국으로 도피해 각하의 부정과 비리를 낱낱이 고발하는 데 앞장서는 전 중앙정보부장 박용각으로 열연을 펼쳤다. 혁명 동지인 규평을 만나서는 순진했던 모습을 간직한 친구로, 로비스트와 움직일 때는 폭로자로서 스크린에 잡힐 때마다 다른 톤으로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여주는 그의 연기는 마지막까지 눈을 떼서는 안 될 이 영화의 또 다른 관전 포인트다.
박통을 신념처럼 여기며 충성하는 경호실장 ‘곽상천’ 역으로는 이희준이 맡아 25kg 증량까지 감행하는 파격적인 연기 변신을 해냈다. 자칫 무겁게만 흐를 수 있는 극의 분위기 속에서 맞지 않는 듯 하면서도 조화되는 유머스러운 대사나 행동을 보여주지만, 결코 그런 류의 캐릭터만으로 소비되지 않도록 단호하게 균형을 잡기도 한다. 박통, 다른 부장들과 다른 톤의 연기를 하면서도 이야기에 부드럽게 섞여들 수 있는 것도 그가 잡아낸 균형 덕으로 보인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 제작보고회 현장. 사진=고성준 기자
‘남산의 부장들’은 우민호 감독의 ‘내부자들’ ‘마약왕’으로 이어지는 욕망 3부작 가운데 마지막 작품이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센세이셔널하면서도 한 때 금기로까지 여겨졌던 역사의 한 장면을 스크린에 옮기는 데 정치적 메시지에 대한 우려를 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그랬기 때문인지,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는 두 가지가 없다. 과장과 미화(美化)다. 거사를 치른 김규평조차도 그의 업적에 마냥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것이 아니라 실연에 가까운 배신감과 치욕, 분노와 실망이 어우러진 인간 그 자체의 고뇌를 담아 완성시켰다.
이에 대해 우민호 감독은 “(영화는) 정치적인 성격이나 색깔을 띠지 않고 있다. 인물들에 대한 공과 과는 넣지 않았다”라며 “인물들의 내면과 심리묘사를 따라가면서 영화를 만들었다. 판단은 영화를 보시는 관객들이 하시면 좋을 것 같다”고 짧게 밝혔다.
한편, ‘남산의 부장들’은 1979년 10월 26일, 제2의 권력자라 불리던 중앙정보부장 김규평(이병헌 분)이 대한민국 대통령 암살사건을 벌이기 전 40일 간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권력의 정점에 서 있으면서도 한없이 불안해하며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 박통(이성민 분)과 그를 충정으로 따르면서도 권력을 잡아 정권을 쥐락펴락 하려는 경호실장 곽상천(이희준 분), 박통의 추종자였으나 배신당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대한민국 정부의 비리를 폭로한 전 중앙정보부장 박용각(곽도원 분)의 네 명을 중심으로 근현대사에서 가장 유명한 한 장면이 탄생하게 된 뒷이야기를 전한다. 네 명의 배우들이 단 한 치의 양보 없는 연기를 펼치는데도 불협화음을 찾아낼 수가 없는 완벽한 113분. 15세 관람가, 22일 개봉.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