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백두산’ 이어 2020년 ‘남산의 부장들’, 남북 오가며 변화무쌍한 연기 선보여
배우 이병헌. 사진=BH엔터테인먼트 제공
“‘이 영화는 이병헌이 다 했다’는 말이 나와요? 어휴, 그런 말씀 해주시면 저는 진짜 너무 감사하죠. 근데 저는 그런 말씀 하시는 것 못 들었는데(웃음).”
서울 종로구 소격동의 한 카페에서 일요신문과 만난 이병헌은 대중의 평가를 두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실제로 지난 12월 19일 개봉한 영화 ‘백두산’을 관람한 관객들은 이병헌을 두고 “연기력으로는 절대 비난할 수 없는 배우”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갑작스럽게 분화한 백두산의 화산 폭발을 막기 위해 남한의 EOD(폭발물 처리반) 조인창 대위(하정우 분)와 함께 고군분투하는 북한의 이중 스파이 리준평 역을 맡은 그의 연기는 종잡을 수 없는 리준평의 캐릭터성을 극대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극중에서 전라도 사투리를 능숙하게 구사하며 능청을 떨다가 남한 군인들이 긴장감을 푸는 모습을 보이자마자 곧바로 북한말을 쓰며 “보이는 것만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고 날카롭게 치고 들어오는 신은 스크린 속은 물론, 그 밖의 공기마저 싸늘하게 얼어붙도록 만든다. 돈을 쓴 티가 나는 CG(컴퓨터그래픽) 신을 제외하면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시퀀스이기도 하다.
“리준평은 남한이건 북한이건, 자본주의건 공산주의건 상관하지 않고 자기의 이익이 가장 중요한 캐릭터예요. 그런 그가 남한 사람들 앞에서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건 상대를 현혹시키기 위한 수단인 거죠. 사실은 전라도 사투리를 쓴다고 했을 때 자칫 잘못하면 ‘내부자들’의 안상구 캐릭터가 리준평에게 겹쳐질까봐 우려되기도 했어요. 그런데 일단 첫 촬영을 마치고 나니 그런 고민이 없어지더라고요. 굳이 따지자면, 리준평의 사투리는 목포 사투리예요. 반면 안상구의 사투리는 광주 사투리죠. 아마 그 지역에 사시는 분들은 그런 디테일을 바로 아실 거예요(웃음).”
배우 이병헌. 사진=BH엔터테인먼트 제공
‘백두산’ 속 이병헌은 어투만 들으면 금방 탈북한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완벽한 이북 사투리를 구사한다. 영화를 찍으며 러시아어 선생님과 중국어 선생님은 물론, 전라도 사투리와 북한말 선생님까지 모셔와 가르침을 받았다는 게 ‘백두산’의 제작 비하인드 스토리다. 특히 처음부터 끝까지 북한말을 써야 했던 캐릭터의 특성상 북한말 선생님은 계속해서 현장에 상주해 있어야 했다.
“제가 이북 사투리는 이번에 처음 해 봤어요.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사투리를 써야 한다는 게 좀 부담스러울 수 있는데 선생님이 항상 곁에서 뉘앙스를 지적하고 고쳐주시니까 완벽한 연기가 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게 또 한편으로는 참 든든하기도 했고요.”
이병헌의 날카로운 사투리는 조금 답답할 정도로 느린 하정우의 서울말과 비교해 더욱 날 서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번에 첫 합을 맞춘 이병헌과 하정우는 남한과 북한의 명운이 걸린 긴박한 상황 속에서 ‘주거니 받거니’로 관객들을 시시때때로 웃기고 울린다. 주로 이병헌이 딴죽을 걸고, 하정우가 멋쩍게 받아치는 식이다. 그런데 이 ‘티격태격’ 신 속 대사들이 실제 시나리오엔 없었다고 했다(관련기사 [인터뷰] ‘백두산’ 하정우 “수지와 부부 연기? 매순간 어색했죠”).
“하정우 씨가 애드리브를 엄청 쳐요(웃음). 극중에서 저와 하정우 씨가 같이 장갑차를 타고 이동하는 신이 있는데 거기서 제가 줄임말 농담을 계속 쓰잖아요? 원래 그 신 촬영할 때 하정우 씨가 촬영장에 없었어요. 그래서 제가 먼저 촬영하고, 하정우 씨가 다음날 제 촬영분을 보고 자기 분량을 촬영한 다음에 그걸 합쳐서 한 신으로 만든 거예요. 제가 촬영할 때 저도 애드리브를 막 쳤거든요. 근데 하정우 씨가 그걸 보고 자기도 애드리브로 받아쳤더라고요(웃음). 제가 ‘남조선 아새끼들은 별걸 다 줄인다’고 얘기하면 하정우 씨가 그걸 보고 ‘별다줄’이라고 하는 식이에요(웃음). 그 신은 거의 다 애드리브였다고 보시면 돼요.”
배우 이병헌. 사진=BH엔터테인먼트 제공
살짝 ‘아재 개그’에 가까운 애드리브를 보며 좋아하는 그의 모습은 이제까지 작품 속에서 보여준 강렬한 이미지와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인다. 활발한 SNS 활동을 즐기며 팬들과 소통하고, 유튜브 ‘먹방’을 챙겨 보기도 한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잊을 만하면 올라오는 이병헌의 일본 팬미팅 ‘무아지경 댄스’ 영상, 이른바 ‘기준!’으로 불리는 이 영상을 인스타그램에 직접 올린 것도 이병헌 본인이라고 했다.
“저도 그 영상 알아요(웃음). 어차피 뭐 다 공개된 거…. 이왕 제 SNS에 오신 분들이 재미있는 거 보고 가시면 좋잖아요, 그걸 제가 올리면 더 재미있고(웃음). 웃을 수 있는 사진이나 영상을 올리기도 하고, 제가 예전에 영화 촬영할 때 찍었던 셀카 같은 걸 올리기도 해요. 그럼 그 작품을 재미있게 보셨던 분들이 다시 보시고 좋아하실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주변 사람들한테 영향을 좀 많이 받거든요. ‘광해’ 찍을 때는 류승룡 배우 때문이었나, 휴대폰 게임을 엄청 했어요. 이번에 ‘백두산’ 때는 하정우 배우가 유튜브를 진짜 많이 보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한 번 먹방 이런 걸 봤는데, 딱히 재미는 없는데 계속 보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어느 순간은 ‘내가 지금 이걸 왜 보고 있지?’ 하게 되더라고요(웃음).”
배우 본인과 캐릭터의 괴리는 클수록 좋다곤 하지만, 이병헌은 ‘강렬한 캐릭터’로 정의되는 그의 필모그래피를 두고 고민이 깊을 수밖에 없어 보인다. 시나리오를 골라서 받을 수 있는 그의 위치를 생각한다면 캐릭터 하나에만 욕심을 갖고 움직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질문에 그는 깊게 생각하지도 않고 고개부터 저었다. “제가 어릴 때 그랬다가 망했잖아요.” 짧지만 강한 이병헌의 대답이었다.
“그때는 스토리보다 캐릭터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렇게 작품을 하다가 생각하니까 어느 순간 캐릭터만 훌륭하다고 해서 스토리에 힘이 생기는 게 아니란 걸 깨달은 거예요. 결국 사람들은 스토리에 매료되는 거지 제 캐릭터만 보고 가는 게 아니니까요. 저는 그래서 오히려 제 캐릭터보다 상대방의 캐릭터가 잘하면 더 좋아요. ‘투톱으로 가면 경쟁심 같은 거 느끼지 않느냐’고 하시는데 그런 말은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캐릭터의 비중을 두고 경쟁의식을 느끼는 게 아니라 서로간의 상승효과를 기대하는 거예요. 경쟁심을 느끼는 순간 영화는 산으로 가요. 한 사람만 잘하고 한 사람은 못하면 관객들이 그걸 보고 재미있어 하시겠어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